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6

by 함지연

그러다가 볕에 이불을 널기 위해 베란다 문을 연 어느 낮, 나는 709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봤답니다. 어린아이처럼 소다맛 뽕따를 쪽쪽 빨아 먹으며 단지 앞을 거닐던 여자였죠. 그녀가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얼굴을 찌푸렸어요. 아기 가진 여자가 너무하네. 나는 그녀가 경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나이에 참지 못할 일이 뭐가 있다고 저럴까 한심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녀가 죽고, 흔적들이 싹 다 지워지고 난 후, 그 새벽 담배를 피우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요. 어둠 속에서 한동안 작고 연약한 빨간 불빛이 스러졌다가 다시 살아나곤 했었죠.


보지도 듣지도 못했는데 자꾸만 그 여자가 뛰어내리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바닥에 충돌하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어요. 때로는 102동 어디쯤에서 옷가지나 비닐봉지 같은 것이 훅 날리는 것 같고, 누웠다가 펑 하고 타이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에 놀라서 일어나면 먼 곳에서 들리는 정체 모를 기척이거나 했어요. 그럴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어요.


창밖으로 상체를 기울여보기도 했어요. 저 아래까지 도달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칠 때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바닥으로 떨어지는 어느 찰나에 혼절할 것인가, 9층이거나 8층 사이일까, 또는 2층이거나 1층 베란다 사이 마침내 추락지점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의 찰나일까 그러면 보도블록 틈에 납작 엎드려 핀 민들레꽃을 볼 수도 있겠네, 집요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보면 또다시 무언가 혼처럼 너풀거리는데 그건 분명 내 옷인 거예요. 하도 입어서 목이 늘어난 티셔츠거나 무릎에 꿰맨 자국이 있는 고무줄 바지이거나 암튼 그건 분명 내 옷인 거예요.


방에 누워 뒤척이다 도로 나와 거실과 주방을 서성거렸어요. 민이의 단단히 잠긴 방문을 괜히 한번 만져보다가 베란다에 나가 아득한 바닥을 오래 내려다보다가 허공에 나부끼는 어쩌면 내 것일 옷자락을 섬뜩하게 노려보다가 마침내 서랍을 열었는데 몇 알 남았으려니 했던 졸피뎀은 다 먹고 없었어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집을 나왔죠.


편의점으로 가서 눈에 보이는 아무 담뱃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이거요? 마일드세븐?

네, 바로 그거요.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하나 사서 돌아왔어요. 나는 다만 숨을 쉬고 싶었고 다만 잠을 자고 싶었어요. 새벽이었고 다니는 사람도 없었지만, 내가 그랬듯 누군가가 내려다볼 수도 있어서 길에서 피울 수는 없었어요. 아시잖아요.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은 세 동짜리 아파트 단지에요. 더군다나 시가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것도, 시어머니와 같은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도 다 알잖아요. 생선 가게에 가서 가자미 한 마리 주세요, 그러면 주인이 가자미를 담아 건네며 자기 시어머니는 조림을 한다고 도루묵을 사 갔어, 하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말을 하기도 하잖아요.


숨어서 피울 곳이 필요했죠. 어린 시절의 그 여자처럼, 709호 여자처럼 말이에요. 집에 들어와도 숨을 곳은 많지 않았어요. 베란다로 나가 쌓아둔 잡동사니 옆에 쪼그리고 앉았어요.

그때부터 쭉 담배를 피우고 있어요. 앞으로도 금연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건강을 위해 하루에 한 갑 이상은 피우지 않기로 했어요. 여름마다 니코틴 해독에 좋은 복숭아도 자주 사 먹죠.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좋은 것이 생긴 것만으로도 내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거든요.

제발 전화 좀 그만하세요.


곧 들어가서 어머님과 형님이 하는 수고를 나눠서 한다니까요. 텔레비전 앞에 옆으로 누운 남자들 먹을 점심을 함께 차리자고요. 따분하면 입이 더 궁금하기 마련이니 사과도 깎아서 갖다 주고 그저께 하루 종일 만들어 김치냉장고에 넣은 살얼음 낀 식혜도 한 잔씩 갖다주자고요. 밥알을 좋아하는 아버님께는 밥알을 넉넉하게 넣어 숟가락과 같이 드리고 삭은 밥알을 싫어해서 국물만 싹 먹고 남기는 아주버님과 민이 아빠에게는 밥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국물만 가만히 떠서 갖다 주자고요. 씹을 것과 마실 것을 골고루 갖다주자고요. 먹고 마신 다음에는 소화 잘 되라고 훼스탈을 한 알씩 미지근한 물과 함께 갖다 주자고요.


