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왜, 그리고 언제 상하이에 들어왔을까요? 시기는 19세기 중반, 이유는 단순합니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은 대량의 아편을 중국에 들여와 사회 전체를 흔들었고, 이를 막으려는 중국 정부와의 충돌이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과는 중국의 패배였고, 상하이는 서구 열강에 개방되었습니다. 영국이 원했던 것은 ‘자유무역을 위한 거점’이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이곳은 난징동루로, 과거 영국 조계지의 중심부입니다. 1840년대 이 지역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진흙벌판이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땅이었기에, ‘이 사람들이 여기서 뭘 해낼 수 있을지 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내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국은 약 80년에 걸쳐 이곳을 아시아 최고의 무역·금융 도시로 키워냈습니다. 중국 해안선의 중심이자 양쯔강과 연결된 탁월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상하이는 한때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하며 ‘아시아의 월스트리트’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번드(Bund)를 따라 세워진 최고층 건물이자 상징인 피스 호텔은 유대인 사업가 사순(Sassoon) 가문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바그다드 출신의 사순 가문은 인도를 거쳐 해운과 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는데, 주된 품목은 당시 합법이었던 아편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 그들은 상하이의 폭발적인 성장을 읽어내고 무역 자본을 부동산에 투자했습니다. 한때 난징루의 절반을 소유할 정도였던 그들의 초기 프로젝트가 바로 이 호텔입니다.
사순 가문은 매우 영리했습니다. 아편으로 부를 쌓은 뒤 ‘아편 반대’를 표방하는 국제 아편 위원회(IOC)를 설립해 깨끗한 사업가로 이미지를 세탁했고, 공산당이 들어오기 전 일부 자산을 정리해 영국으로 떠남으로써 막대한 부를 보존했습니다.
와이탄은 영국 조계 시절의 유산입니다. 1920~30년대 이곳은 ‘아시아의 월스트리트’라 불렸고, 보이는 건물 대부분이 은행, 보험사, 금융기관이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에 본사를 둔 몇몇 글로벌 기업들이 바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상하이에 들어오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그 기업들이 서방으로 이동하게 되었죠. AIA도 와이탄의 한 건물에서 두 명의 미국인에 의해 설립되었고 영국은행인 HSBC도 상하이와 홍콩에서 동시에 설립되었습니다.
위 건물은 1923년에 지어져, 1955년까지 HSBC의 상하이 본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건물은 국유화되었는데, 공산당은 이 건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외관이 국회의사당처럼 웅장했거든요. 그래서 오랫동안 상하이 시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약 25년 전, 이 건물은 SPD은행으로 넘어갔습니다. SPD은행이 리노베이션을 하며 천장의 페인트를 벗겨냈을 때, 놀라운 장면이 드러났습니다. 그 안에 HSBC 시절의 프레스코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겁니다. 중앙에는 부의 여신이 그려져 있고, 주변에는 별자리와 함께 HSBC가 지점을 두고 있던 8개 도시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상하이가 이미 100년 전 세계 금융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위 건물은 현재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입니다.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와 같은 브랜드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최고급 호텔입니다. 하지만 이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 1910년에는 호텔이 아니라 상하이 클럽(Shanghai Club), 즉 영국인 전용 클럽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이 모여 사교하고, 네트워킹하고, 파티와 행사, 결혼식까지 열던 공간이었죠.
시대가 바뀌면서 영국인들이 떠난 뒤, 이 건물은 한동안 비교적 평범한 호텔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이 건물에서 중국 현대사에서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여기서 중국 최초의 주식시장 거래가 시작됐습니다. 공산 중국에서 처음으로 ‘주식’이라는 개념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죠.
