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낡은 취미
남자들에겐 취미, 와이프들에겐 골칫덩어리인 것들은 뭐가 있을까? 골프, 등산, 낚시, 야구 등 각종 아웃도어 스포츠 그리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볼링, 당구, 탁구 같은 공놀이도 있지만 조금 더 오타쿠스럽게 들어가면, 사진, 게임, 건프라, 피규어 수집 등등 무수히도 많다. 그중에 3대 악취미로 알려진, 낚시, 자동차 그리고, 오디오가 있다. 이토록 남자들이 집에서 등짝 스매싱을 맞을 일들은 무궁무진하다.
자동차나 낚시야 알만한 사람들은 잘 알고, 취미가 층도 두텁다. 그럼 오디오는 어떠한가? 얼마나 장비들이 비싸고, 어떠한 치명적 중독성이 있기에 주변에 악취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조금은 다르다고 느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거실 중앙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전축'세트는 부의 상징과도 같았다. 양쪽에 인켈이나 태광, 야마하 등의 스피커가 자리 잡고, 가운데 유리문의 장식장 안에 엠프, 데크, CDP, 튜너, 턴테이블이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을 좀 산다는 집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카카오나 통신사에서 출시한 AI 스피커, 그리고 심플하고 예쁜 올인원 스피커들이 시장을 다 가져가고 있고, 홈 오디오 시장은 거의 사리지지 못해 남아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오프라인 매장들은 용산과 남부터미널 국제 전자상가의 구석에 겨우 자리 잡아 버티어 내는 모습이다.
나는 또 다른 취미로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쪽 사정과 아주 흡사하다. 필름과 필름 카메라를 제조하는 곳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시장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까지 와있다. 그나마 필름 카메라는 20대 어린 유저들도 종종 아날로그의 궁금증에 입문하기도 하지만, 홈 오디오는 100% 나이 많은 수컷의 취미이다. 오디오 샾의 주인들도 대부분 은퇴 후, 사업하시는 분들을 포함해 나이가 많은 분들 뿐이고, 수많은 중고거래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 은퇴하거나 은퇴를 바라보는 남자들, 30대 후반인 나는 가장 어린 편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우선 홈 오디오는 골방이든 거실이든 충분한 공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음악이라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며, 어느 정도 장비에 투자할 경제적 여유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음악도 음악이지만 하드웨어 장비에 기본적인 관심이 있는 남자들이 빠져들기 쉽고, 여자들에겐 공감하기 쉽지 않은 취미이다. 재밌는 것은 정작 소리의 구별은 여자들이 훨씬 더 잘하고 정확한 편이다. 결론적으로 남자들은 막귀들이면서 돈을 퍼붓는 형국이라고 봐야 할까.
이렇다 보니 아이들 다 키우고 시간이 막 덤빈다거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 그리고 유년시절 놀러 갔던 친구 집 거실에서 보았던 전축에 로망을 품고 사는 낡고 촌스러운 아저씨들의 돈 많이 드는 꽁냥꽁냥 한 취미로서 그 규모는 아주 작다 하겠다. 적어도 대중적이진 않다.
오디오란 게 처음엔 가볍게 올인원 기기나 별도의 엠프가 필요 없는 전원 일체형 액티브 스피커로 시작하고, 백이면 백 그 쯤에서 타협하지만, 혹시라도 파워엠프와 프리엠프를 합쳐놓은 인티 엠프와 패시브 스피커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덫에 걸렸다고 보면 된다. 인터 케이블, 스피커 케이블, 광케이블 그리고 PC와 연결하기 위한 DAC(Digital to Analog Converter)등 무수한 주변기기가 필요하고, 케이블만 몇십 몇백만 원 하기도 한다.
뭐 그렇지만 대부분 몇만 원에 해결되고, 대충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불행하게도 모두가 그렇진 않다는 것.
그리고 내가 언제 오디오에 빠졌는지를 말하려면 꽤나 멀리 1992년까지 가야 한다. 귀찮지만 가보자.
