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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문 May 26. 2020

체첸 기사를 보고 한국 게이가 두려워하다

격리는 어디서나

어느 날 페이스북을 보다 두려운 소식을 하나 듣게 되었다. 러시아 체첸 공화국에서 게이 강제 수용소라는 곳이 존재한다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구글에 검색해보니 허프포스트의 기사 하나가 나온다.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반정부 신문 노바야 가제타는 16세에서 50세에 이르는 남성들이 “전통적이지 않은 성지향 또는 그러한 의심”에 따라 구금 당했다는 경찰 내부자의 발언을 보도했다. LGBTQ 인권 단체 GayRussia.ru가 프라이드 행진 허가를 요청하자 구금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허가는 즉시 거부당했다고 인디펜던트가 4월 3일에 보도했다. (체첸 공화국 러시아 지역 '게이 강제 수용소' 뉴스에 전세계가 분노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당신은 아마 ‘21세기에’라는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직도 성적 지향을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는 곳이 있단 말인가? 아직도 단순히 사람이 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을 위기에 빠져야 하는 곳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한국의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이쯤 되면 천국이지.’라고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잠시 아마 당신은 곧 다른 기사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소일거리를 할 거라 생각된다. 이 기사는 곧 관심사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퀴어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 기사는 그냥 넘어갈 무언가가 아니다. 당신이 ‘이쯤 되면’이라고 칭했던 한국 사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확실히 한국에서는 ‘게이 강제 수용소’ 같은 곳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게이 강제 수용소’는 없지만, 게이이기 때문에 감옥에 갈 수는 있다. 한국은 동성애자를 처벌할 수 있는 소도미 조항이 군형법 제92조의 6에 규정되어 있다.  합의된 성관계를, 성범죄로 보고 처벌할 수 있는 해당 조항은 ‘항문 성교’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누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뻔하다.

‘이성애자들도 그런 성교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성애자 군인 중에서 해당 조항 위반으로 끌려간 사람이 있던가? 이성애자 군인들은 합의된 관계에서 어떤 성교를 해도 아무 간섭도 하지 않지만, 동성애자 군인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유독 성군기, 범죄 가능성이 이성애에 비해 강력히 제기된다. 이성애에 같은 잣대를 들이댄 적이 우리 사회에서 있던가? 만일 그랬다면 군대 내 성폭행은 진작에 뿌리 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한국이 퀴어를 어떤 식으로 사회적 격리시키는지 보여주는 무수히 많은 사례 중 하나다. 우리는 적어도 게이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에 가득 찰지도 모르겠지만, 퀴어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격리당하고 있다. 이태원 클럽 감염 사태를 생각해보자.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모인 군중’ 자체가 확산의 원인인데, 국민일보 등은 ‘성적 지향’을 부각한다. 코로나는 성적 지향과 무관한 병이고, 지금까지 이성애자가 절대다수로 해당 병에 걸렸음에도 아무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사람들은 확진자의 성적 지향을 멋대로 추측하고, 그 장소가 코로나와 상관없이 더러운 그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공익을 위한다고 이 사태에 자신들의 잘못을 항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무엇이 공익인가. 당시 이태원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나는 게이가 아닙니다’라고 변명을 하는 상황이었다. 왜 그런가? 마치 퀴어라는 사실 자체가 감염의 온상인 것처럼 서술하고, 그들만의 잘못인 것처럼 낙인찍은 결과가 아닌가.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일부가 굳이 자기가 이성애자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 사태에서 ‘이태원 클럽에 갔던 이성애자입니다’라는 목소리는 크다. 하지만 ‘이태원에 클럽에 갔던 동성애자입니다.’라는 목소리는 없다.

퀴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가 두려운 사회라는 증거다. 이태원과 관련이 없음에도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감염원 취급받고, 직장에서 불이익받을까 걱정하고 있는 퀴어들이 있다. 이것이 공익의 일환인가? 오히려 역행해버렸다. 그나마 최근에 조금씩 일부에서 가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시도 자체마저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무려 ‘공익’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 사회가 도대체 체첸과 뭐가 다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결국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드러내지만 않으면 퀴어들 아무도 안 건드리지요’라고 고상히 생각하고 있다면, 나의 반응은 전혀 과하지 않다. 조용히 숨어 살라는 것, 퀴어들이 사회 구석에서 격리만 된다면 문제없다는 것. 이런 사회가 성소수자들에게 거대한 감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한국 사회는 진지하게 성소수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기를, 조용히 살기를 바라며 아무 문제가 없기를 강요할 뿐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왜 퀴어들이 모이는 공간은 항상 이태원 같은 지역뿐인지, 왜 매년 굳이 축제까지 열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이런 무지와 게으름 속에 퀴어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당한다. 그들이 당당하게 성적 지향을 밝히며 사는 삶은 구석에서만 피어나고, 중앙에서는 싹도 자라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이 정도면 천국’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건 아무래도 이 문제에 관심 없는 이성애자들 뿐이지 않을까? 동성애 반대가 거리에서 대규모의 인파를 거느리는 한국에서 퀴어인 나는 체첸의 ‘게이 강제 수용소’나 한국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격리’나 모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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