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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는 내 돈을 먹었지만

우리는 행복했어요.

와 요즘 세상에 코인노래방 안가 본 사람도 있냐고요?

네네 있습니다, 죄송해요. 저 어제 처음 가봤어요.


아 물론 19살 때 어디 도서관 옆 큰 오락실에 있던 두 칸짜리 코인노래방은 가봤어요.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코인 노래방이었어요. 동전만 들어갔고요, 딱 붙어서 두 명? 두 명도 같이 들어가긴 좀 답답한 크기였던 것 같아요. 거의 1인 노래방 느낌이었죠.


근데 몇 년 전부터 애들이 '코노, 코노' 거리더라고요. 우리 애들은 어려서 안 그랬고요, 지나가던 중딩이 고딩이들이 하는 얘기를 엿들었어요. 아이쿠, 엿들었다기 보단 그냥 귀에 와서 꽂힌 거죠 뭐. 처음 듣는 단어였으니까요!



저는 말에 민감해요. 어법에 맞지 않게 말하는 경우나 처음 듣는 단어, 혹은 틀린 발음으로 말하는 경우에 바로 알아채는 편이에요. 그런 저는 안 틀리냐고요? 아니죠, 저도 왕창 틀려요. 근데 제가 아는 걸 누가 틀리면 그게 그렇게 또 거슬리더라고요? 흠. 


암튼 코노, 이게 뭔가 하고 귀를 쫑긋 세우다 보니 또 금방 알긴 하겠더라고요. 워낙 줄임말이 대세인 시대라, 아 요거 또 줄임말이겠구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코인노래방이 보였어요. '역시, 난 아직 죽지 않았어'를 속으로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죠.


그런 코노가 벌써 꽤 오랜 기간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감염의 주범 중 하나로 낙인찍혀 한 때 좀 외면받는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죠. 이제 코로나 그런 거 다들 뭐 신경 안 쓰잖아요? (그래도 조심들 하셔야 해요)




어제 오후였어요. 

큰 아이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막둥이 손을 꼬옥 잡고 집을 나섰죠. 학교에서 하라고 하는 '구강 검진' 기간이 이틀밖에 안 남았거든요. 기한 꽉 채울 때까지 버틴 주제에 또 나름 꼼꼼한 척 뒤늦은 예약을 하고 '역시 난 야무져' 시전을 하며 치과로 향했어요. 치과는 듣던 대로 아주 한산했고(예약도 필요 없을 만큼 사람이 없어서 예약이 수월했던 거였어요) 검진 역시 듣던 대로 5초 만에 끝이 났습니다. 5초씩 두 명이니까 10초... 진짜예요!


아 자꾸 얘기가 딴 데로 새네요. ㅋㅋ 그래도 어때요. 저 좀 편하게 얘기해도 되죠?


그렇게 치과 볼일을 10초 컷으로 마치고 내려와 아이들 손을 꼭 붙잡은 채 뭐 시원한 거라도 사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막둥이가 냅다 뭐라고 외쳤어요.


"어! 노래방이다!!"


어... 그래.. 노래방. 여기 몇 년째 이 자리에 계속 있던 거야!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못 봤어?


"어!!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그럴 만도 합니다. 우리 막내, 한글을 늦게 깨친 관계로 이전에는 길거리에 지나면서 간판에 관심이 전혀 없었거든요. 봐야 할 것만 보며 다니다 보니 요건 또 처음 본겁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키즈 브이로그 채널을 좀 본다 싶더니, 코인노래방도 어디서 봤나 봐요.


평소 같으면 엄청 망설이고 안 된다, 나중에 가자 어쩌구 했을 저인데요, 이상하게 어제는 갑자기 화끈한 마미가 되었어요. 남편도 저녁 먹고 온다고 했겠다, 애들은 저녁에 수영 가는 날이겠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대충 밖에서 놀다가 저녁밥까지 때우고 들어가야지! 그리고 수영 보내고 자유부인 해야겠다 유후~!


전광석화처럼 생각이 정리된 저는 아이들 어깨에 팔을 두르고 경쾌하게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코노들은 대개 지하에 있더라고요?!


대여섯 시 밖에 되지 않은 시간, 노래방 안은 한산했어요. 일반 노래방과 어떻게 다른가 굉장히 궁금했는데, 비슷한 듯 다르더라고요. 카운터는 비어있고, 입구엔 동전 교환 기계가 있었어요. 음료 자판기도요.


"여기.. 코인 노래방이라 진짜 코인만 들어가나 봐.. 어떡하지? 엄마 카드 밖에 없는데."


아이들과 저는 울상이 되어 일단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어요. 아주 작은 방이었어요. 그래도 초딩이 둘과 저까지 셋은 무난히 입주할 수 있었죠. 

"오, 카드 되는데?" 


이런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하는 고학년 첫째가 외쳤어요. 그리고 후다닥 결제 시스템에 내 카드를 맡겨 버렸어요. 6곡에 3500원. 카드로는 이게 최저 단위더라고요.