그리고 또 하나. 중국에 처음으로 미국 패스트푸드가 들어온 장소도 바로 이 건물입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공산주의 중국 한복판에, 미국식 패스트푸드가 등장한 거니까요. 이제 시대가 바뀐다는 일종의 신호였죠. 그런데 첫 주자가 맥도널드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에 처음 들어온 미국 패스트푸드는 KFC였습니다. 왜일까요? 치킨이 중국 음식 문화와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고급스러운 건물에 KFC가 들어온 게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시 KFC 한 끼는 매우 비싼 식사였습니다. 소련식 배급 시스템 아래에서 자라 고기가 늘 부족했던 상하이 시민들에게 치킨은 “시험 잘 보면 사주는” 최고의 보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도 있었죠.
KFC가 맥도널드를 제치고 성공한 비결은 극단적인 현지화였습니다. 죽, 피단, 찐만두 같은 중국식 조식을 팔고 여름에는 가재 요리를 내놓는 전략으로, 현재 상하이에만 50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국이 금융 중심의 조계를 형성했다면, 프랑스는 주거와 문화, 여가가 결합된 ‘삶의 공간’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 조계지에는 은행 대신 카페, 극장, 부티크가 들어섰고, 저층 주거 건물과 곡선형 거리,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들여온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이 완성되었습니다.
현재 오쿠라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옛 프랑스 클럽(French Club)이 자리했던 공간입니다. 이 건물은 1926년에 완공되었으며, 원래는 독일인의 별장이었으나 이후 프랑스 조계 당국이 인수하여 프랑스 커뮤니티의 사교 중심지로 사용하였습니다. 프랑스 클럽은 외교관, 사업가, 상류층 인사들이 모여 사교 모임, 파티, 결혼식, 각종 네트워킹 행사를 열던 장소로, 당시 프렌치 조계지의 권력과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외국인들은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고 이 건물 역시 프랑스 클럽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됩니다. 이후 건물은 체육 클럽으로 전환되어 일반 시민을 위한 운동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원이 일부 훼손되고 러닝 트랙과 체육 시설이 들어섰는데, 이는 식민지 시대의 사교 공간이 대중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재해석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이 공간은 다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당시 건물은 상당히 노후화된 상태였고, 식민지 시대 유산을 보존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중국에서는 문화유산 보존 역시 도시 발전의 일부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일본의 오쿠라 호텔 그룹이 이 부지를 개발하면서, 기존 프랑스 클럽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복원하여 호텔의 핵심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곳이 바로 오쿠라 가든 호텔 상하이입니다. 옛 프랑스 클럽 건물은 현재 호텔의 로비와 연회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2층의 유리 천장을 갖춘 볼룸은 지금도 상하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웨딩 장소 중 하나입니다.
진장 호텔(Jin Jiang Hotel)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영 호텔 체인에 속한 호텔입니다. 중국에 오래 머무르시다 보면, 등급과 형태가 다양한 진장 호텔들을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이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최초의 진장 호텔로, 1926년에 유대계 사업가 빅터 사순(Victor Sassoon)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피스 호텔을 지은 바로 그 인물이죠. 이 호텔에는 많은 유명 인사들이 머물렀습니다.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과 함께 이 호텔은 상하이 시 정부의 공식 영빈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의 주요 지도자들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1970년대에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그리고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이 호텔에 숙박하면서 이곳은 중국 현대 외교사의 중요한 무대가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1972년 ‘상하이 공동성명(Shanghai Communiqué)’ 때문입니다. 바로 이 호텔 안의 강당에서 미국과 중국은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이 장기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합니다. 이는 동시에 미국이 대만과의 공식 외교 관계를 정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합니다. 이 성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의 국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중국과 수교한 국가는 대만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대만과 수교한 국가는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대만과 수교한 국가는 약 10개국 정도로, 대부분 카리브해나 태평양 지역의 소규모 국가들입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진장 호텔은 단순한 숙박 시설을 넘어, 중국의 근현대사와 국제 외교의 중요한 순간들이 축적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1920~30년대 프랑스인들이 즐기던 경기장과 문화 시설이 모여 있던 곳입니다.
