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이 알려주는 나를 찾는법
흰쌀밥을 지었다. 고슬고슬 윤기 나는 밥을 똑같은 양으로 유리병 3개에 담았다. 이후, 행동건강 석사 과정에 있는 40여 명이 각각 다른 내용을 담은 포스트잇으로 세 개의 박스를 가득 채웠다.
첫 번째 박스는 행복한 생각을 담은 예쁜 말들로 도배되었고, 두 번째 박스는 밉고 싫은 감정으로 적은 욕과 부정적인 말들로 채워졌다. 세 번째 박스는 컨트롤 그룹으로, 아무 포스트잇도 없는 상태였다. 모든 조건—시간, 상황, 준비물, 쌀, 포스트잇의 팬 잉크 색까지—이 통일되었으며, 세 개의 박스는 어두운 공간에 밀폐되었다.
한 학기, 즉 약 4개월 후, 다시 확인한 밥들은 당연히 모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예쁜 말들로 도배된 박스의 밥은 하얗고 예쁘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으며, 꼭 눈꽃송이 같은 모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유리병을 열어 냄새를 맡으면 사케 같은 발효주 냄새가 났다.
반면, 나쁜 말로 뒤덮인 박스 안의 밥은 초록색과 회색으로 곰팡이가 덮여 있었고, 냄새를 맡아본 용기 있는 학생은 유리병을 열고 헛구역질을 했다고 한다.
여기까진 모두 예상했을것이다 - 초등학교에서 해본 예쁜말과 못된말로 양파 키우기 실험 같이.
그러나 의외였던 점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컨트롤 박스의 밥이었다.
애정도, 미움도 없는 - 아무 에너지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외면당한 밥. 그 밥은 완전히 까맣게 썩어 있었다. 곰팡이가 아닌 부패의 상태였고, 유리병을 열었을 때 고약한 냄새는 복도 끝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심한 악취를 풍겼다.
이 실험은 10년 전부터 현재 제 교수님이 행동건강 석사 과정의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것으로, 에너지, 즉 기(氣)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번 재미로 실험해온 것입니다. 너무 추상적이라 논문으로 정리하지는 않으셨지만, 여러 해에 걸쳐 반복한 결과, 동일한 현상이 수차례 재현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서너 번 같은 결과를 본 후, 교수님은 같은 조건에 네 번째 박스를 추가하셨습니다. 그 박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예쁜 말을 쓴 포스트잇으로 채워졌습니다. 상반되는 검은 마음과 하얀 글. 쓰디 쓴 마음과 대비되는 꾹꾹 써내린 달디 단 말들. 아무것도 없는 박스보다 더 심하게 썩은 새로운 1등을 기록한 것은 바로 이 네 번째 박스의 밥이었습니다.
대상이 없으면 사랑 역시 할 수 없어요. 모두가 입을 모아 강조하는 자기사랑은, 자신을 뒷전으로 두고 남을 먼저 챙겨온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려습니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나"의 흐릿한 형체를 사랑하기란 너무나 모호해요.
나 자신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고,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어색하게만 느껴질 때, 지금의 나와는 안면이 없듯 서먹하다면, 3번째 컨트롤 밥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우리를 아무것도 없는곳에 방치한것. 애정도 미움도 없는 무의 공간. 그 허공에 나를 버려둔 상태.
길게보면 무관심이 서로 치고박고 싸운것보다 더 아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싸운다는것, 부딪힌다는것은 어떻게든 서로를 인지하고 있단거니까. 잠수이별은 흔히 최악의 이별이라고 하잖아요. 부모님의 무관심이 잔소리보다 더 아픈이유는, 친구가 날 투명인간 취급하는게 서로 말다툼하는것보다 더 무서운 이유는, 그 어떤 에너지도 없는 허공에 두둥실 떠다니며 드넓은 우주에서 미아가 된것과 다름없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게하기 때문일거에요. 오죽하면 쌀밥도 그 무관심을 아파하는데, 나 자신에게조차 아무 관심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혹은 "긍정적인" 특성만을 나 자신에게 강요하며, 숨기고싶고 수치스럽다고 믿는 나는 아예 덮어버린 상태 - 나의 약한면은 직면하기 무서워서 더욱 더 자존심을 앞세우는 상태는, 4번째 밥이지요.
