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의 권리 vs 소비자의 편익
예전에 한 지인의 소개로 독일인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은적이 있습니다. 대화 중 이런 얘기가 오고 갔죠.
나: 요새 한국에선 여러모로 독일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독일친구: 글쎄다. 배울게 뭐가 있나 싶다
나: 치밀하게 짜여진 시스템. 가령 노동이나 교육 체계 같은
독일친구: 시스템은 '재미 없음'의 대가다. 왜 등록금이 싸고 마이스터고가 활성화 됐을 것 같나? 청년들이 별로 야망이 없어서다. 그냥 적당히 기술 배워서 적당한 회사 다녀도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은 없게 해주니까 큰 노력 필요 없는 마이스터고를 많이 가는 거고, 그러지 말고 좀 더 공부좀 하라는 의미에서 등록금을 낮춘 거다. 그게 밖에서 보기에 합리적이고 단단해 보일 수 있겠지만, 역동적이고 활기찬 사회는 아니다. 주위를 봐라. 한국은 정말 즐길 게 많다. 한밤중에도 먹고 마실 수 있다. 사람들이 한강 공원에서 밤 11시에 치킨을 시켜먹는다. 따뜻한 음식을 시간에 상관없이 어느 곳으로든 배달해준다. 피씨방, 노래방, 찜질방 등 레저 거리도 많다. 활력이 넘쳐 보인다. 독일은 재미가 없다. 6시만 되면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는다. 식당이나 펍도 늦게까지는 안 한다. 친구를 만나도 펍 말고는 딱히 갈 데도 없고 더 놀고 싶어도 그냥 집에 가야 해서 아쉬울 때가 많다. 근무 시간에 따른 고비용을 엄격하게 규정한, 노동자에 초점을 맞춘, 네가 말하는 그 시스템의 영향이다. 독일의 노동 시스템은 노동자가 소비자로서의 편익을 포기한 대신 얻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 친구는 생산자 중심 사고의 반대급부를 강조했습니다. 반대로 이 관점을 연장해보면 한국은 소비자-생산자 간 균형점이 어느샌가 소비자쪽으로 너무 쏠린게 문제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손님이 왕'입니다.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갑'이고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이 '을'이죠. 돈을 내는 사람이 어딜 가든 당당하고, 그들의 편익이 최우선이 됩니다. 만들고 제공한 쪽보다는 사고 돈 내는 쪽의 가치와 지위가 높은 셈이죠. 보통의 '갑질 논란'이 대부분 이런 구조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서 우리의 '노동'에 대한 문제도 생깁니다. 기업은 노동자의 노동 서비스를 돈 주고 사는 주체입니다. 즉 근로자는 노동 서비스의 생산자고 기업은 그것의 소비자죠. 그런데 지금 같은 소비자 중심 사고방식의 세상에서 권력자는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근로자에게 갑으로 떵떵거릴 수 있게 됩니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독일의 경우 소비자의 편익과 지위에 한계를 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게 어떤 배경에서 나온 건지는 그곳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생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환경 때문에 자연히 소비의 일정부분을 희생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결과만 봤을 때 우리 사회가 추구할 수 있는 답 중 하나는 간단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산자의 가치와 권익을 인정하는 대신 소비자로서의 편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실제로 그럴 수 있을까요? 이 친구는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한국이 독일의 시스템을 따라하고 싶다면 사람들이 24시간 편의점과 야밤의 치맥을 포기할 정도의 마음가짐이 필요할 거다"... 쉽지 않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