원래 이곳은 프랑스인의 개 레이스장(dog race course)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인민광장 근처에서 경마(horse racing)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같은 방식을 따르지 않고 개 경주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도박도 함께 이루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지금도 그레이하운드 경주가 열리곤 합니다. 또한 이 지역에는 큰 건물들이 있어, 주말이면 사람들이 극장, 영화관,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가를 즐기곤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공산당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공산당이 들어오고 도박이 금지되자, 이곳은 단순한 극장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혁명가요를 부르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홍위병의 집회와 행사도 열렸습니다. 홍위병은 문화 대혁명 당시 ‘구세계를 부수고 새 세계를 건설한다’는 목표로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는 능했으나 새 세상을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해요. 1969년 큰 화재가 발생해 지역 대부분이 전소되었고, 이후 약 15년간 방치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극장으로 다시 복원되어, 당시 상하이 시민들이 서양 팝과 일본 팝 콘서트를 즐기던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재 이곳은 인터컨티넨탈 호텔(Intercontinental Hotel)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원래 1920년경 모리슨(Morrison) 저택으로 지어졌습니다. 모리슨 씨는 영국인으로, 인근 경마장(English race course)의 감독을 맡고 있던 유력 인사였습니다. 그는 이 땅을 매입해 가족을 위해 네 채의 집을 지었지만, 이후 모리슨 가족은 중국을 떠났습니다.
그 후 일본 기업이 건물을 사용하기도 했고, 1930년대에는 고급 호텔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은 장제스(Chiang Kai-shek)와 마담 장(Madame Chiang Kai-shek)의 약혼 장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50년대 공산당이 상하이에 들어오면서, 이 건물은 상하이 첫 공산당 시장의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공산당은 모든 사람에게 ‘검소하게 살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1970년대에는 공산당 고위 관리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로 전환되었고,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약 20년 전, 일반 호텔로 다시 개조되어 현재는 누구나 머물 수 있는 호텔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호텔에는 넓은 정원이 있어, 가든 호텔보다도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평일에는 사람들이 애프터눈 티를 즐기러 오고, 주말에는 결혼식 장소로도 많이 활용됩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호텔의 큰 매력 포인트입니다.
이 지역에 독특하면서도 고전적인 중국식 샨(Shan) 스타일 건축이 남아 있는 이유는 아편 전쟁(Opium Wars) 이후 상하이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쟁 이후 청 정부는 막대한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했고, 그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협받거나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남부 중국의 부유한 귀족과 상류층은 비교적 안전한 프랑스 조계지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조계지는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치안이 안정적이었고, 이주민의 유입은 곧 부동산 투자 기회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건물주들은 서양식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주거 건물을 지어, 삶의 수준을 유지하려는 부유한 ‘난민’들의 수요를 흡수했습니다. 그 결과, 서구적 미감과 중국 전통 주거 개념이 결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은 특히 잘 보존된 스쿠먼(Shikumen) 컴파운드 중 하나로, 서양식 기둥과 문 위 장식, 프랑스식 창문이 어우러진 것이 특징입니다. 프랑스 조계지의 건축은 이처럼 서양과 중국의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발전했으며, 이는 약 200년 전 상하이 상류층의 문화적 취향과 생활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1920년대에 조성된 상하이의 대표적인 고급 저택가였습니다. 건립 당시부터 통로가 넓어 경찰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였고, 큰 창문과 높은 천장 등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건축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여러 저명한 인사들이 이곳에 거주했는데, 첫 번째 저택에는 중국 초대 법무부 장관이 살았고, 인근 거리에는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만든 쑨원(Sun Yat-sen)과 함께 활동했던 여성 인사도 거주했습니다.
