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사람'과 대화하는 법 좀 누가 알려줘.
‘무식’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일단 조심스럽다.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니까. 분명 누군가에게는 내가 더 ‘무식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무식’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며칠 전 친구와 통화를 하며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답답함을 <움큼한 사생활>에서나마 비겁하게 풀어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아서. 오늘은 <움큼한 사생활>을 발행하는 ‘큼요일’이기도 하고. 물론 지난주에 아직 쓰다 만 글도 남았지만. 앞으로는 늦지 않게 꼬박꼬박 돌아올게요!
사전적인 의미를 먼저 찾아보았다. 두 가지 뜻이 있었다. 첫 번째는, 배우지 않은 데다 보고 듣지 못하여 아는 것이 없다. 두 번째는, 행동 따위가 격에 맞거나 세련되지 않고 우악스럽다. 첫 번째 의미의 ‘무식’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배움에 대한 의지만 있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 당당하더라고 자신의 무식에 대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겠다. 이경규 말에 따르면,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서워진다”고 하니까. 이를테면, <신서유기> 속의 은지원 같은. 어떻게 이기려 들겠는가.
그러나 단순히 무식에 당당한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들의 뻔뻔함은 스스로의 무식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겠지. 어쩌면 ‘맞춤법’도 이 영역에 해당하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맞춤법 틀리는 사람’을 싫어했다. 얼굴이 ‘차은우급’이라고 할지라도 ‘되’와 ‘돼’의 차이를, ‘안과 ‘않’의 차이를 모르면 ‘정뚝떨’이라고 말하던 사람도 있었다. 나조차도 (글을 쓰다 보니) 맞춤법에 예민한 편이긴 하다. 특히 책을 읽을 때 ‘오탈자’를 발견하면, 작가와 편집자의 성의가 부족했다는 인상을 받게 되더라고.
사실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당신이 ‘이 사람이다’ 싶은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나라면 ‘공유’를 떠올릴 것 같은데, 당신의 이상형은 누구라도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하루 종일 꿈에서만 그리던 행복한 데이트를 즐겼다고 상상해보자. 오늘따라 화장도, 머리도 완벽하고, 그 사람은 늦지 않게 나를 데리러 왔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러는 동안 대화는 끊길 줄을 모르고, 게다가 영화관에서는 유치하지만 팝콘을 먹다 손도 한 번 부딪혔던 거지. 후우,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모르고 광대는 승천하는구나. 어쨌거나 데이트는 끝이 났고 아쉬운 마음에 집에 돌아와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리는데, 이런 문자가 왔다.
“주말에 바람세로 가실래요?”
어떡하면 좋을까. ‘바람세로’가 아니라 ‘바람 쐬러’가 맞는 표현이라고 일러주어야 할까. 어쩌면 한 번쯤은 눈을 질끈 감고 모르는 척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완벽한 데이트였고, 그 사람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운명의 짝꿍이었으니까. (물론 상상 속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다음과 또 그다음까지 참고 견딜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 남자를 앉혀놓고 맞춤법 강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니, 맞춤법 강의를 한다손 치더라도 쉽게 고쳐질 문제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현실에서 맞춤법으로 고민할 만큼의 ‘운명’을 맞닥뜨리지는 못한 것이겠지. 이건 좀 씁쓸한 건가.
이제 조심스럽게 내 친구를 꺼내볼까. 중학교 시절의 친구이다. 그러니 벌써 15년 지기쯤 되었다. 사실 중학교 시절에는 우리의 우정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이어질 줄 상상치 못했다. 그 친구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였고, 나는 ‘모범생’이었거든. 고등학교도 그 친구는 ‘실업계’로, 나는 ‘인문계’로 찢어졌다. 그리고 이게 참 우스운 일일 수도 있는데, 그 시절의 나는 그 친구를 ‘동경’했다. 나도 모범생 대신 ‘잘 나가는 양아치’라는 프레임을 쓰고 싶었거든. 철없는 생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사고뭉치’로 살고 싶다.
