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언니, 어젠 집에 들어왔더니 가족들이 다 자고 있더라. 언닌 막둥이가 기다리고 있었지? 전화까지 하고. 우리 집은 옅은 불 하나 켜 있고 남자 셋 모두 세상모르고 자고 있더라고. 좀 적적했지만 그래도 좋았어. 재우는 수고를 덜 수 있잖아. 자는 모습이 제일 예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심야영화를 보고 오니 예상보다 참 좋네. 갑자기 보게 된 거라 기대 안 했는데, 왜 이런 재미를 모르고 살았지 싶어. 사실 모른 건 아니야. 큰애 낳기 전, 그러니까 임신했을 때까지만 해도 신혼이라 그랬나. 남편이랑 둘이 심야영화를 자주 봤어. 인적 드문 11시-12시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참 상쾌하고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좋은 걸 10년 간 못하고 살았네. 드디어 어제 다시 시작했지만. 무슨 얘길 하고 싶냐고? 고맙다고. 제안해 줘서. 언니를 보면 그런 걸 느껴. 난 이 정도 살면서도 뭐는 이래서 못하고 뭐는 저래서 못하는데, 나의 몇 곱절은 바쁘면서 틈틈이 그것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양한 걸 즐기고 누리는 게 참 멋있다는 생각. 늘 느끼지만 세상을 보는 시야, 앞날을 계획하는 생각의 크기가 넓고 길어서 그런 것 같아. 부러워만 하지 않고 부지런히 배워가고 있으니 뭐라 하진 말고!
<작은아씨들>을 보고 나니 자매들에 빙의된 건가. 나도 모르게 반말을 하고 있지만 뭐 마음의 소리니까 반말이고 존댓말이고 상관없다고 생각해 줘. 한국어는 거의 모든 면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언어인데 딱 이 부분만 마음에 안 들어. 경어체라는 게 보통은 상대에게 존중을 표하기 참 쉬운 도구가 되는데(가끔은 마음에 존중이 없어도 존댓말 하나로 다 해결되지), 때로는 거리감을 좁혀주지 못하기도 해. 난 대학교에 재수를 해서 들어갔는데, 고3 때까지만 해도 같은 학년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한 학번 선배가 된 거잖아. 그때 절실히 느꼈어. 어색한 존댓말을 몇 년간 하다가 4학년쯤 돼서 갑자기 말을 놓고 친해진 선배가 있거든. 말이 편해지니 거리감도 확 줄고, 더 가까워지더라고. 그게 모두에게 적용될 순 없지만 그땐 참 잘한 일이었어. 그 선배랑은 아직도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거든.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많아. 굳이 그리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경우, 존댓말을 이용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을 때가 있어. 나만 그런 건 아닐걸? 한국어를 쓰면서 가장 유리한 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 드라마나 영화 속 연인들을 봐도, 고백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존댓말을 쓰면서 거리를 두고 상대를 밀어내기도 하잖아. 또 어떤 부부들은 일부러 싸울 때는 꼭 존댓말을 쓰기로 약속하기도 한다더라! 이건 참 대단한 것 같아. 평소 존대를 하던 사이도 싸우면 반말이 튀어나올 판에 말이야.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애초에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참 멋지긴 하다, 그치?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서로에게 글 한편씩 써주자는 얘기가 나왔을 땐 우선 너무 재밌고 반가웠어. 그리고 즐겁게 영화를 보고 와서 씻으며 생각을 하는데, 머릿속에 영화의 잔상이 너무 많이 남더라고. 그걸 다 적어두고 싶었어. 어떤 심정인지 알지? 장면마다의 기억 하나하나, 생각의 조각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지. 마음 같아선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컴퓨터를 켜고 글로 남겨두고 싶었어. 하지만 그게 쉽나, 어제 나눴던 얘기 중 '잠의 중요성'이 떠오르며 나 자신을 설득했지. 아니, 합리화했다고 해야 하나? 하하. 대신 그래서(바로 자서) 지금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쓸 수 있는 거라 생각해.
