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
한 직장에서 2년 4개월의 근무를 끝내고 2022년 10월 31일부로 공식 [백수(27세)]가 되었다.
불안장애, 우울증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던 회사 생활을 뒤로 하고 11월 한 달은 제주도에서,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는 유럽에서 보냈다. 물론 귀국 후 이직 계획은 세우지 않은 채로. 나에게 방학을 주고 싶었다. 이제 퇴사했는데 다음 스텝을 위해 또다시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갖고 방학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총 3개월의 긴 여행으로 거하게 쓴 돈이야 다시 벌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직 젊고 사지 멀쩡하니까! 귀국 후에는 서울로 독립을 해서 재취직을 하겠다는 큰 틀만 잡아둔 채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린 지 5개월하고도 10일이 지난 지금, 재취직은 커녕 서울도 못 갔다. 아직 [백수(28세)]다!
귀국 후 2월부터 서울행을 위해 집을 보러 다니고 전세 대출을 알아보러 발에 땀이 나게 다녔건만, 사정이 생겨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서울행이 9월로 지연되었다. 솔직히 이 때문에 남탓과 신세한탄을 하며 자기연민으로 2주 정도를 보냈다. 다시 제정신을 차리려면 이런 찌질한 시간도 필요한 거다. 조급할 것 없다. 정신을 차리고 내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때까지는 직장을 다니며 저축해둔 돈으로 어찌어찌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반 년이 넘는 이 붕 뜬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였다. 단기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이나 아르바이트를 하자니 솔직히 일하기 싫었다. 단순히 노동을 하기 싫은 건 아니고, 그 속에 숨은 본심은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기 싫었다.
전 직장에 다니는 2년 4개월, 주 5일, 하루 9시간을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점차 무기력해졌다. '평생 이런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남들도 이렇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은퇴만 바라보고 살까?' 끊임없이 의문을 품은 채 지냈다. 막상 퇴사를 하자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 지 몰라 늘 망설였고, 시간이 지나면 하고 있는 일에 애정도 생기고 나의 적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만을 붙잡고 출근했다. 그렇게 우울감만 깊어져 가던 날들이었다.
지난 회사 생활을 떠올리니 이처럼 꼼짝없이 한가로운 백수 생활을 보내게 된 시간 동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보람을 느끼고 즐거운지, 어떤 일을 할 때 죽기보다 하기 싫고 괴로운지를 알아야 했다. 어쩌면 나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꼭 필요하기에 이 시간을 선물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나는 시간에 대한 통제가 되지 않을 때 힘들어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제 당하는 걸 싫어하니 당연한 소리이지 않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내가 선택한 직장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최소한 45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괴로웠다. 바꿔 말하면 내가 내 시간을 통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회사 생활 중 가장 활력이 솟은 시간조차 시간대별로 하루 업무 계획을 짜는 시간이었다. 퇴근 전 다음날 혹은 한 주의 업무를 시간별로 배치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가장 즐거웠다.
내 시간을 통제하고 계획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은 어린 시절부터 느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방학 숙제가 ‘방학 시간표 짜기’였다. 방학식을 한 당일 집에 가면 유인물을 꺼내 방학 시간표 짜는 종이만 따로 뺀 후 설레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동그란 원 안에 시간대 별로 선을 그어가며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할 지 계획하고 꾸미는 게 방학 중 가장 큰 기쁨이었다(그대로 지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주변 친구들이 다이어리를 쓸 때 나는 늘 플래너를 썼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이 아닌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기록이 더 중요했다.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바뀐 일정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보통의 회사원이 되면 평일에 출근해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요즘은 재택근무나 탄력 근무제를 도입한 회사들도 있고, 외부 현장에서 하는 일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비슷한 형태로 일한다. 여기서부터 크나큰 문제를 맞닥뜨렸다. 나는 내 시간을 통제하고 싶었다. 원할 때 일하고 원할 때 집중하며 원할 때 쉬고 싶었다. 이 말이 곧 일하지 않고 쉬기만 하겠다는 건 아니다.
결국 직장인의 삶을 택하지 않을 거라면 다른 삶의 형태를 택해야 했다. 개인 사업을 하거나 프리워커로 일하거나. 이 선택으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종이에 써보았다. 얻은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시간이었다. 출퇴근 시간, 쉬는 시간, 쉬는 날을 스스로 정하고, 언제 어떻게 일할지도 누군가 정해둔 규율에 따르지 않고 내가 만들 수 있다. 잃은 것은 안정적인 보수, 나를 불안하게 보는 사회적 시선 그리고 수입이 발생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모르는 불안정한 미래 등이었다. 벌써부터 가족, 주변 친척, 친구들의 걱정어린 말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통제 가능한 나의 시간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나의 시간을 내가 고용해서 써보기로 했다. 지금 직장인이 되면 직장인으로 사는 것이다. 지금 직장에 가지 않으면 프리워커로 사는 것이다. 선택은 단순하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