1992년 초등학교 6학년 귀요미 시절, 음악을 듣는 것은 TV나 라디오가 가장 접근이 쉬웠었다. 워크맨은 정말 고가라 생각도 못했고, 카세트 플레이어도 학교 전체에서 공동으로 사용해서 필요하면 자료실이나 교무실에서 가져오고 반납해야 했으니 하여튼 음악 감상이란 비싸고 접근하기 어려운 고상한 취미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꼬맹이들이 장래희망란에 '제 꿈은 대통령입니다'와 비슷한 느낌으로 취미란에 '음악 감상'을 적었던 것을 보면 그 정도 허세였던 것이라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같은 반 녀석들이 테이프를 들고 자랑하기 시작했다. '넥스트' 2집,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가장 많이 보였다. 몇 백 원 손에 쥐고 다니는 코흘리개들이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테이프가 있어도 집에 플레이어가 있는 애들이 많지 않았다. 물론 나도 없었다. 집에 낡은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고장 나서 먼지만 쌓인 게 기억날 뿐.
어느 봄날, 교실 뒷자리에 앉았던 최소희라는 친구가 넥스트 2집이 너무 좋다며 빌려준다고 했는데, 집에서 들어볼 수도 없으면서 쿨한 척 받아서 2~3일 집에 두었다가 노래 좋더라며 돌려준 기억이 있다.
난생처음 집에 가져온 음반이었지만 고장 난 플레이어로는 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테이프를 들어보려고 씨름했던 내 모습을 어머님이 보셨던 것 같다. 바로 그 해 여름 더블데크+CD플레이어가 내 책상에 똵!
성당에서 흘러들어온 성가 테이프와 왜 집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트롯메들리 같은 테이프만 4~5개 먼지 쌓여 있을 뿐, 내가 들을 만한 음반은 없었다. 동네에 우리 집에 멋진 플레이어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앞집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그놈 누나가 '015B 2집'과 '노이즈 1집'을 빌려주었다.
특히 '015B 2집'은 정말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듣고 또 듣고, 듣고 싶은 곡을 다시 들으려고 되감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테이프가 늘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그런 증상을 처음 보아서 나도 많이 놀랬고, 늘어진 테이프를 돌려주었을 때 그 누나(당시 중2)는 괜찮다며 날 안심시켰지만 표정은 울 것 같았다. 누나에게 보상을 어떻게 해준 기억은 없다. 남동생 친구 놈들이란....
결국 나도 내 용돈을 헐어 음반이라는 것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유동 화계사거리에 2개, 우이초등학교 육교 밑에 1개의 음반가게가 있었고, 꼬맹이들이 가도 무시받지 않고 고를 수 있는 매장은 육교 및 작은 가게였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어떤 음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온몸을 짜릿하게 휘감는 사운드에 압도되었다. 빼곡하게 매장을 채운 LP와 Tape 그리고 CD, '그래! 우리 집에서도 CD를 들을 수 있어!' 당시 턴테이블이란 걸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커다란 쟁반 같은 저 LP들의 사용법은 알 길이 없지만 CD는 뭔지 알고 있다. 아는 형이나 친구들 집에서 본 적도 있고 들어 본 적도 있다. 흥분된 마음으로 CD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비닐에 짱짱하게 포장되어 반짝이는 것이 여간 고급스러울 수가 없다. 그러나, 곧 슬쩍 원래 자리에 올려놓았다. 분명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만 원이 넘었던 것 같다. 심장이 크게 뛰어올랐다가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다. 주머니엔 천 원짜리 한 두 장이 반으로 접혀 있을 뿐인데...... 만 원이면 떡볶이가 몇 그릇인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자연스럽게 TAPE 코너로 갔다.(하지만 분명 쭈뼛거렸겠지.) 주인아저씨가 말을 건다.
"뭐 찾는 거 있니?"
