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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습 꿉꿉한 날씨에, 댁의 빨래는 안녕하십니까

빨래 쉰내 대환장 스토리

긴 여름이었다.

덥기도 참 덥고, 비도 참 많이 내렸다. 


흔하디 흔한 베란다 하나 없는 all 확장 30평대 아파트. 긴긴 장마철, 그 어렵다는 빨래도 무사히 버텨낸 나였다. 


그런데 어제 아침,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는데 평소에 나지 않던 냄새가 내 코를 급습했다. 쉰내였다. 읍. 


걸레냄새..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빨래를 좀 오랜 기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냄새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요 며칠 계속 비가 오다 말다 했기에, 범인은 습한 날씨겠거니 했다.


거실 구석 창가에 널어둔 빨래에 코를 박았다. 

역시. 전날 세탁기가 이상한지 탈수가 잘 안 된 걸 그냥 널었더니 그게 문제였다. 요즘 날씨도 애매해 에어컨도 끄고 자니, 밤새 창밖에서 들어온 습한 기운이 빨래에 엉겨 붙어 쉬어버린 것 같았다. 

어째 빨기 전보다 더 기이한 냄새가 나는 운동복. 땀냄새가 차라리 낫다.


바로 빨래를 싹 걷어 세탁기에 그대로 다시 투입했다.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게, 건조기에 돌려도 되는 빨래는 건조기로 직행하기 때문에 우리 집엔 미니 건조대만 사용하고 있다. 이 빨래들은 건조기에 넣으면 안 될 것 같은(내 생각), 줄어들 것 같은 옷들이라 이렇게 따로 클래식하게 말린다.


세탁기를 다시 돌리고, 이번엔 탈수가 잘 된(세탁기가 문제다) 옷들을 꺼내 창가 건조대에 널었다.

그렇게 쉰내가 사라진 줄 알았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오늘 아침.


분주하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재택근무를 시작하는데 다시 냄새가 난다.

왜지.


분명히 문제의 원인은 어제 모두 처리했는데. 뭔가 잘못됐나.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원인을 찾아다녔다. 냄새는 유독 안방이자 내가 일하고 있는 방에서 더 나는 것 같았다. 일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스멀스멀 냄새가 올라왔다.


우선 안방 화장실 샤워부스(창문이 있어서, 큰 티셔츠들은 여기에서 옷걸이에 걸어 말린다. 샤워는 여기서 안 한다.)에 걸린 옷들을 확인했다.

어제는 거실에서 냄새가 난 게 확실했기에, 그 옷들을  싹 처리하고 끝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수상쩍다. 확실하지가 않다. 안방 화장실에 걸린 옷들에선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다.


갑자기 하나의 단서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저께 빨래를 하고 건조기에 넣었던 옷들이 사실 문제가 있었다. 낮에 빨래를 하고 바로 건조기를 돌렸는데, 저녁에 확인해 보니 건조기도 말썽인지 빨래가 하나도 안 말라 있었다. 젖은 상태로 한나절 세탁기 속에 갇혀있어서 그런지 빨래에서 냄새가 조금 났지만, 뜨거운 열로 건조하면 괜찮겠지 하고 그대로 다시 돌렸다. 결국 무사히 건조가 되었고, 어제 나는 거기서 베개 커버를 꺼내 안방 침대 베갯속에 잘 씌우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잘 때는 몰랐는데.. 왜 아침이 되니 유독 냄새가 나는 거지.

돌아다니고 활동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어쨌든 어제 낀 커버를 다시 다 빼고 세탁기에 쳐 넣었다.(조금 격해지는 것 이해해 주길)


다시 일을 해야 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또 난다. 또.

이번엔 뭐지.


무시하고 일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던 찰나 생각이 났다. 내가 어제 그 건조기에 있던 티셔츠를 꺼내 입었던 기억. 그 옷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하아.. 

냄새의 근원은 내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베개 커버도 문제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코를 찌르던 건 바로 입고 있던 옷이었던 거다. 한심한데 웃겼다. 실소를 흘리며 바로 웃통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날 돌렸던 빨래는 결국 싹, 다시 빨고 널고 돌리게 되었다. 

5년 전쯤, 지하철에서 은행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서 옆사람을 한껏 흘기다가 내리고서야 은행을 밟은 범인은 내 운동화였다는 걸 알았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친구에게 톡으로 투덜거렸더니 답이 온다. 

그래도 세탁기는, 그 옛날 여성의 참정권과 사회적 지위 향상에 엄청난 도움을 준 기계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세탁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은 하루 종일 빨래만 하다가 끝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이고 남성이고 그런 건 중요치 않고, 역사적으로 정말 세탁기의 발명이 그렇게 중요한 거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다. 정말 감사하다.




빨래를 싹 다시 하면서, 내친김에 베개 속도 햇볕에 널어놨다. 

며칠 내내 우중충하고 비가 오다 말다 하더니 오늘은 해가 쨍하다. 다시 여름이 온 것 같아 덥고 힘들지만, 오랜만에 해를 보니 에너지가 솟는다. 날씨 때문에 우울하다, 빨래가 안 말라 답답하다, 쉰내가 나서 세탁기에 과탄산소다를 듬뿍 넣었다는 류의 수다는 오늘은 없을 것이다.


역시 사람에겐, 햇빛이 필요하다. 빨래에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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