건축된 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이곳의 주택들은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생활 편의 면에서는 다소 불편함이 있을 수 있으나, 현재 거주민의 상당수는 오래된 주택 환경에 익숙한 연령층으로, 1960년대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사유 재산 소유나 자유로운 임대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결혼 후 공적 주택 신청 자격을 얻어야만 이곳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주민들은 지금도 월 2~3달러 수준의 상징적인 임대료만 지불하며 거주하고 있고, 거주권은 자녀에게 상속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주민들은 내부 인테리어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개조할 수 있지만, 외관은 문화유산 보호구역(heritage site)으로 지정되어 정부가 엄격히 관리합니다. 지붕이나 외벽 보수는 정부 예산으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개발이 제한되기 때문에 잠재적인 자산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만을 갖는 주민들도 있습니다. 특히 상하이에서는 정부의 토지 수용과 보상이 ‘복권에 당첨된 것’에 비유될 만큼 큰 경우가 있어, 일부 주민들은 재개발을 기대하며 오랜 시간을 기다려오기도 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총 51채의 주택이 지어졌고, 원래는 51 가구를 위해 설계된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가수부터 마지막 황제를 궁에서 몰아낸 군 장성, 유력한 사업가, 저명한 작가와 교수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사회적·문화적 엘리트들이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대형 주택에 개인이 거주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모든 재산은 ‘인민의 것’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기존 거주민들은 정부로부터 두 가지 핵심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부유해졌는가?” 그리고 “이 재산을 인민에게 돌려줄 준비가 되었는가?”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고, 대답은 ‘예’여야 했습니다.
그 결과 주민들은 흔히 서민용 방이나 하인 방으로 밀려났고, 한 채의 집에 12~17 가구가 함께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과밀한 거주 환경 속에서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주택들은 빠르게 노후화되었습니다. 약 2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매우 혼잡하고 낡은 주거지로 인식되던 지역이었습니다.
전환점은 지방 정부의 결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대를 역사적 맥락을 살린 패셔너블한 거리로 재생하기로 하면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전면 이주했습니다. 이후 프랑스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복원 프로젝트를 맡아, 건물들은 원래의 구조와 디테일을 존중한 채 과거의 화려함을 되찾았습니다. 현재 일부 건물은 고급 비즈니스 공간으로 활용되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프랑스 법원(French Courthouse)의 네 번째 청사입니다. 1층이 비교적 낮게 설계된 것은, 당시 이곳이 독립 사건을 비롯한 주요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지던 중심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이 프랑스 법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판사가 배정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해 일정 수준의 주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결과 일부 법적 사안에는 중국 판사가 재판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피고는 프랑스 판사와 중국 판사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은 프랑스 판사를 택했습니다. 당시 중국 판사들은 판결이 매우 엄격해 채찍질과 같은 가혹한 처벌이 일반적이었던 반면, 프랑스 판사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건물은 현재도 지구 검찰청(District Prosecutor Office)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도 유사한 기능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시기의 건축물은 새 정권 아래에서 활용을 꺼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 건물은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의 아름다움, 그리고 실용성 덕분에 예외적으로 원래의 용도에 가까운 방식으로 존속해 온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의 주인은 프랑스 출신 자본가 Mr. Nevo였습니다. 그는 19세기 후반 이 지역에 투자하며, 그레이하운드 경주장(Greyhound race course)과 같은 사교·오락 공간을 조성했습니다. 그레이하운드는 말처럼 빠르게 달리는 개로, 당시 상류층과 사회적 엘리트들이 이 경주장에서 도박과 사교 활동을 즐겼습니다. 경주장에서는 전기로 움직이는 종이 토끼 모형을 이용해 개가 따라 달리도록 하는 장치도 있었습니다.
건물 자체는 에클레틱(Eclectic) 건축 양식으로, 네오클래식(Neoclassical)과 현대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원 빌라는 3 부분으로 나누어진 전형적인 레이아웃을 갖고 있지만, 이 건물은 둥근 탑 구조와 같은 현대적 요소가 더해져 있습니다. 외벽과 기둥은 표면이 평평하지 않고, 생동감 있는 형태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정원에는 포세이돈(Poseidon)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데,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물줄기를 이용해 개들을 경주장으로 유도하는 실용적 기능도 겸했습니다. 또한, 코린트식(Corinthian) 변형 기둥과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 등 섬세한 장식이 돋보입니다. 이 건물은 당시 상류층의 사교·오락 공간이자, 프랑스 자본가의 투자와 문화적 취향이 결합된 장소였습니다.