진짜 한 곡 씩만 불러보자 하고 온 거라서, 6곡도 많다 생각하며 결제를 했어요. 첫 곡은 막둥이가 골랐죠. 싸이의 강남스타일.


경쾌한 반주가 작은 방에 울려 퍼지고 아이들과 저는 신이 났어요. 평소 보기 힘든 둘째의 발재간 손재간 댄스 삼매경을 보며 마이크를 움켜쥐고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어? 아아, 아- 아-"


마이크가 먹통이었어요. 최신 시설답게 무선마이크 두 개가 꽂혀 있었는데, 둘 다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하아.

이것저것 눌러보고 돌려보고 별 짓을 다 하다가 옆방으로 살짝 넘어가 마이크를 켜고 소리를 내봤어요. 어머. 소리가 잘 나네요?




이런.. 그 많고 많은 방 중 우리가 고른 방의 마이크가 고장인 거였어요. 휴우. 고장 날 거면 카드 단말기도 같이 고장이 나던가. 코노는 처음이라 마이크를 미리 체크해야 한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제길슨.


그래도 당연히 주인장님께 전화를 하면 어디선가 카메라로 지켜보고 있다가 우리를 구제해 줄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카운터로 가서 벽면에 전화번호가 어디 있나 열심히 두리번거렸죠. 음.. 어디 있나... 어디..


전화번호는 없었어요. 아무 데도. 와우.

진짜 거의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아무 데도 남겨져 있지 않더라고요. 그나마 네이버에서 상호로 검색해 찾은 번호는 070 번호였는데, 전화를 하니 전원이 꺼져 있다고 나오더라고요. 하하. 여긴 정말 무인 업소가 맞나 봅니다.


큰돈은 아니었어요. 3500원. 메가커피에서 바닐라라테 살 돈 정도 됩니다.

커피 한 잔 사 먹었다고 생각하면 되긴 하는데, 아이들 데리고 좀 그렇더라고요. 쪼잔하게 돈 버렸으니 그냥 가자고 할 수도 없고, 애들은 이미 신났는데 말이죠. 결국 어디선가 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카운터 앞에서 방황도 해보고 카메라를 올려도 보고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우린 다른 방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엔 마이크 확인을 철저하게 했죠. 이번엔 스탠딩 마이크도 있는 방으로!

아쉬웠던 강남스타일은 이번엔 제끼고, 새로운 곡들을 선곡했습니다. 순진무구한 초딩이들의 선곡은 대략 이런 거였어요.


✔ 뽀로로- 바라밤(같이 불러주다가 '바라바라밤' 부분이 몇십 번은 나오는 바람에.. 혀에 쥐 나는 줄 알았답니다.)

✔ 네모의 꿈(큰애 2학년 때 학교에서 선생님이 들려주고 좋아하는 곡이 되었어요)

✔ 내가 바라는 세상(대망의 엔딩 곡, 셋이 같이 불러 95점 나왔어요. 금메달 딴 듯 환호했지요.)


여기에 엄마인 저는 뭘 불렀을까요? 20년 전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페이지의 '이별이 오지 못하게'를 불렀답니다. 하하하.. 아직 죽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심취해서 불러봤습니다.

근데.. 뽀로로 다음 곡으로, 그것도 초딩이들 옆에서 벌건 대낮 오후 다섯 시에 어느 지하 코노에서 이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될 줄은. 20년 전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아 너무 행복해요.




코노는 내 돈을 먹었지만 우리는 행복했어요.

노래방에서 소리소리 질러보고 목이 쉬어 저음불가 상태가 되어 나오는 걸, 요 꼬맹이들은 처음 해보는 경험이더라고요. 살짝 흥분한 말투와 들뜬 표정이 너무나 예뻤어요.

저는 아직 40살인데도(아직도 젊다고 생각함) 세상에 신기한 게 별로 없어지고, 흥분될 만큼 즐거운 일도 이젠 별로 없어서 매일이 그냥 똑같은 일상인데. 아이들에겐 이런 작은 경험도 아직 처음 겪은 일이 이리도 많으니,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가요. 그걸 지켜보는 저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은 세상엔 축복받은 이들(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이 엄청 많다는 거고요.


근데..

3천5백 원이 아니라 3만 5천 원을 날렸어도 이렇게 흐뭇하게 마무리되었을까요? ㅎㅎㅎ 아마 그건 아니겠죠!

아마도 코노 앞에 죽치고 앉아서 언젠간 나타날 주인장님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또한 추억이겠지만 말이에요.




오늘은 결혼기념일입니다.

뜬금없죠? 

오늘 저녁은 맛난 거 먹고, 아빠까지 같이 4인 완전체로 코노에 다시 가려고 해요.

방이 꽉 끼려나요? 그럼 두 개로 나누죠 뭐. 

마이크는 꼭 미리 체크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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