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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ug 06. 2023

사람의 다정함과 선함에 대해서

그 다정에는 의미가 있었다

성선설을 믿는가, 성악설을 믿는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사람에게 마구 데일 때는 인간은 악한 게 틀림없다고 믿다가도 작은 선의 하나를 맞이하게 된다면 그래, 원래 인간은 따뜻한 존재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인간에게는 선함이 깔려있다고 믿는다.



극단적인 상황에 사람을 몰아놓고 사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이기적이다, 추악하다고 말하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생존이다. 생존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다음 욕구가 생기는 법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그러니 오로지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에 집중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다정할 때, 선의를 베풀 때, 그게 진짜 사람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할 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했을 때 나오는 행동이 본성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본성이란 말인가.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서 추악해 보이거나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저 그 사람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때의 모습인 거지, 그 자체가 본성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평소에 보여준 다정함과 친절은 모두 사회적으로 형성된 어떤 반응 같은 게 아니다. 그렇게 느껴서 행동한 것뿐이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도 다정함과 이타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믿기보다 자신이 틀렸을 때의 상황을 가장하고 움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현재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를 고려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남을 생각하는 모습은 바보 같고 무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무모한 선함이 있어서 결국 미래는 달라졌고, 누군가를 구했다. 이번에는 그 선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바로 <꼬리잡기>의 고준호다.


스튜디오 콘트라 붕괴사건으로 순식간에 건물에 갇히고 만 대학생 9명. 2주 뒤 구출되었지만 3명은 사망, 1명은 중태로 발견된다. 185의 남성인 고준호가 사망했다는 점은 이 사건에서 굉장히 큰 의문점으로 자리를 잡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기상황 속 갈등 중재자로서의 역할

고준호는 작중에서 천상계, 간호천사, 피지컬천재 얼굴천재 등 여러 방면에서의 별명으로 언급된다. 주목할만한 점은 9명이 모여있는 와중에도 동아리 부원이 아닌 고준호가 굉장히 큰 발언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9명이 갇혀있는 상황에서 리더와 같은 역할을 자처하는 건 고준호다.



실제로 갈등 상황이 생길만하면 본인이 제일 먼저 중재에 나선다. 이 말은 즉슨, '본인이라면 중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학년이 같고 체격적으로 밀리지 않는 본인이라면, 송준택을 저지할 수 있고, 오태연과 송준택의 갈등을 저지할 수 있고, 일정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수라장 속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첨언하자면 이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청록이 난동을 피웠을 때도 고태연은 내버려 두라고 하지만 고준호는 기다려도 멈추지 않으면 자기가 가겠다고 한다. 오태연은 그걸 오지랖이라고 일컫지만 고준호는 스스로에게 어떠한 책임이 있다고 자각한 것이다.


이 집단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인지한 것이다. 그러니까 고준호 입장에서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그건 고준호의 삶에서 원인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일단 고준호는 신체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하다.-외모가 뛰어나고 체격이 좋은 것- 그렇기 때문에 고준호에게는 일정 이상의 발언권이 항상 주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본인의 이타적인 성향과 어우러져 집단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맡는 게 당연시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럽지만 고준호의 가정환경도 원인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머니와 누나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자란 고준호는 집안의 기둥과 같은 막내아들이라는 말이 작중에서 언급됐다. 어머니는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하고 고준호를 엄격하게 키웠다고 했고, 누나의 SNS 내용을 봤을 때 둘의 사이는 꽤 돈독했다. 이런 환경에서 고준호는 본인보다 남의 상황을 고려하는 게 당연했을 거고 그걸 본인이 '이해할 수 없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게 당연한 삶이었다고 생각된다. 기대되는 역할이나 가져야 하는 책임도 막중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준호는 이 안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자처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그 사실에 힘들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난 상황인 만큼 고준호 역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지쳐있지만 그럼에도 '나밖에' 나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지점이 고준호를 죽음으로 앞당기고 말았다.




냉정한 사고, 다정했던 판단

터널 시야에 갇혀서 깊은 사고가 불가능해진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고준호는 끝까지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한다. 물론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이기에 중간중간 욱하는 부분들은 존재하지만.



작중 다른 등장인물과 다른 점은 고준호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에서 빛 하나 안 보이는 채로 구조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사고를 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더위와 배고픔, 소음, 갈증으로 예민해져 있고 본인의 본능에 충실해져 있다. 의심해 볼 만한 상황을 의심하는 사고를 하는 것 자체가 큰 피로이자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상황이었다.



고준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다. 특정 약물에만 후각이 반응하는 고준호는 김윤의 시체에서 약물의 냄새를 맡는다. 또한 빛의 부재로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고준호는 한 가지 추론을 한다.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범인이 누구인지까지 완벽하게 추리해 내지만 고준호는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의심한다. 자신이 현재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가정을 피하지 않는다.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김윤도, 커플의 소리가 위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고 했던 신유정도, 누군가 자신을 만졌다는 백혜성도 자신이 무언가를 감지했을 때 바로 이야기한다. 이 말을 누군가 믿어줄지 안 믿어줄지에 대한 최소한의 사고도 거치지 못한 채. 그 사실이 독자들에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고준호를 보고 고준호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준호는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판단까지 냉정하지는 않았다.





