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공감능력의 매개다.

비극의 정의를 통해 우리 시대 공감능력에 대해 논한다.

by 최성진

<비극은 우리 시대 공감능력의 매개다>

우리 시대, 비극은 사라졌다. 비극의 내용보다 일상에서의 잔학상들이 더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온난화, 전염병, 테러와 신제국주의, 환경오염, 인종차별 등 다양한 인류애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직까진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공자의 서, 맹자의 측은지심, 그리고 비극의 연관성을 논하고자 한다.


<공자의 서恕>

공자의 사상은 서(恕)로 요약된다. 恕는 같을 如 자와 마음 心 자를 합한 글자다. 용서하다의 뜻을 지닌 것으로 상대방과 나의 마음을 같게 한다는 의미의 한자다.


기소불욕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원치 않으면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중에서


서는 공감이다. 상대방의 고통과 걱정을 내가 느낀다는 것 그 공감의 지점이 서다. 이건 단순히 머리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도덕적 인간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이다. 공자 이후 인간의 공감에 주목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맹자다.

맹자의 측은지심이 그러하다.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측은지심은 맹자의 사단설에 나오는 말로 <공손추 편>에 있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측은지심은 직접적 감정이며 생각할 겨를 없이 순식간에 본능적으로 모이는 반응이다. 맹자는 이 같은 직접반응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보았다. 누구도 비극이나 차 사고를 목격했을 때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의 영향을 받고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 조건이다. 그것은 바로 충동이다.



서와 측은지심. 이는 사실상 같은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요소가 된다.


<무참 무괴無慚無愧_인류애의 희망은 부끄러움에서 나온다>

최근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무참한 일들이 뉴스를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무참(無慚, lack of shame)은 불가에서 사용하는 말로, 그것은 참(慚)의 반대인데, 쉽게 말하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스승이나 공덕이 있는 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마음작용, 또는 죄과를 범한 경우에도 그것을 관찰 · 반성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마음작용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공덕을 존중하지 않고, 공덕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이 없다(無恭敬). 또한 자신을 돌아보아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한다. 이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축생과도 같은 것이다.

어리석기에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알지 못하고 오만하여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착각하는 고집스러움으로 타인과 화합하지 못하여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됨을 의미한다.


<휴브리스로 비롯된 하마르티아>

그리스 비극에서 휴브리스(hubris)를 오만으로, 그리고 하마르티아(hamartia)를 죄, 과오, 비극적 결함, 사소한 과오 등으로 해석된다.

사소한 실수는 다름 아니라 비극적 파국의 단초가 되는 결함을 의미하는데 통상적 비극 작품에서의 경우, 성격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오만함과 과신 등에서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오만함을 말하고 싶다. 반성하지 않는 오만함. 자신의 문제에 대한 반성의식 없는 무참의 모습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아주 사소한 과오로 커다란 파국을 맡는 경우가 있다. 직접적인 체험하기엔 너무 큰 파국의 파토스여서 연극을 통해 간접경험하곤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부끄러움을 알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反省)을 자주 해야 하며, 겸손한 자세로 현명한 사람들을 공경하고, 자주 현명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敬聽) 해야 하는 등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게 하는 교훈을 준다.

비극에서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된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감정의 환기를 경험하게 되고 내게 그런 공포가 오지 않기를 그리고 그에게 처해진 불행에 대한 가엾음의 정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연민과 공포는 다음에 집중적으로 다뤄 소개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술 시학에서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 파토스(Pathos)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소개한다. 아나그노리시스는 깨달음이고, 파토스는 고통의 감정인데 이 경우 우리는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글을 마무리하며, 제 부끄러움(慚)을 닦아 무참(無慚)을 대치(對治) 해야 한다. 아무리 잔혹한 세상이 오더라도 인간의 공감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인식해야 서로 공생하는 법,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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