자, 이제 우리는 녹두전을 부칩시다. 치자를 물에 우려 노랗게 부칩시다. 서너 장을 서둘러 부처 아버님께 한 접시 갖다드리고 맛이 어떻다 하시는지 기다려야죠. 짜다고 하면 급히 물과 간 녹두와 찹쌀, 고기를 더 넣고 싱겁다고 하면 소금을 두어 꼬집 휘휘 뿌려요. 얼른 수습을 해야 나중에 밥상 앞에서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죠. 기껏 만들었는데, 공은커녕 타박을 들으면 짜증 나잖아요. 짜다거나 싱겁다거나 마늘이 덜 들어갔다거나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진짜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요. 차례상에 올릴 커다란 녹두전 세 장을 부치고 나면 베어 먹기 좋게 동글동글 작은 녹두전을 부쳐야죠. 어머님과 형님과 나 이렇게 셋이 부엌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요.


줄이자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래도 집에서 기름 냄새가 나야 명절 기분이 나지, 돌아갈 때 전이라도 두둑이 싸가야 명절 기분이 나지 이러는 어머님 고집대로 이번 추석에도 다라이 한가득 녹두를 불리고 있어요. 프라이팬에 콩기름을 붓고 녹두전을 부쳐요. 막상 상에 올라가면 서너 개 집어 먹고 마는, 녹두전을 수백 장 부쳐요. 아버님 닮은 손님들과 어머님 닮은 손님들이 왔다 갈 때마다 한 봉지씩 담아주고 이집 저집 냉동실 한 칸 그득그득 돌덩이처럼 언 채 처박혀 있다가 다음 명절 전 주엔 새로 부친 전으로 채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뭉텅이째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녹두전을 어머님과 형님과 나 이렇게 셋이서 부칩시다.


잠깐 담배 피울 시간이면 나는 충분해요. 딱 다섯 대만 피우려고 여기 온 거예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제 막 네 대째 담배를 피우고 나온 참입니다. 그사이 또 전화를 하셨네요. 형님 번호로도 부재중 전화와 문자 한 통이 왔고요. 문자를 보낼 줄 모르는 어머님이 오죽 답답하셨으면 형님을 재촉했을까요.

지금 가는 길이에요, 형님.

할 수 없이 답장을 보냅니다. 아니면 받을 때까지 계속계속계속계속계속 전화하실 거지요, 어머님?

어차피 한 대만 더 피우고 나면 일어날 거였는데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유자 얼그레이차는 벌써 다 마셨어요.


다음 명절엔 녹두전은 그냥 전집에서 몇 장 사서 차례상에 올리기로 하고 어머님, 형님과 이 카페에 오면 어떨까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유자 얼그레이차도 같이 마시고요.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주머니 속의 담배도 슬쩍 내밀고 싶어요. 그렇지만 녹두전을 부치지 않는 명절도 담배를 피우는 여자도 어머님은 용납할 수 없을 테니 아쉽네요.


그 사이 누군가 커피를 사서 나갑니다. 아메리카노는 2500원인데 테이크아웃을 하면 500원을 깎아줘요. 원래도 싼 커피를 할인까지 해주다니 저이는 역시 돈이 많은가 봐요. 돈은 많고 전 부쳐야 할 시가는 없는 여자인가 봐요. 아니면 돈이 아주 많으니 전 따위는 부치지 않아도 참아줄 수 있는 입장일지도 모르죠. 일 년에 두 차례, 녹두전을 한 다라이 부쳐야 하는 나는 일어납니다. 우선 화장실에 들어가요. 카페 주인은 여자 화장실에 가글액을 비치해두었죠. 싸하게 퍼지는 민트향 액체를 한 모금 입안에 굴리며 언제나 그 세심함에 고마움을 느껴요. 다시 이곳에 오고 싶게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배려이지요.


탁자 옆에 기대놓았던 장바구니를 챙겨요. 두부는 조금 식었지만 여전히 따뜻해요. 말랑한 두부가 으깨지지 않게 살살 들어요. 녹두전을 다 부치고 나면 저녁상을 차릴 시간이 될 거예요. 다시 밥을 차리고 다시 밥상 위의 가시와 뼈를 추려 버리고 다시 스텐 주발은 잘 씻어 마른행주로 닦아 엎어 놓고 집으로 돌아가면 나머지 담배는 베란다에 숨어, 마저 피워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