그런 게 어딨나. 아는 뮤지션이라곤 '가요 top 10'에서 본 몇몇이지만 그나마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 새로 나온 거 없나요?"
내가 생각해도 말을 잘한 거 같다.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뭐 글쎄, 요새 애들이 뭘 좋아하려나..."
이쯤에서 살짝 무시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아니요. 요즘 대학생들한테 인기 많은 거, 뭐 그런 거 없나요?..."
"어 뭐 요새 박정운도 반응 좋고, 손지창 앨범도 잘 나가지. 지금 나오는 노래가 손지창이고 박정운 들어볼래?"
들어보면 사야 하는 걸지도 모르니 급히 사양한다.
그러면서 손지창 테이프를 꺼내어 봤는데 4,500원이라고 찍힌 견출지가 붙여있었다.
"손지창은 배우인 줄 알았는데, 가수도 하나 봐요? 신기하네요. 암튼 다음에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도망치듯이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한참을 더 고민하고, 돈을 모으고 몇 주 뒤에나 다른 매장으로 가서
자주 음반을 사는 손님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생애 첫 음반으로 '손지창 1집'을 구매하게 되었다.
. 아직 풋풋한 30대 아저씨이지만, 갈수록 밖에서 자전거 타거나 산에 오르거나 농구공을 들고나가는 시간보다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네이버 카페에서 오디오를 좋아하는 아저씨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도 한다. 스피커나 엠프를 사고팔고, 케이블 바꾸면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어떤 엠프가 특정 스피커와 매칭이 좋은지, 나쁜지 토론도 하고, 정보도 얻고, 자랑도 하고 그들만의 대화를 한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용어들이 난무한다. 그러다 필름 사진과 홈 오디오에서 둘 다 오래된 구닥다리 아재 취미라는 것 이외에 공통점을 찾았다.
둘 다 현재, 지금이라는 시간에 큰 가치를 둔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그 순간이 빛이 렌즈를 통해 필름면에 입사되고, 거의 영구적으로 기록된다. 디지털 정보로 보이지 않는 컬러 이미지 정보가 클라우드에 저장되는 것과 손으로 꺼내어 보는 기록은 무엇이 좋다 나쁘다 이전에 같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필름 냄새를 좋아하는 변태니까.
고가의 오디오 장비 투자는 자동차나 명품처럼 소유욕이나 과시욕의 해소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집구석에서 혼자 듣는 시스템이고, 더구나 아재들 윗급의 선배님들께선 보통 SNS도 귀찮아하시거나,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들은 지난 과거에 해보지 못했던 바로 지금의 자신을 위한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거운 가장의 타이틀도 내려놓고 누군가를 위한 것도 아닌, 머리 아픈 투자도 아닌, 오롯이 지금의 내가 즐겁고 행복하기 위한 낯설지만 행복한 취미. 처음엔 5만 원짜리 케이블에도 행복하고 쾌감을 느끼게 되지만 자칫 500만 원, 천만 원이 넘어도 쉽게 만족 못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면 이미 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고 다시 처분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새로운 세계에서 적정선을 지키는 것은 언제든 쉽지 않은 것이니까.
그렇게 투자한 장비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음악이다. 우리는 1년에 15일 휴가를 얻어 살아가는 노예나 기계가 아니고, 먹고 마시고 삶을 즐기고 싶은 인간이다. 집에 홈 오디오 시스템이 구축되면 거실은 카페가 되기도 하고, 주말엔 클럽이 되고, 영화관도 된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결국 이기적인 내 욕구에 의한 취미이지만, 딸이 댄스곡에 몸을 흔들고, 셋이 조르륵 앉아 귤 까먹으며 영화를 볼 때 뿌듯한 기분은 최고다. 짜릿하다.
최신 카메라들이 내가 바라본 순간을 필름에 기록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래도 KT의 기가 지니는 JBL 4312E처럼 우리 딸을 춤추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었던 질문 하나,
당신이 마지막으로 춤을 춘 날은 언제 인가요? 내 대답은 말이죠.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