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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May 07. 2024

세계를 열고 닫는 '니터'의 손끝에서

글쓰기의 정체


  볕은 따스한데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채 물러가지 않은 초봄의 수요일 오후, 청계산역 쪽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어떤 카페에 들르게 되었다. 입구에서부터 다양한 실과 뜨개질로 뜬 가방과 니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시키고 천천히 둘러봤다.


 다양한 기법으로 뜬 물건들은 포근하고 따뜻해 보였다. 사람들은 혼자 또는 여러 명이서 뜨개질감을 손에 쥐고 조용히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아주 초보적인 뜨개질이던 복잡하고 정교한 뜨개질이던 뜨개바늘과 실을 잡고 있는 지금은 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뜨개질할 손재주와 머리가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하며 그 모습을 잠깐 부럽게 바라봤다.


 몰입하고 있는 '뜨개질하는 자'를 바라보며 1) 카페라는 외부의 공간을 작업하는 장소로 고르는 이유는 뭘까에서부터, 2) 인간으로서 삶의 만족감은 어디서 오는지 3)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4) 나는 왜 글쓰기를 시작하려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카페에서 쓸데없는 생각 하기가 새로운 취미활동 중 하나이다).


 일단 카페에 가면 일상과는 분리됨과 동시에 연장되는 장소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대개 자신의 일에 몰입해 있지만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너울거리며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 시절로 흘러갔다. 나는 얼기설기 모래성을 쌓고 칭찬을 바라며 엄마와 아빠를 불러댄다. 내가 만든 세계를 봐주는 시선과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도에 곧 휩쓸려 사라질 모래성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시선이 있어야 비로소 세계는 완성된다.  


 '다른 사람의 이해와 인정' 이것이 인간이 평생을 걸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인간의 존엄과 삶의 목적 말이다.

칩거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먼저 자신을 발견하고 알아봐 주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보기 전에 모래성을 쌓고 발로 부숴버리는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만들어낸 것 중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테니까. 사람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길 원하는 게 맞다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나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글쓰기는 숙제검사를 받기 위해 써야 하는 일기 외에는 별로 해본 적이 없고 일기 쓰기는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독자가 엄마랑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착한 아이인척 꾸며서 오늘의 글감에 적당한 교훈을 쓰면 그만이었다. 커가면서 가끔 나도 모르는 감정이 요동치며 올라올 때는 이 감정이 뭘까 알아보기 위해 낙서를 해보기도 하고 글로 표현해보기도 했는데 몇 자 적다가 이 부끄러운 내면의 찌꺼기를 누구라도 볼까 봐 찢어버렸다.


 초등학교 이후로는 아무도 일기검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쓰기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기억력도 안 좋고 SNS도 열심히 안 했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이 거의 휘발된 느낌이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고 어디서 뭘 했는지 꼬리표를 붙여둬야 하는데 못했다. 지나간 시간들이 텅 빈 우주같이 느껴지던 23년에서 24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이 안개가 낀듯한 머릿속에서 유영하는 걸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사라지는 시간들을 조금씩 붙잡아놔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한 줄이라도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로 했고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일단 글쓰기는 돈이 안 들고, 소비만 하는 인생이 좀 지겨워졌기 때문이다(뭔가를 생산한다는 건 그게 똥이든 방귀이든 기분이 좋다).


  퇴고를 하고 글 하나를 닫았을 때의 뿌듯함이 있다. 잘 넘어가는 소설책 한 권을 재미나게 읽다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세계가 닫히는 기분과 비슷하다. 친구에게 내가 쓴 엉성한 글을 억지로 읽게 한 뒤 반응을 본다. 만든 음식을 내놓고 기둥뒤에 숨어서 손님의 반응을 살펴보는 초보요리사 같다.


 친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읽어나가다가 어느 문장에서 살짝 입꼬리를 올리거나 어딘가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하는 낌새를 보일 때가 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어때? 이 가니쉬에 신경을 썼는데 말이야, 아침에 직접 숲으로 나가 채취한 자연산 새송이와 들깨로 만들었거든, 나는 팔뚝에 행주를 정갈하게 올려놓고 시중을 드는 웨이터처럼 설명을 한다.


 내가 만든 세계를 조금이라도 맛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 난 어린아이처럼 '이것 봐, 내가 그린 그림을 봐바, 내가 만든 노래를 들어봐. 온전히 조막만 한 열손가락으로 만들어 낸 세계야.'라고 소심하게 중얼거린다.

어린아이는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어른의 친절에 기대어 살지만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는 왕이자 신이다. 나에게 글쓰기란 시간을 기록하고, 세계를 창조하고 싶은 어린아이의 욕구를 충족하는 도구인 듯하다.


 봄에 야트막한 산에 오르면 두릅, 돌나물, 쑥 등 먹을 것이 천지이지만 관심을 가져야 보이는 것처럼 흥미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항상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 같다. 그 이야깃거리에 어느 정도 뻔뻔함과 무심함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내면 좋겠다. 아직은 조막만 한 손에 코바늘을 어설프게 쥔 '초보 글쓰기하는 자'이지만 들판과 공기 중에 있는 글감을 잡아채 나름의 무늬를 그리며 씨실과 날실로 엮고 싶은 수요일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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