정원에는 포세이돈(Poseidon) 분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조형 장식이 아니라 물줄기를 활용해 개들을 경주장 방향으로 유도하는 실용적 기능까지 겸한 장치였습니다. 이외에도 코린트식(Corinthian) 변형 기둥과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등 섬세한 디테일이 곳곳에 적용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당시 상류층의 사교와 오락 문화, 그리고 프랑스 자본가의 투자 감각과 문화적 취향이 집약된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상하이에는 조금은 신기한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차이나타운’입니다. 중국 안에 차이나타운이라니, 아이러니하게 들리지만 이곳은 영국과 프랑스 조계지가 들어오기 이전의 상하이 중심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영어권과 프랑스권 문화가 유입되기 전까지 이곳이 바로 상하이의 심장이었던 셈입니다.
같이 거리를 걷던 웨이펭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상하이 출신이에요. 태어나서 자랐고, 사실 제 세대는 이민 2~3세쯤 됩니다. 할아버지가 지금으로부터 차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서 상하이로 오셨거든요. 그 당시 상하이는 시골에서 인구 25만 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이었고, 사람들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민 현상도 많아졌죠.”
영국·프랑스 조계지(concession)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차이나타운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시장 주변에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구역은 점점 더 좁고 혼잡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집 자체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아요. 어떤 집에는 발코니도 있었죠. 하지만 당시 이 동네 집들에는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밤에는 어떻게 하냐고요? 양동이를 썼고, 아침이 되면 그걸 들고 지정된 장소로 가서 씻어야 했죠. 부엌도 없었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주로 복도에서 요리를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불을 피워 요리했어요. 35~40년 전만 해도 아침 7시면 이곳은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모든 집에서 나무를 태워 아침을 준비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아이였지만 꽤 행복했어요. 골목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고, 놀 친구도 많았죠. 게임기 같은 건 없었지만, 모든 일상이 골목에서 이루어졌어요. 빨래도, 요리도, 식사도, 술 마시는 일도요. 여름이면 남자들이 상의를 벗고 골목을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가끔은 작은 해변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저녁 7시쯤이면 모두 골목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TV를 봤죠. 집마다 TV가 없어서 공용 TV를 함께 봤거든요. 정확히 뭘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선전 프로그램이었을 거예요. 그래도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영상을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죠.”
그는 그 시절의 골목이 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활 방식이 사람들을 정말 가깝게 만들었어요. 아주 끈끈한 커뮤니티였죠. 저는 약 5년 전까지도 이곳에 살았습니다. 그동안 조금씩 환경은 나아졌지만, 정부가 모두를 이주시킬 때까지 기본적인 삶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이곳의 차이나타운은 단순히 낙후된 주거지가 아니라, 상하이가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삶의 기억이자 공동체의 역사였습니다.
상하이는 전쟁과 아편이라는 비극적인 서사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 유산들을 파괴하는 대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흡수하고 현지화해 왔습니다. 1840년대 중국이 ‘버려도 그만’이라며 내주었던 쓸모없는 진흙벌판은, 서구의 자본과 중국의 노동력이 뒤섞이며 어느덧 아시아의 심장부로 거듭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상하이가 이 조계지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치욕스러울 수 있는 조계지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대신, 그 웅장한 건물 안에 주식시장을 세우고, 때로는 천장의 페인트를 벗겨내 과거의 영광을 기적적으로 복원해 냈습니다.
결국 상하이 조계지는 단순히 서구 열강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격동의 세월을 버텨낸 중국인들의 유연한 적응력과 실용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박물관입니다. 화려한 석조 건물 너머, 여전히 골목마다 배어 있는 서민들의 치열한 삶의 궤적을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하이라는 도시가 가진 진짜 힘을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