그래서,
내가 날 알아가는 첫 단계는 내가 너무 싫어하는 나를 마음껏 싫어하기같아요. 속으로 난 쓸모없어, 난 왜이럴까, 이런 자기비하적 말로만 끝나는게 아니라, 내가 차마 인지하기도 두려워서 꼭꼭 무시해둔 내가 너무 싫은 나.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것.
넌 촌스럽게 생겼고 하는짓도 뭔가 어색해. 함께 다니기 창피해. 혼자서 강해지지 못하는 나약하기만 한 것. 너 진짜 싫어. 그냥 난 내가 너인게 혐오스러워. 멍청하고 느리고 쭈구리같이 눈치만 엄청보고 네가 할 줄 아는게 뭐가 있는데? 난 그냥 네가 너무너무 싫어. 너의 낮은 코도 싫고, 네 목소리도 듣기 싫고, 혼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내가 싫고, 어제 야식을 먹은 의지조차 없는 네가 너무 싫어. 넌 그냥 계속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사람같아. 너의 어린시절도 싫고, 거기서 성격 이상해진 네가 싫고, 언제나 불안해하는 네가, 집착하는 네가, 게으른 네가 다 너무 싫어.
혹시 아세요?
내가 억눌러온, 내가 무의식에 숨겨논 최악의 말들을 나에게 쏟아붓다보면 문뜩 알게될수도 - 그 말들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지. 얼마나 못됬고 사실이 아닌지. 이세상 그 어떤 누가 정말 그렇게 별로일 수 있을지, 지금 내가 표현한 말들이 덩어리로 뭉쳐 사람이 된다면 그 덩어리가 정말 나일지.
드디어 아니란게 보일수도 있어요.
내가 날 도대체 무슨 모습으로 바라보는건지 제대로 직시하지못하면 우리는 계속 너무 외로울거에요. 직업, 애인, 상상, 친구, 가족, 그게 무엇이됫던, 날 채우는 무엇인가가 아무리 많이 계속 나타나도, 이유도 모른채 계속 불안할수도 있어요.
내가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도, 내가 살아온 삶에서 자기사랑을 찾는 과정도, 내가 어떤 감정들을 느꼈는지 인정하는것도, 내 안의 내면아이를 보듬어주는것도, 현재의 내가 날 무시하고 있으면 뭔가 퍼즐은 계속 찾는데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 미완성의 찝찝함과 답답함사이에서 난 나를 사랑하는것에 더욱 더 지쳐갔어요.
전 제 생에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 제일 이해받고 나 자신으로 보였다는 느낌을 내가 날 싫어하는 이유들을 정말 악쓰듯 말로 다 풀어낸 후 였거든요. 저주같은 못된 말을 하면 할수록 터져나오는 울음과, 얼마나 이 말들이 사실이 아닌지 안정되던 내 마음과 서서히 스며들던 평온함. 그걸 디딤돌로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이것들을 사실이라고 가정해놓고, 그런 나와 마주하지 않으려 외면에 익숙해져 있었을 때, 비로소 용기내어 마주한 최악의 나는 내가 아니였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자신과 가까워지지 않는거 같을땐, 그냥 대놓고 미워하세요. 대상을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하듯, 나를 존재하게 해줘야지만 나를 향한 시선을 사랑으로 서서히 물들여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에서 도망치는게 나를 더 썩히는 일, 훨씬 더 고되고 힘든 일이란건 생각보다 빠르게 나에게 체감되거든요.
대상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려면 나를 알아야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퍼스널 컬러 진단, 운동, 취미 찾기, 책 읽기, 저널링, 감사일기—모두 시도해도, 나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어릴 적부터 타인의 기대 속에 갇혀, 진짜 나는 형체가 없고, 내가 바라는 모습에 단정짓고 스스로를 가두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변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궁금해하고, 내 조각들을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되요. 우리는 언제나 변하고 있거든요.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내뱉은 말들,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그것들이 정의한 나 - 그 모든걸 계속 짊어지고 살지 마세요. 그것들을 직면하고, 인정해주고, 애도해준 후, 내가 누군지 직접 정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