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고 용감하게 일한 나의 주니어 시절에게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첫 직장은 특별했다.
시각 디자인과를 다니며 일러스트와 편집 디자인이 좋아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출판사 단 한 곳에 덜렁 서류를 넣고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했다.
(훗날 다른 친구들의 취업 준비 과정을 들어보니 나는 뛰어들기는커녕 발만 담갔다고 해도 민망한 수준의 취업 준비였다.)
최종 실기 시험에서 떨어지고 다음 계획 없이 멍 때리고 있을 때 일러스트 알바로 인연을 맺었던 선배님의 디자인 에이전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우스갯소리로 “거기 떨어지면 우리 회사로 와”라고 했던 선배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무모했고, 용감했고, 누구보다도 빡세게 보낸 나의 첫 직장 주니어 시절에 대해 회고해보려 한다.
나의 첫 회사는 디자인 컨설팅 에이전시였고, 첫 직무는 UI 디자인이었다.
일러스트 알바로 참여했던 어린이 색칠공부 애플리케이션의 UI 디자인이 나의 첫 프로젝트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UI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학부 생활 중 웹 디자인이라는 수업으로 한 학기 커리큘럼을 들어본 게 전부였다.
아이폰의 등장 이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던 시기였다.
UX/UI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나는 그동안 사용했던 애플리케이션들을 벤치마킹하고, 선배들의 피드백을 받아가며 한 땀 한 땀 UI 디자인을 배워갔다.
그렇게 UI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쌓아가는가 하던 와중에 회사는 좀 더 본격적인 UX 컨설팅 회사로 거듭나기 위한 프로젝트들을 수주해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UX/UI 기획에 대한 역할이 필요해졌고,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디자이너보다는 기획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요즘은 디자이너와 기획자의 역할 범위와 명칭이 회사의 문화에 따라 다양해진 것 같다.
디자인과 기획의 업무 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은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뤄지고 있으니,
여기서는 디자이너에서 기획자로 업무 롤을 바꾸게 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UI 디자인이라 함은 GUI 디자인을 포함하고 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시각적인 부분(심미성, 가시성, 명확성 등 시각적 요소)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나는 UI 디자이너로서 심미성에 자신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이 GUI 스타일로 많이 사용되던 때라 평면적인 그래픽 작업을 많이 했던 나에게 겹겹이 레이어를 쌓아 올려 만드는 아이콘이나 UI 요소들은 너무나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UX 디자인은 재미있었다.
사용자의 이용 패턴을 분석해 서비스 Flow를 그리고, 최적의 사용성에 맞추어 화면에 버튼 따위를 배열하는 일이 즐거웠다. 내가 좋아한 편집 디자인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었고, 유저의 인터렉션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작업이란 점이 좀 더 매력적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기획 업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서비스 전체의 흐름을 고려한 유저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서비스 정책을 정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기준이 되는 서비스 방향을 잡고, 서비스 콘셉트 도출을 위한 분석 능력이 요구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설프게나마 사업의 영역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며 기획 업무를 진행했던 것 같다.
프로젝트를 하나 둘 진행할수록 나의 역할은 디자이너에서 기획자로 옮겨 가고 있었다.
서비스 기획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사수도 없는 상태에서, 관련 서적들을 읽어가며 인터넷에서 기획 템플릿 문서들을 살펴보며 서비스 기획, UX에 대해 배워갔다.
3년 차가 되는 시점에 마지막 프로젝트에서는 어설프게나마 PM의 역할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기획, 디자인, 개발을 진행하며 서비스를 만들지만 결국 그 큰 여정 안에서 배를 몰고 갈, 지휘해 줄 사람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역할이 이곳(에이전시)에서는 늘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멈춰버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체 서비스를 만들어 보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그래픽을 활용한 어린이용 애플리케이션이나 교육 관련 서비스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첫 직장을 4년 꽉 채우고, 교육 서비스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매일 같이 야근을 하던 첫 직장에서 쏟아지는 프로젝트들과는 별개로 또래 동료들과 재미있는 작당을 많이 했었다. 거의 매일 같이 새벽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보내며 그만큼 가까워지고 전우애가 생긴 동료들과 주말에도 만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요일 아침 디즈니 만화 동산을 보러 일어났던 유년기만큼이나 대단한 열정이다.)