그러나 나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교복을 벗어던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나는 친구들에게 ‘사고뭉치’로 통하거든. 어떤 종류의 ‘사고’인지는, 흠흠, 여기서는 일단 생략이다. 어쨌거나 그로 인해 인생은 ‘역전’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가 나를 ‘동경’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동경은 나의 것과 함께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녀에게 나는 ‘똑똑하고 똑부러지는’ 자랑거리였거든. 게다가 ‘여전히 꿈을 꾸는’ 유일무이한 세상이라고도 했다.
사실 그래서, 그녀와 같은 이유로, 나는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언제나 ‘발전하는 사람’이고 싶거든. 물론 매 순간이 배움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대화가 매번 의미 없이 휘발되는 걸 참을 수가 없더라고. 그러니 네가 ‘섭섭하다’고 말하는 건, 미안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 리스트에 너의 이름은 몇 년째 누락되는 중이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너를 찾은 이유는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붙잡지 않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버리는 ‘풍선’ 같은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나뭇가지에 걸린 채로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남아있는 건 ‘너’뿐이었거든.
그러니 ‘무식’이라는 단어로 너를 포장하는 게 썩 달갑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진짜 목적은 묻고 싶은 것이다. 무식한 사람과 대화하는 법에 대해서. 물론 인생이라는 계단을 함께 오르는 동안 무식하게 너를 업고 가는 방법도 있겠다. 운명의 짝꿍이 맞춤법 하나 틀렸을 때처럼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너의 무게를 더한 채로 나는 얼마나 더 오를 수 있을까. 한 때 너의 손을 놓쳤던 그날처럼, 언젠가 “기다려”라는 말만 남기고 먼저 오르는 날이 또 오겠지. 그러니 일단 너를 내려놓고, 차근차근 계단 오르는 법을 가르쳐보는 건 어떨까. 가위로 이기면 두 칸, 바위로 이기면 한 칸, 보로 이기면 다섯 칸 오를 수 있다는 간단한 게임의 룰을 알리는 것으로, 수월하지만 즐겁게 이 계단을 함께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우선 나의 ‘인내심’이 필요할 테지만.
-너 진짜 괜찮겠어? 대화가 되겠냐고.
-우리 대화 되게 잘 통해.
-인도의 수도는?
-인도네시아.
-조선을 건국한 사람?
-이공계.
-천고?
-만보.
-발 없는 말이?
-아프다.
-이래도 대화가 된다고? 이래도?
-원탁이 넌 다 좋은데 유머 감각이 없더라. 진 선생님 지금 아재 개그 하는 거잖아.
어쩌다 보니 아름다운 결말로 글을 마쳤지만, 나는 여전히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가르칠 깜냥은 되려나. 그런 고민들 때문이다. 게다가 가르침은 배움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행위였다. 그러니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나를 환대할 수 있을까. 사실 한 친구만을 끌고 왔지만, 이 이야기에 더하고 싶은 사람이 몇몇은 더 있다. 특히 ‘나는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니 ‘앞으로도 모를 예정이다’라고 말하던 그 친구도 만만치가 않았다. 제발 모르는 것은 몰라도 좋으니 묻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만약 나처럼 모르는 것을 묻는 행위 자체가 부끄럽다면, 남몰래 묻어두었던 질문을 비밀리에 파헤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러니 그 친구의 ‘그것들을 굳이 알아야 하냐’는 당당함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친구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핑프족’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핑거 프린세스’, ‘핑거 프린스’를 줄인 말인데, 간단한 정보조차 직접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작정 물어보는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모르는 것은 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이들과 얼마나 오랫동안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묻고 싶다. ‘하늘이 뭐야’로 시작해서 ‘왜 하늘은 파란 거야’, ‘파란색은 왜 파란색이야’, '왜 하늘은 높이 떠 있고, 왜 우리는 날 수 없어’ 등으로 이어질 어린 질문들에 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답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게 참 어렵다. 물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에서 내가 ‘무식함’을 느꼈는지 알렸다면, 나의 고민에 조금 더 가깝게 고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은 예민한 대화 주제들을 이곳에서 꺼내어도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들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감도 느꼈다. 그러니 그 대화는 당신의 경험에 맡겨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쪽일까. 맞춤법을 틀리는 사람일까. 아니면 맞춤법을 틀리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고치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참고 견디는 사람일까. 어쩌면 끊어버리는 사람이려나.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면 내게도 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안타깝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이기도 해서 놓치지 않는 법을 조금 더 연구하고 싶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