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이 흰 눈발이 날리는 겨울날이다. 눈송이는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서로 뭉쳐지기도 하며 검은 외투 위로 떨어진다. 고개를 내려 겉옷을 바라보면 새의 깃털 같은 눈송이 모양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주일에 한 번 (강제로) 목욕탕 가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빼놓을 수 없는 주말 루틴이었다. 큰 구멍이 뚫린 플라스틱 바구니에 샴푸와 린스, 비누와 때수건, 바디로션, 커다란 도끼처럼 생긴 빗, 보디오일, 그 외에 얼굴이나 몸에 바를 것을 짐작되는 내용물이 플라스틱통에 담겨있었다. 동생은 자기의 최애 마루인형을 들고 가겠다고 떼쓰고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데려가라고 했던 것 같다. 목욕바구니를 한가득 채워가던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아무런 짐이 없이 점퍼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이 산뜻해 보여 나는 왜 아빠는 짐이 없냐고 물었다. 아빠는 탕에 가면 비누가 있는데 비누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몸도 닦는다고 대답했고 나는 여자탕과 남자탕의 비누는 다른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시간은 그저 뜨겁기만 했는데 엄마는 시원하다고 말하고, 나는 시원하다는 단어에 혼란을 느꼈으며 동생은 마루인형의 머리에 비누칠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엄마가 한 놈씩 붙잡아서 때를 밀겠다고 때수건을 들이댈 때마다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때 같은 건 밀지 않겠다고. 그리고 목욕탕에 갈 땐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는 어른이 되겠다고.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몇 년에 한 번씩은 가끔 공중목욕탕을 가서 세신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때를 미는 행위는 내 인생에 그리 많이 일어나지 않는 이벤트였는데 지난번에는 내 안의 무엇인가가 나한테 세신을 받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나는 벌떡 일어나 동네 목욕탕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조그마한 탕이 두 개 있고 사우나가 두 개 있었다. 세신을 하시는 분이 두 분 계셨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저, 세신 하려고요."라고 말을 걸었고 세신사님 한분이 눈짓으로 탕을 가리키며 "부를 때까지 몸을 충분히 불리세요."라고 말하셨다. 시키는 대로 샤워를 마치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뜨겁다. 고개를 젖히니 천장에 물방울이 고여있고 환풍기와 모서리에는 곰팡이인지 검은 때인지 모를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시선을 돌려 타일을 바라봤다. 타일에는 태백산인지 지리산인지 모를 산에 눈꽃이 피어있는 사진이 타일에 프린트되어 있었다. 타일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쉬니 눈가루 섞인 산바람이 폐부에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금세 지루해져서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괜히 건식사우나에 들어가서 나무로 된 벤치에 앉아서 모래시계를 만지작 거리기도 하고(더워서 1분 만에 나왔다), 습식사우나에 들어가기도 했다. 뜨거운 수증기가 잘게 쪼개져 온몸의 땀구멍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습식에서는 1분도 못 버티고 얼굴이 벌게져서 뛰쳐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찬물이 그득 담겨있는 냉탕으로 갔지만 또 차가운 물에 몸을 갑자기 담글 용기는 없어서 바가지에 물을 퍼서 말에 조심스럽게 붓고 한 바가지를 더 퍼서 얼굴을 식혔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종아리까지만 냉탕에 담그고 멍 때리고 있다가 세신사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몸을 더 불리셔야 해, 얼른 온탕으로 들어가세요." "네" 나는 군말 없이 다시 온탕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눈꽃이 피어있는 타일 사진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를 불러주려나 하던 차에 세신사선생님의 호명 "이리 오세요." 나는 어색하게 걸어가 미끈미끈한 때밀이용 베드에 누웠다.
뜨거운 물을 착 끼얹고 익숙하게 온몸에 비누칠을 시작하고는 몸의 구석구석을 때밀이 수건으로 쓱쓱 문댔다. 몸을 맡기고 이 생각 저 생각 쓸데없는 상념에 잠기고 있자면 옆으로 누우라 다리를 이렇게 하라 다양한 주문을 한다. 포즈를 바꿀 때마다 미끄덩거리는 때밀이용 침대에서 균형을 잡느라 애써야 했고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흐물거리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뭐가 웃기는지 깔깔 웃어대며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아프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 그 중간에서 어린 시절 주말 아침 목욕을 마치고 노곤한 몸으로 나와 뒤꽁무니를 깨물어 쪽쪽 빨아먹던 요구르트의 맛이 생각났다. 얼추 때밀이 과정이 끝났는지 이제 머리를 감겨주신다. 머리정도는 스스로 감아도 되지만 전문가에게 맡긴 김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 샴푸를 손에 짜서 머리카락과 두피에 문지른 후 어디선가 엄청난 강도를 가진 샴푸 브러시를 꺼내어 두피를 박박 5번 정도 종횡하며 마사지했다. 굉장히 아팠다.
이윽고 '얼굴 씻어드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나는 약 15초 동안 고민했다. '지금까지의 강도로 봤을 때 얼굴을 씻어준다면 꽤 아플 것 같다. 하지만 때도 밀림 당하고 샴푸도 당한 마당에 내 손으로 거품을 내 얼굴을 씻기란 좀 귀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계산을 마치고 15초의 딜레이 끝에 "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또 깔깔깔 웃은 다음 뭘 그렇게 고민하셔,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하면서 얼굴에 꽃향이 나는 세안제를 바른다. 투박한 손으로 내 얼굴을 문지르고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눈 밑이 조금 자극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금세 세안과정은 끝났고 선생님은 마무리로 온몸에 마지막 비누칠, 뜨거운 물 끼얹기, 손바닥을 오목하게 해서 온몸 두드리기로 세신을 마무리해 주셨다. 얼굴이 좀 벌게진 채로 탕 밖으로 나가 옷을 갈아입고 선생님께 돈을 이체했다. 30,000원. 젖은 환경에서 속옷만 입고 다른 사람의 온몸을 벅벅 문질러 받은 액수. 나는 젖은 머리카락에 후드티의 모자를 덮어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자는 동안 뭔가에 눌리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아주아주 슬픈 꿈을 꿔서 눈물을 흘린 것 같기도 했다. 눈가가 아주 무겁고 뜨거웠다. 몇 겹의 때 레이어를 벗겨서인지 굉장히 몸이 피곤하고 나른했다. 눈을 반쯤 뜨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싸고 거울을 보는데 스스로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엄청나게 퉁퉁 부은 눈과 볼이 내가 봐도 심각해 보였다. 나는 바로 피부과에 전화를 걸고 병원이 여는 즉시 달려가서 염증주사와 약을 탔다. 내 얼굴사진을 본 친구들은 목욕탕에 전화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웃음 많던 손에 때수건을 들고 있던 세신사님이 떠올랐고 아무래도 목욕탕 환경이 피부과처럼 깨끗하지는 않겠지라고 얼버무렸다. 그 후로 약 2주 동안 얼굴은 팥죽색에서 회색지우개색으로 바뀌며 서서히 부기가 빠졌다. 얻은 교훈이 있다면 할까 말까, 이건 아니다 싶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나는 이제 다시는 세신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냉장고를 열고 요구르트 대신 무알콜 맥주를 꺼내 꼴꼴꼴 마셨다. 오늘따라 엄마의 때수건과 바가지를 띄워서 냉탕에서 동생과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당연히 뒤꽁무니를 깨물어 먹던 요구르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