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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이를 못 먹습니다만

그게 뭐 어때서요

"오이 빼주세요!"


김밥집에 가면 주문 말미에 늘 붙이는 말이다. 일부러 경쾌하게 말한다. 눈치 보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그릇 한편에 김밥 개수만큼의 오이를 쪼로록 남겨두는 것보다는 훨씬 예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 가는 동네 김밥집 포스기엔 '오이 없음'이 있다. 주문을 받으실 때 아예 그 버튼을 터치하신다. 그만큼 오이를 빼달라는 손님이 많다는 말이겠지. 나는 더욱 당당해진다.


사실 오이 못 먹는 사람이 좀 많아 보여서, 그리고 이제 난 어른이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 당당했었다. 하지만 날 놀라게 한 기사가 있었다. 좀 오래됐지만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오싫모'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 페이지에는 단 7일 만에 무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를 통해 본 오싫모 회원들 중에는, 오이로 인해 트라우마까지 있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 시절 오이를 못 먹는다고 선생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았거나, 가까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른인데 왜 그렇게 편식을 하냐, 야채를 못 먹네 등등 다양한 이상한 '취급'을 받는 사람도 많았다. 아니 뭐 다들 싫어하거나 못 먹는 음식 하나쯤은 있는 것 아닌가? 이해가 잘 안 갔다. 그걸 왜 뭐라고 하는 거지. 어른이 되어서도 못 먹는다는 건, 정말 그게 싫거나 비위가 상하는 등의 이유가 있는 것인데 말이다.



앗, 사진만 봐도 어디선가 오이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다...   출처 : 픽사베이



나처럼 특별한 신체적 문제가 없음에도 오이 향을 유독 싫어하는 사람들은 '오이 알레르기'가 있는 거라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나는 오이를 먹을 수는 있다. 참고 먹을 순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삼킬 수는 있으나 참 괴롭다. 먹는다고 몸에 두드러기가 나진 않는 것 같다. 음.. 혹시 억지로 '많이' 먹게 될 경우엔 그럴 수도 있겠다. 너무 맛이 없어서,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그냥 향이 싫다. 생오이의 향. 그게 참 별로다. 비릿하고 역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향이 시원하고 향긋하다고 한다. 오이는 95퍼센트가 수분이고 섬유질이 풍부하고.. 여하튼 몸에는 좋다고 한다. 피부에 얹어두면 오이마사지가 된다. 산에 갈 때도 필수다. 초등학교 때 매년 '산행 대회'라는 행사가 있었다. 내가 '걷기 대회'와 함께 정말 손에 꼽게 싫어했던 연례행사였는데, 산행 대회는 남한산성에서 등산을 하는 거였고, 걷기 대회는 학교에서부터 올림픽 공원까지 걷는 거였다. 왜... 왜 오르고 걷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준비물은 늘 오이였다. 수분을 보충하기 위한 오이. 야채를 좋아하는 엄마는 오이를 열심히 싸주셨다. 하지만 난 단 한 개도 먹지 않았다. 모두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나는 물이면 충분했다. 불쌍한 오이.. 나와는 친해질 수 없었다. (내가 불쌍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이를 변형시킨 건 먹는다. 나는 '생오이의 향'이 싫은 거라, 오이를 양념에 한껏 버무린 오이소박이라든가 피클, 오이지 같은 건 먹는다. 생오이 향만 사라지면 된다. 물론 오이소박이의 양념이 너무 약해서 생오이 맛이 강하게 난다면... 그럼 또 바이바이다. 어쩔 수 없다.


오이를 미리 제거하지 않고 먹게 될 경우 좋지 않은 점이 있다. 

내가 먹은 김밥의 개수가 들통난다. 분식집 같은 경우 보통 여러 메뉴를 시켜 나눠 먹게 되는데, 일일이 빼고 먹다간 '너 몇 개 먹었지!' 하고 지목당할 수 있다. 물론 이젠 다 커서 그런 웃기는 지적은 안 받지만, 어릴 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좋지 않다. 

냉면의 경우 보조그릇 등에 멀쩡한 오이를 빼 버리게 된다. 민망하고 미안하다. 유난스럽다. 친한 친구나 다정한 애인이 있다면 예외겠다. 알콩달콩 내 음식에 있는 오이를 싹 없애주는 멋진 연인...  무서운 오이를 제거해 주는 박력 있는 애인. 하지만 결혼하니 그런 애인은 사라졌다. 네가 안 먹으니 애들도 잘 안 먹지 않느냐고 타박한다. 그냥... 주문 단계에서부터 슬쩍 빼달라고 사장님께 귀띔하는 게 백번 나은 일이다.


오이에 대한 걸 생각하다 보니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오이가 길어서 내 말도 긴 것인가... 아마 그건 아닌 것 같다. 



이토록 꽉찬 오이 단지가 세 개나 되다니...   출처 : 픽사베이



큰 아이는 오이를 잘 먹는다. 만 10살, 4학년이다. 사실 뭐든 잘 먹는다. 이젠 나를 놀리기까지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이전에 어디선가 본 그 기사를 들먹인다. 엄만 사실 오이 알레르기가 있는 거라고. 몸이 이상해지진 않지만 오이를 거부하는 유전자가 있는 거라고. 그럼 또 둘째는 그런다. 자기가 엄마 닮아서 오이를 싫어한다고. 나도 오이 빼달라고. 하하하. 그걸 보는 남편은 말한다. 애들 앞에서 거 좀 그냥 먹지 자꾸 티 내니까 애들도 그런다고.. 무심코 등장한 오이에 애엄마는 원, 투, 쓰리 펀치 맞은 기분이다. 너덜너덜해진다.


거의 가지는 않지만 목욕탕에서의 오이 향은 참을만하다. 세신사의 손길로 얼굴에 빼곡히 놓여지는 갈린 오이 더미는 기꺼이 참을 수 있다. 예뻐지는 거니까...라고 생각한다. 그까짓 거 입으로 숨 쉬면 된다. 안 되면 조금만 참는다. 나는 그 정도는 가능하다. 


오이를 나보다 훨씬 싫어하는 분들도 많다고 알고 있다. 양념한 오이, 절인 오이도 못 먹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다 이해한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고, 다양한 취향이 있다. 체질도 성격도 모두 다르다.

내가 잘 먹는 무언가를 누가 못 먹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는 싫어할 때 우린 자꾸 그 사람을 특이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내가 다수에 속한다고 생각할 때 특히 그렇다. 한 명 한 명이 내는 작은 목소리가 뭉치면 커진다. 오이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분들도 아마 그런 일을 겪은 분들일 것이다. 공개적으로 비난받았거나 타박당했거나, 어릴 때 심하게 혼이 났거나. 


그러지 말자. 존중할 건 존중하자. 성인이 되어서도 그렇다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이는, 아니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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