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서 괜찮은 여행
어릴 때부터 꿈이 많았다. 치과의사였다가 아나운서였다가 쇼핑호스트였다가. 수많은 꿈들을 안고 가다가 나름의 종착점에 다다랐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광고를 만들고 싶었다. 나에게는 수많은 짝사랑 경력이 있었는데 광고라는 새로운 항목이 추가됐다. 좋아하는 사람처럼 광고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렜다. 더 알고 싶었고 잘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광고학과 하나만을 지망했다. 재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1지망은 지금 내가 재학 중인 홍보광고학과였다. 수능을 치고 원서를 쓸 때 확실하게 붙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아빠는 낮은 학과를 써서 전과하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며칠을 고민했고 아빠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원서를 쓰기 전, 학과 소개를 읽어봤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자고 홍보광고학과 소개를 눌렀다. 몇 번이나 더 본 설명이었지만 그걸 읽어보다가 눈물이 터졌다. 자그마치 4년동안이나 내 꿈이었다. 여기에 가고 싶다고 엉엉 울었다. 결국 그 곳에 원서를 썼다. 최초합이 떴을 때, 엄마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처음으로 내 짝사랑이 이루어졌다.
입학 후 여러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뭐든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분명 열심히 했으니 좋은 결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좋은 결과는 찾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숨이 막혀서 담당 교수님께 여쭤보았다.
“공모전은 운이야. 상을 못 받았다고 해서 네가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뒤로도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계속 도전했다. 그 말을 위안으로 삼아 나를 다독였다. 내가 하고 싶은 광고를 하고 준비하는 과정동안 발전하면 된 거야. 조급해하지마.
11월이었다. 이상한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광고라는 글자를 들어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긋지긋하거나 짜증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자신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무언가가 나의 감정을 모조리 빼앗아간 것 같았다. 어째서? 끝없이 질문했지만 대답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오는 상실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무얼 위해 나는 이 학과에 온 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처음으로 전과를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누군가 꿈이 없다고 하면 난 이해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게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처음부터 없었다면 차라리 모른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보다 줬다 뺏는 게 제일 서러운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일요일에 혼자 출사를 갔다. 인천에 가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멀었다. 대신 시청과 홍대에 가볼 생각이었다. 저녁이 되면 홍대는 북적이니까 낮에 갔다가 시청을 가고 근처 시장에서 저녁 반찬을 사와야지. 완벽한 계획이었다. 홍대로 가는 버스에서 이상한 걸 깨달았다. 반대로 가는 버스를 탄 것이다. 요새는 이런 실수를 잘 하지 않았는데 성급한 마음에 정류장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나 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시청 쪽으로 가는 버스였다. 결국 남대문 시장에서 내렸다. 어쩌다 보니 즉흥여행이 된 셈이다.
날씨는 따뜻했고 하늘은 맑았다. 남대문을 몇 번이나 카메라에 담고서야 덕수궁으로 향했다. 실물학생증이나 주민등록증이 있다면 학생할인을 받을 수 있었지만 둘 다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돈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안은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전시회 중인지 유리 작품이 오색빛깔을 담고 있었다. 풍경에 비해 표 값은 너무 쌌다.
풍경을 찍으려고 몇 번이나 셔터를 눌렀다. 나 말고도 카메라를 가진 무리들이 많았다. 동아리 같았다. 그들은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부드러운 햇살 같은 사랑들이었다.
돌담길을 걸어 나갈 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마술 공연을 하고 있었다. 마술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즐거워했다. 마술을 마칠 때 그는 자신이 몇 년 동안이나 주말마다 이 곳에서 마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마술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는 반짝였다. 꿈이 있는 사람은 눈이 부셨다. 그에게 마술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멋지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잔잔한 파도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경의선 숲에서 한참을 걷다가 카페에 갔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썼다. 적다 보니 그래도 여러 개가 나왔다. 광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슬펐지만 조금씩 받아들이려 했다. 사랑에는 끝이 있으니까.
며칠 뒤 지방에서 친구가 놀러 왔다. 공연을 보러 온 친구를 공연장으로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하철 역 안을 걸어가는데 광고판이 보였다.
‘이거 마음에 든다, 이거는 좀 별로인 것 같은데. 이 색보다는 다른 색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광고를 보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의 순간이 즐거웠다는 걸 깨닫고 나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직 광고를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지쳤을 뿐이었다. 더 잘하고 싶었는데, 나는 잘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망가 버렸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오는 길에 눈물이 흘렀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실패가 두렵고 내가 뒤처지는 게 무서웠다. 그래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도 나는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고, 이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 이 사랑에도 끝이 있겠지. 이 사랑이 언제 끝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별은 예고 없이 오는 법이라 이별하게 된다면 또 울게 될 것이다. 그 때는 다시 절망하겠지만 이별이 두렵다고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이 사랑이 수명을 다해 사라질 때까지 노력하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