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알바 이력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바로 돈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 탓이었다. 다행히도 부모님께서 등록금은 책임져주시겠다고 했지만, 이외의 것은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대학 생활 초반에는 아버지가 편의점을 하시고 계셔서 거기 일을 돕는 대가로 약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가게는 내가 군대 훈련소에 있을 때 망하고 말았다.
결국, 대부분 또래와 같이 나 또한 아르바이트 세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불안한 심정으로 알바천국 같은 곳을 휘젓고 다니다 주말 야간 편의점 자리를 하나 구하게 되었다. 친구가 다녔던 곳이었는데, 점주분에 대한 평판이 아주 좋았고, 편의점은 집 근처에 있었다. 더욱이 나는 한때 ‘편의점집 아들내미’가 아니었던가. 묘한 자신감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야간 손님은 생각보다 적었다. 가게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음악이 나오기는 했지만, 나 홀로 서 있다 보니 그 큰 소리들은 오히려 ‘너는 혼자 있다’라는 사실을 강조시켜주는 듯했다. 청소를 하고, 진열을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가끔 오는 손님들을 상대하고. 이외에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소일을 했다. 편의점 알바 이야기는 이렇게 대부분 다 비슷하다.
가끔 찾아오는 진상들의 이야기가 특별함을 더할 뿐이다. 돈을 던지는 사람, 엄연히 파는 종이컵을 공짜로 달라는 사람, 대뜸 반말부터 하는 사람 등등. 어떤 날은 너무 서러워서 울뻔하다가 곧바로 다른 손님이 들어와서 울먹거리는 상태로 담배를 꺼내 계산한 날도 있었다.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도울 때부터 많이 겪던 일이다. 그때는 어느 손님과 말싸움을 벌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겪을 때마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아마 이 시리즈의 이름은 ‘편돌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해당 시리즈의 제목은 ‘빠레트’다. 쉽게 내가 계속 편의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18년, 최저임금이 꽤나 많이 올랐고 점주 분은 사정이 어려워 결국 해당 지점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이 따라왔다.
어떻게 보면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주변 일대의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한 번에 많은 세대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버렸다. 아파트 공사도 막 시작한 상황이었다. 해당 편의점 고정 수입도 떨어졌다. 최저임금은 비극의 원인이었다기보다, 결정타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이런 분석은 쓸데없었다. 일자리가 사라졌다. 인생 최초의 해고였다. 어쩔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만 크게 키우게 되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항상 불안했다. 관심병사의 생활을 현부심을 통해 겨우 청산했다. 하지만, 군대라는 단어는 나를 늘 괴롭혔고 강박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계속 늘 먹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식비를 투입했을 때가 이 때다. 어떻게든 더 먹어야 스트레스가 풀렸다. 돈이 없으면 휴대폰 소액결제를 통해 기프티콘을 구매하는 식으로 먹을 걸 구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돈은 없고 스트레스는 가중된다. 계속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써서 먹는다, 그리고 또 돈이 없다. 그렇게 끔찍했던 군대에서 빠져나온 나의 삶은 여전히 지옥 같았다. 우울감은 깊어져 갔다. 누군가는 병원을 권하기도 했고,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병원이 두려웠다. 군대에서의 경험이 강렬하게 떠오를까 걱정되었다. 먹을 거에 도피가 계속되었다.
그래도 편의점 알바는 이를 어느 정도 완충시켜주고는 했는데, 이제 그게 없어졌다. 나는 다른 살길을 찾아야 했다. 때마침 시에서 아르바이트 과외(무슨 사업이라고 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신청한 것에 선정되었다. 편의점보다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과외 알바 특성상 시급이 강했고, 딱히 다른 알바 자리를 찾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이에 응했다.
중학생 한 명을 데리고 수학 과외를 했다. 덕분에 간만에 수학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다지 재밌지는 않았지만, 내 지도 아래 좀 더 나은 실력을 보유하게 된 그 학생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꽤나 재밌는 경험이었다. 내가 얼마나 이 쪽 일에 소질이 있는지 스스로 점검도하고, 시간적 여유도 생긴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돈이 이전보다 줄고, 악순환 패턴은 계속되어서 더 이상 과외에만 의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디서 찾는다 말인가? 고민하던 중에 동생이 자기가 최근에 다니는 곳이 있다면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이를 덥석 받았고, 동생의 안내에 따라 P사 물류창고 일용직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정확히 2018년 7월 1일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급한 돈만 채우고 바로 빠지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물류창고에 출근하는 나날은 장기화되었다. 시와 약속했던 과외 기간 이후에는 다음 차시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포기하고 아예 물류창고 알바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3번째 알바를 물류창고에서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곳의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주 주말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는 그곳에 나가게 될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일한지도 거의 2년이 다 되어간다. 사람들은 나보고 참 많이 버텼다고 한다. 나 자신도 그런 면에서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항상 그런 감정만 느낀 것은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 자신의 상황도 많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보건소의 도움으로 상담과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해서, 많이 상태가 호전되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이를 받지 않게 되었는데,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 자리를 빌려 모든 관계자 분들과 의사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린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전과 다른 동기로 글을 쓰고 싶어 졌다. ‘공병기’나 ‘내 이름은 군대’를 쓸 때와는 다른 동기들. 그때는 나의 내면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에는 내가 외부 세계를 관찰한 것을 ‘공유’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니는 물류창고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몇 편 써보기로 작정했다.
배달 노동자에 대한 수고는 이미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물건은 갑자기 어디서 생겨서 배달원이 수거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한다. 나를 포함한 내가 있던 P사의 물류창고도 그 일원 중 하나다. 나는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미리 말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노동자들은 결코 슬픈 존재가 아니다. 혹사당하는 편도 아니다. 오히려 다른 물류창고 알바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더 좋은 환경에 있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의 목적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거기에서 내가 관찰한 것들을 말하려고 할 뿐이다. (내 감정이 치유되는 과정은 덤이다.) 우리는 택배를 기다리는 설렘을 한 번 정도는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설렘이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다. 비록 내가 일하던 파트는 반품이었으나 어느 정도 그런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는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같이 물류창고로 같이 들어가 보자. 나와 함께 흰 장갑을 끼고 같이 빠레트를 깔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