'봐야지 봐야지' 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보는 걸 미루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 <69세>가 그랬다. 그러다 우연히 임선애 감독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강연을 듣고 급하게 상영 중인 곳을 찾아 예매했다. 미투 이후로 성폭력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가 정말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 젊은 여성이 아닌 69세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없었기에, <69세>가 희소성을 가지게 되었단다. 여성이자 노인인 주인공 효정은 여성 혐오와 노인 혐오, 두 가지 혐오에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도 증거도 있지만, 노인이란 이유로 범죄가 인정되지 않는다. 영장은 계속해서 기각당한다. 젊은 남자가 왜 노인을 성폭행하냐는 거다. 오히려 가해자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며 효정을 치매로 몰고 간다. 노인이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은 법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자꾸만 '노인 같지 않고 예쁘다'라며 노인이 아닌 여성으로 평가하는 말들을 한다. 마치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하지'라는 뉘앙스다. '친절이 과했네'라고 하던 형사의 농담 아닌 농담이나 '조심 좀 하시지'라는 옛 동료의 걱정 아닌 걱정은 모두 피해자인 효정에게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똑같이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다니는 효정의 연인 동인에게는 아무도 그런 칭찬을 하지 않는다. 형사에게 말했듯 효정에게 옷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대충 입으면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안전장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전장치가 결국 효정을 위험에 빠트린 셈이다.
영화 내내 사람들은 은연중에 노인 혐오 발언을 내뱉는다. 빨간불에 길을 건넌 효정을 향한 '앞이 안 보이면 관에나 들어가라'라는 외침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우리 사회에 분리수거할 게 쓰레기만 있는 건 아니지'라는 말은 상대가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는, 노인이라는 점에 대한 혐오 표현이다. 영화를 만들 때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참고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며 나 역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자동차 운전자나 편의점 알바생의 말은 의도적인 혐오다. 하지만 효정과 동거한다는 동인의 외침에 일순간 싸해진 분위기와 묘한 웃음, 그리고 '노인답지 않게 옷을 잘 입는다'라는 효정을 향한 사람들의 칭찬 역시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을 '선량한 혐오'다.
극적이고 통쾌한 결말의 영화는 아니다. 결말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초고에서는 치매 설정을 넣기도 했다. 망각을 통한 구원이다. 하지만 우연히 '고통은 물질이라 몸에 남는다'라는 말을 보게 되었고, 망각이 너무 쉬운 선택이고 영화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무수한 고민 끝에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라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빌려 내일의 범죄에 용기가 아닌 두려움을 주기로 한다. '내 인생 망칠 일 있어?'라는 가해자의 외침에 효정이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라고 말한 이유다.
굉장히 현실적인 영화다. 그럼에도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영화적이다. 다큐멘터리였다면 아마 피해자의 고통에 초점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69세>는 피해 전시를 하기보다 피해자의 용기와 결정에 초점을 맞춘다. 효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처음이 아닐, 그래서 수년째 우울증약을 복용했을 효정은 여태 그래왔듯 슬픔과 아픔을 극복해낼 것이다. 범죄로 일상이 무너진 것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다. 효정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이 영화가 사각지대를 비추는 보조미러 같은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가해자에게 '당신이 저지른 범죄는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가장 느리지만, 그래서 가장 확실한 방법인 영화로서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혹은 잊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역할을 정말 제대로 해낸 영화가 이 영화, <6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