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부드러운 벽이되는 일

관계 안에서 배운 거리와 무너지지 않는 다정함에 대하여

by 하프웜
출처:망그러진 곰

사람이 좋았다.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손을 내미는 일.


그 단순한 행위들이 두 마음 사이에

조용히 불을 밝혀주는 등불 같았다.


마음을 건네는 건 용기가 아니라 습관이었고,

다정함은 기다림보다

먼저 도착하는 감정이라고 믿었다.


서툰 말도, 어설픈 몸짓도

어쩐지 전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줄을 설 때면

자꾸만 마지막에 남게 되었고,

불리지 않는 이름,

의도 없는 배제,

말 대신 이어지는 공기의 조용한 선긋기.



그건 크지 않은 일들이었지만

마음 안쪽을 조용히 밀고 들어왔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였으나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낯설어졌다.


그 후로,

말보다 눈치를 먼저 건네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보다

목소리의 속도에 먼저 귀 기울였고,

표정보다 침묵의 결을 읽으려 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내 마음이 빠질 구멍부터 찾는 일이 익숙해졌다.


여린 마음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으려

무심한 말투를 입고,

예의 바른 거리감 속에 스스로를 감췄다.


기대는 줄었고,

물러서는 순간은 빨라졌다.

가까움이 늘 따뜻함만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걸

어느 틈엔가 알게 되었으니까.


사람이 싫어졌던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졌고,

그래서 더 오래 지켜보고 싶어진 것이다.


좋아하는 감정은 여전했지만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 마음이 나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꺼내는 방식은 달라져야 했다.


모든 관계가 깊어질 필요는 없고,

모든 감정이 증명될 이유도 없다.


어떤 마음은 소리 없이 곁을 지키고,

어떤 마음은 차라리 간직된 채로 더 오래 남는다.

그 차이를 헤아릴 줄 아는 일이

조금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마음을 숨기는 게 아니라,

마음을 흘려보낼 타이밍을 아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다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누구의 전부가 아니어도 서운하지 않다.


대신,

내 안의 마음만큼은

내가 먼저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쉽게 닿지 않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감정.

그것이야말로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윤리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좋아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천천히 어른이 되었다.


기대는 적지만

그만큼 흔들림도 적어졌다.

가까워지고 싶지만

함께 무너지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는 선택이 나를 지켜줬다.


서툴던 마음은 오래 묵히며 익어갔고,

지나친 다정은 때로 침묵보다

가벼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말보다 호흡을,

호흡보다 무게를

먼저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사람 사이에서

거리와 방향

그리고 마음의 무게를 배운다.


가까이 있다고 더 따뜻한 것도 아니고,

멀어졌다고 반드시 식는 것도 아니다.


관계는 온도보다

내가 머물고 싶은 자리를

정하는 일에 더 가깝다.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

그 마음에 나 자신이 휘청이지 않도록

적당한 속도로 걸어가는 것.


그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태도의 결과였다.


어린 날엔 몰랐던 것,

지금은 알게 된 어떤 마음의 형식.


이제는 꺾이지 않고,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 멀어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오래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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