회사를 통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나의 커리어 성장에 큰 역할을 했지만 동아리 활동, 전시 등으로 다양한 작업을 해오며 크리에이티브를 뽐내던 디자인과 대학생들이 졸업하자마자 너무 실무에만 치여 사는 것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생산적이지 않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회사 업무가 아닌 우리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함께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마음 맞는 동료들을 만났다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함께 책을 읽고 내용을 공유하는 독서 클럽에서부터 회사 내에서 재미있게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하나둘씩 진행해갔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이 활동에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고 싶어졌다. 우리의 활동을 '창조적 딴짓'이라 명명하고 주니어 그룹의 명칭을 지었다. 회사 이름 뒤에 BEE(벌)을 붙인 네이밍으로 로고도 만들었다.
꿀벌은 생태계에서 생물의 다양성 보존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생태계가 무너진다는 말이 있듯 사내 주니어 그룹의 활동이 조직 문화에 다양성을 부여하고 조직에 활력을 가져다주길 바랬다. 회사의 대표님도 우리의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다.
회사의 혼(소울)이 대표라면, 조직의 리더들은 뼈, 시니어 그룹은 근육, 주니어 그룹은 살이라고 생각한다.
뼈와 근육은 몸을 움직이는데 꼭 필요하지만 그 조직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살의 역할을 하는 주니어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뼈와 근육이 부실한 상태에서 살만 찌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조직을 풍성하게 만드는 활동을 했고, 이 경험은 주니어 때만 할 수 있는 반짝이는 경험으로 나의 커리어에 남아있다.
돌이켜보면 주니어 시절을 보냈던 첫 직장에서 얻은 것들은 다른 곳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들이었다.
단순히 업무 스킬이 아닌 일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 대해 배웠고, 좋은 동료들과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즐거운 경험도 했다.
(물론, 매일 같은 야근에 번아웃이 오며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땐 그랬지 하는 무용담으로 남았다.)
그때의 습관 때문인지 지금도 어떤 일을 진행하기 전에 그 일의 시작, 근본, 밑바닥을 훑고 이해해야 일을 시작할 수가 있다. 그래야 큰 방향을 세우고 그다음부터 세부적인 내용들을 정리해 나갈 수 있다.
첫 직장에서 배운 간단한 프레임웍을 하나 소개한다.
NOW-WOW-HOW로 구성된 3단계 프레임 워크이다. (내부에서는 '3W'라고 불렀다)
- NOW : 현재 시장, 사용자, 경쟁사에 대한 조사와 분석
- WOW : 리서치 결과를 바탕으로 콘셉트 도출, 솔루션 도출
- HOW : 구체적인 설계, 액션 플랜 짜기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프로젝트를 이해하고 솔루션을 찾아 진행해 나간다.
1을 원하는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 2와 3을 제안하고, 클라이언트의 디렉션이 아닌 진짜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것은 대상이 클라이언트에서 조직 내부로, 외부의 사용자로 바뀌어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장의 화면 UI보다는 서비스의 방향성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UI보다 UX전략을, 그전에 시장과 고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에 접근하는 태도와 습관을 주니어 시절에 몸에 체득해 놓을 수 있었다.
주니어 시절 사이드 프로젝트 역시 또 다른 원동력이 되었다.
창조적 딴짓을 통한 동력, 주니어 멤버들이 조직의 살이 되어 조직을 풍요롭게 만드는 활동 역시 실무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었다.
조심스럽게 주니어 분들에게 조언을 하나 하자면 당장의 스킬적인 부분보다는 일을 대하는 태도와 방향을 습관화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업무 안에만 갇혀있지 말고 주니어 때에 가질 수 있는 반짝반짝한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할 수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보길 바란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크리에이티브를 채우고 일을 위한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의 긴 커리어의 여정에서 무모하게 용감하게 일해볼 수 있는 기간은 그리 많지 않다.
주니어 시절은 그러한 것들을 마음껏 시도해보고 경험해볼 수 있는 시기이다.
나의 주니어 시절은 정말 무모하게 용감하게게 보냈다고 자신한다.
이제야 주니어 시절의 나에게 고생했고, 잘 해내 주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