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 Good Sep 03. 2018

같은 뱃속에서도 다른 아이가!

편견과 차별 그리고 사랑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넌 왜 그렇게 다르냐? 


누군가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들어온 말이기도 하고, 나와 내 동생이 나이 들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농담 삼아 늘어놓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낳으면 모든 부모가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가 사뭇 부정적인 건 아마도 이 말을 사용하는 다양한 매체나 환경이 그러하기에 또한 당연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말을 사용하거나 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분명 상대적인 차이를 비교하는 의미가 더욱 포함된 것이란 걸 느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넌 왜 더 못하는지, 혹은 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처럼, 아마도 상대적으로 더 못났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하고 있는 말일 가능성이 크다.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너는 왜 이렇게 잘하냐? 이런 말은 난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은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너는 왜 너의 형과 그렇게 다르냐 라고 말하는 의미는, 공부를 못하거나, 부모에게 예의가 없거나 기타 더욱 안 좋은 무언가를 갖고 있을 가능성, 이 더 크기 때문이다.      


같은 뱃속에서 자라서 이 세상에 나오더라도,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 다르다는 건 평가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와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를 무엇으로 비교하느냐에 따라 한쪽은 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한동안 세상에 IQ가 인간의 어떤 절대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전부라도 되듯 맹신하고(물론 지금도 굉장한 파워를 가진 것 같다) 있을 때, 다중지능이라는 새로운 평가, 즉 사람의 능력을 독립적인 9가지 유형으로 판단하는 하워드 가드너의 이론이 나오자, 다양한 해외 매체에서 이를 다룬 영상과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난다. 지능이 낮은 장애아가 예술적인 재능에 큰 두각을 나타내는 사례를 들면서 시작을 했던 것 같다.      


종래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단순히,

“머리가 나쁘지만(IQ는 낮지만), 그림은 잘 그리네.”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것, 공부를 하는 것, 운동을 하는 것, 소위 말해 인간이 하는 모든 건 머릿속 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있다. 사람들이 소위 ‘운동신경’이 좋다고 말하는 걸 보면, 결국 운동능력도 단순한 신체적 능력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대한민국에서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 사람들이 궁금해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덕담은, “똑똑하게 자라나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일 것이다. 모유를 잘 먹어도, 몸을 잘 뒤 치덕 거려도, 울음이 커도, 모든 반응은 그저 그놈 참 똘똘하네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그 똘똘함의 편견 속에서 남들과 또는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조차 그 편견으로 생기는 차별이 조금씩 커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아이의 부모도 이 엉뚱한 생각의 굴레 속에 갇히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누구나 ‘나’의 편한 기준으로 바라보는 양식을 쉽게 바꾸거나 인식하기란 어려운 법이니 말이다.      


아이들 각자가 자신만의 개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일단 그 첫 편견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어떤 기준에 의해 자신만이 타고난 복잡하고 가늠할 수 없는 개성 있는 능력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잘못된 시선에 의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단지 돌잔치 때 손을 뻗어 잡은 것이 연필이 아니고 축구공이라는 이유로 운동선수의 꿈을 가져야 하는 아이러니 말이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는 그렇게 서로 달랐다. 유달리 어릴 때부터 엄마의 목소리에 민감한 첫째 아이는 책을 읽는데도 흡수가 빠르고 워낙 몸을 움직이는 것에 둔감하거나 관심이 없다 보니 더욱 책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셋 중에 유일하게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일어난 것이 첫째 아이다. 기는 단계를 생략하고 빨리 걸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기는 단계에서 기지 못하고 배밀이만 힘들게 하다가 나이가 들어(?) 일어선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운동선수 감은 아닌 듯하다. 돌잔치 때 축구공 잡아서 축구 선수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와 달리, 둘째는 아마도 첫째보다는 관심을 두기 힘든 현실적인 상황도 있지만, 책을 좋아하더라도 그 분야가 전혀 다르다. 첫째는 논리적인 과학이라면, 둘째는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 안에 사람들의 감정을 주로 궁금해하는 그런 타입인 것이다. 자연스레 성장하는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첫째 아이 기준으로는 둘째는 뭔가 머리가 부족한 똑똑하지 못한 아이라고 첫째아이와의 사이에서 단순히 상대적 평가를 해버릴 수도 있다. 물론 지금 10살과 7살이 된 아이들을 보면, 그 다름이 개별적인 아이들이 갖는 소중한 인격이자, 우리가 각각의 아이들을 존중토록 생각케 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부모는 아이들을 모두 사랑한다.      

통상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매우 귀엽거나 사랑스럽다’라고 되어 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들이지만, 사실 눈에 넣기 전부터 아플 것 같은 자식도 있다. 속 좁은 나 같은 아빠의 잠시 생각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내일 그리고 하루하루의 현실에서 아이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부모들에게 말이다.      


‘이쁘긴 한데... 말을 이렇게 안 들어.. “ 와이프가 가끔 쓰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을 화내면서 하지도 못한다. 화를 내면 아이들에게 앞에 말은 전혀 안 들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두 말을 모두 듣게 하려니 쉽지는 않다. 사랑하는데, 지금 너의 행동을 좀 고쳤으면 좋겠다. 아이들에 귀에는 대부분 ’ 말 좀 잘 들어라 ‘하는 꾸지람과, 높아지는 목소리의 ’ 톤‘만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 첫째와 둘째를 키우는 몇 년 동안, 하루하루가 내 중심의 기준으로 인한 편견과 차별이 가득했던 아빠 육아의 시기였던 것 같다. 아빠로서 아이들의 상대적인 성향에 그만 휘둘려 내 중심을 잡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내 감정을 두다 보니, 모두 사랑하는 건 맞지만, 하루하루의 삶에서 아이들에게 편견을 갖게 되기도 하고, 가끔은 차별을 하기도 한 것 같다(내 속에서만 알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막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달려와 보니,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개별적으로 바라봐 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건 현재도 진행형 속에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 함께 있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나의 주관적 기준으로 상대적인 비교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말이다. 개별적인 인격체로 봐주기가 얼마나 어렵기에. 순전히 나의 문제지만 말이다.     


아이들을 각자의 개성에 맞게 표현해 주고 사랑해주면, 전혀 다른 선물과 방법이 될지라도 아이들은 공정하다고 받아들이고 스스로 사랑받는 느낌을 느끼는 것 같다. 애써 공평하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속의 비교 우위를 감추며 표현되는 외적인 공평함은 오히려 아이들 각각의 인격을 온전하게 존중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기 마련이다.

      

어린아이들은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느껴지는 것으로 살아가고, 그렇게 자라나면 그 마음의 느껴짐으로 생각한다.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결국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갖게 될 이성은 태초에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관계인 부모가 그 씨를 뿌린 감정이 열매 맺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같은 어른이라도 ’ 이성‘이라는 이름의 ’ 상식‘이 다 같지 않음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사랑은 단순히 편견과 차별을 덮기위한 가치가 아니다. 


사랑은 사람마다 표현이 달라지고 포옹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어도, 세상 어느 기준 보다도 공평하고 정의로우므로 그것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서로 다를지라도 편견과 차별이 없이 온전한 개인을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편견과 차별로 대하면서 사랑으로 그것을 감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해이며,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를 함께 세워보려는 인간의 교만일 뿐이다.   

 

오늘 하루, 세 명이 뒤엉켜 놀고 있는 분주함 속에서도, 각자의 이름을 불러 그 이름 이름마다의 개성을 사랑해 줄 수 있기를 노력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육아 골키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