오면서도 얘기했지만 '조'라는 캐릭터가 제일 매력적이더라. 자기주장 강하고 개성 있는 성격. 요즘 간간히 이어서 보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더 재미있었어. 두 영화에서 모두 '조'같은 여성이 나와. 영국과 미국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시대적으로 비슷한 것 같아.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위치 같은 부분이 애매하던 시기. 지금하고 비교하면 애매하다고 할 수도 없겠다. 한없이 지위가 낮을 때지. 유명한 여성 작가가 적은 것도, 그리고 그나마 존재한 그 여성 작가에게 주어진 상패조차도 남자들이 준 것이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 참 씁쓸했어. 지금 시대의 시선으로는 이런 말이나 의견이 참 조심스러운 것 알아. 하지만 영화에선 특히 그랬어. 브리저튼에서도 그렇거든, 여성도 배우고 직업을 갖고 목소리를 내자는 운동이 음지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시대. 물론 둘 다 완전한 픽션이긴 하지만, 여성이 참정권을 갖기 전의 요동치는 사회 분위기가 절절히 느껴지더라.
조세핀(조)이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속 쓰고 투고하고 책을 만드는 과정들도 흥미로웠어. 요즘의 방식과 비교되어 너무 신기하더라. 활자를 하나하나 배치해서 잉크 발라 찍어내고, 단단한 책표지에 풀칠하고 종이를 바느질해 제본하는 일련의 과정들 모두. 컴퓨터가 없던 그때 일일이 손으로 글을 쓰다 보니 손은 얼마나 아팠을까, 대체 몇 통의 잉크를 썼을까 궁금해졌어. 종이를 방 한가득 순서대로 펼쳐놓고 돌아다니며 엎드려서 퇴고하는 모습은 내 기준 최고의 장면이었지. 펼쳐진 종이 사이에 초를 중간중간 세워 뒀는데(전기가 없으니), 그게 엎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더라. 아니 그러고 보면 전기가 상용화된 것도 정말 얼마 안 되는구나. 20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많이 힘들었겠어.
하루가 지나니 이렇게 인상 깊은 이야기만 드문드문하게 되네. 재미있다. 어젯밤만 해도 영화의 전체 내용이 맴돌더니, 오늘은 좀 더 뇌리에 콕 박힌 것들 위주로 회상하게 돼. 내가 낭독과 스피치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조가 베스에게 자기 글을 읽어주는 장면도 너무 좋았어. (난 그 와중에 또 역시 낭독에는 치유의 힘이 있어,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네. 하하) 바닷가 그 장면, 어제 우리 오면서도 얘기했잖아. 아름다웠다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 참 좋더라. 아픈 베스가 좀 추워 보이긴 했지만.
한 가지만 더 얘기해야겠다. 영화의 색감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 과거 회상 장면은 그토록 밝은 톤과 맑은 날씨로, 현재 모습은 약간은 칙칙하고 차가운, 정말 현실적인 느낌으로 표현했잖아. 언니가 그랬지, 과거 회상 씬에선 흐린 날이 없다고. 그 얘기하면서 웃었잖아. 맞아 나는 근데 '흐린 날이 없네'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따뜻한 톤에 홀려버렸던 것 같아. 과거는 웜톤으로, 현재는 쿨톤으로. 제작진의 의도겠지, 너무나 보이는. 그렇게 우린 뻔히 알면서도 지나간 일에 자꾸 매달리고 집중하고, 과거의 기억은 그렇게 조금씩은 미화되어 기억되고 그러나 봐.
영화를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 걱정 없던 시절, 하나뿐인 언니와 깔깔대고 영원할 것처럼 놀던 때가 떠올랐어. 모두 좋게 포장된 기억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진심으로. 그러면서 지금의 모습은 왜 저렇게 칙칙할까 생각도 했는데,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해. 지금 닥친 일들은 누구에게나 버겁고 새로우니까. 실제라면 너무나 힘들었을 자매의 어머니의 시선도 궁금해. 엄마의 시선에선 남편 없이 아이들을 돌보던 가난했던 과거의 순간순간이 어떤 색으로 기억될까? 웜톤일까, 쿨톤일까?
자매형제가 여럿인 언니는 더 많은 생각과 공감을 하면서 봤을 것 같아, 훨씬 깊이 있을 언니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네. 내가 너무 편하게 얘기했지만 이해하고 읽어줬으면 좋겠어. 그럼 이만 줄일게, 안녕!
-24년 1월, 아직 영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동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