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접 찾아가는 방문의료를 하는 간호사이다.
의료기관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급성기가 지나간 후 되돌아온 집에서 돌봄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온 돌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성장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돌봄의 공백을 메우고 도움이 필요로 할 때 의지되는 의료, 그것은 바로 집에서의 의료현장이었다.
건강형평성을 수호하기 위해 힘든 날이 많지만 방문의료를 실천하는데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방문의료를 찾는 사람들은 정말 급하게 의뢰되는 경우가 많았다.
병원에서 퇴원하면 가야 하는 곳이 바로 집이기 때문이다. 그런 집에는 아플 때 통증을 줄여줄 주사제도 없고 수술부위를 감싸고 있는 붕대가 젖어도 교환하기 쉽지 않다. 24시간 밤낮없이 전문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환경에서 오로지 가족 밖에 의지할 수 없는 집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병원에서 소변줄이나 콧줄과 같이 의료적 장치를 가지고 왔지만 갑자기 빠져버리는 상황에는 등짝이 오싹해졌다.
여러 응급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병원으로 갈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의료 대란으로 응급실 진입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방문의료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기도 하다. 거동이 어렵고 집 밖을 나서는 것이 오히려 걱정되는 보호자의 부담은 줄이고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을 수 있어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항상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폭염도 이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곤 했다.
그럼에도, 회의감과 소진은 나를 찾아왔다.
방문의료는 항상 급하게 요청이 들어온다. 콧줄이나 소변줄이 빠졌어요, 암환자인데 통증이 너무 심해요, 욕창 소독이 필요해요, 열이 나고 컨디션이 안 좋아요, 식사를 전혀 못해요 등등 사연이 다양하다. 그렇게 한 분 두 분 방문스케줄을 자다 보면 한 달을 채우고도 부족했다. 의사와 간호사의 손길을 얼마나 기다릴까 조급함이 생기지만 모든 집을 빨리 갈 수 없어 힘이 들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나면 환자나 보호자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는 상황도 경험했다. 얼마 전 급성기 치료가 끝나고 의료 돌봄이 필요한 분이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해져 방문의료는 치료적 접근에서 질환 관리와 돌봄으로 전환이 되었다. 의료적 돌봄이 절실할 때에는 의료진에게 협조적이다가 만성기에 방문했을 때에는 시청 중이던 TV도 꺼주지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간호 처치가 끝나고 되돌아가는 길에 보호자도 환자와 함께 T.V를 보느라 멀리 나오지 않는다는 인사가 전부였다.
아뿔싸, 간호사로 대우를 받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변한 태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를 위한 곳에 눈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서로의 존중과 신뢰가 느껴지지 않았다. 건강은 요즘 어떠한지 질문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나의 목소리 보다 T.V 볼륨이 더 컸다. 혈압을 측정하려 했지만 한 쪽팔을 괴고 있어 간호 처치에 불만이라도 있는 듯했다. 이전에 협조적이던 환자와 보호자를 생각하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의료의 선택권도 환자와 보호자에게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방문의료가 만족스럽지 않거나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정중하게 그만 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전문의료진이 한 사람에게 할애하는 시간과 에너지에 대해서 상응하는 협조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중하게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으니 방문의료보다 재활을 받는 것이 어떻겠냐고 환자에게 제안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방문의료가 필요하니 계속 와달라고 말했다.
갑자기 변해버린 것은 어떤 문제였을까?라는 생각과 회의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