작중에서 그 약물은 기적의 조현병 치료제로 사용되었다. 만약 고준호가 그 사실을 알리게 되면 그 사람의 병력을 자신이 오픈하는 게 되는 셈이었다.


자신이 특정 약물에 반응한다는 게 밝혀지며 진로로 삼았던 간호사를 포기했던 고준호는 범인과 자신의 삶을 겹쳐본다. 간호사를 포기한 이유도 웬만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는 걸 봐서 발병은 고준호의 '역린'과 마찬가지다.



병력이 남에게도 역린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고준호는 침묵을 선택한다. 합리화는 더 싫다고, 고준호는 말한다.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의 부재


고준호가 죽은 이유는 단순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도 고준호는 모든 짐을 혼자서 안고 가야만 했다. 당시 범인으로 짐작하던 한성빈을 제외하고 남자는 고준호를 포함해서 네 명. 고준호와 이청록이 180이 넘는 거구이고, 힘이 센 송준택이 있었던 걸 고려하면 고준호의 죽음은 더욱 의스러울 수밖에 없다-정신이 불안정했던 신유정은 제외-.


고준호는 이 상황에 대해 누구에게 토로하면 더 이상의 사상자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피지컬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청록과 송준택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고준호가 선택한 사람은 오태연이었다. 아무래도 동아리 부원이 아닌 고준호가 알고 있는 사람은 이청록, 송준택, 오태연에 불과했고 친분이 없고 과격한 모습만을 보인 강한나에게 의지하는 건 어려웠을 걸로 보인다. 이게 고준호의 실수였다.



밝고 쾌활한 모습만을 보여준 오태연은 이미 정신적으로 붕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단 자신이 초대한 스튜디오였고, 자신의 말대로 모두 휴대폰과 짐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그 상황에서 여자애 둘이 죽었다. 당연히 맨 정신이기에 어려웠다.


타인에게 쉽게 의지하지 않는 고준호가 의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존재오태연. 전과한 고준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것도 오태연이었고 나중에 밝혀지길 고준호 역시 오태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적인 호감, 모두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의 말을 믿고 도와줄 거라고, 그래서 이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여태까지의 상황 중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말한 적 없는 고준호는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오태연은 예민한 소리로 치부해 버린다. 오태연 입장에서는 현재 학과비를 빼돌린 것도 고준호에게 들켰고,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고준호는 친구로서 자신을 굉장히 좋아한다며 그 일을 같이 해결하자고 이야기하고, 사실 이 재난 상황이 일어난 게 자신의 탓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을 것이다.



이 둘의 성향은 앞서 언급했던 이청록의 난동 때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고준호는 말리러 가겠다고 했고 오태연은 내버려 두라고 했다. 언제나 자신보다 남 또는 전체를 위하는 고준호와 다르게 오태연은 무시해 버린다는 쉬운 길을 택한다.


마찬가지로 오태연은 본인의 안위가 급한 상황에서 무시해 버리는 쪽을 선택한다. 오태연이 이기적이고 못돼서 그렇게 결정한 게 아니다.



당시 오태연에게는 고준호의 말이 이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걸로 들렸을 것이다. 만약 고준호의 말이 맞다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예상보다도 더 처참하고 무서우니까. 그래서 오태연은 이번에도 쉬운 선택을 한다. 설마 그렇겠냐며 이 상황을 무시해 버리는 것. 애써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는다.



놀라운 건 이런 오태연의 행동에 고준호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 독자들마저 오태연에게 이기적이라고 외치는 마당에 고준호는 오태연이 느끼는 공포는 자신과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여자애들만 사고를 당했으니까 순서를 따진다면 그다음은 오태연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고준호는 의지하는 걸 포기한다. 


오태연이 화를 낸 걸 보고 본인이 눈치 없게 군 탓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예민한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한성빈을 범인으로 의심한 자신의 생각은 결국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혼자 책임지기로 결심한다. 만약 이 사실을 누구와도 얘기했다면, 커터칼을 송준택에게 맡기지 않았다면, 고준호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선의는 누군가를 구한다


끝없는 자기 검열과 최소한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곳에서 고준호도 지치게 된다. 스스로도 자신이 나선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서지 말자고 결심하지만 결국 한성빈이 자신의 흉내를 내며 오태연을 불러내는 걸 보고는 그걸 '직접적으로' 저지하고 만다. 그리고 한성빈과 독대하게 되며 최후를 맞는다.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걸 가만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고준호는 한성빈을 도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한성빈이 자신에 대한 악의를 하염없이 드러내는 와중에도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한성빈 역시 세 번째 피해자는 덜 다정했으면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고준호는 다정했다. 다정이 고준호를 죽였다.


고준호가 한성빈에게 위험을 감지했던 순간 역시 자신이 살아남는 것보다 애들에게 알리는 걸 먼저 생각한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고준호는 오태연에게 도망가야 함을 알리려 하고, 마지막에는 한성빈이 내팽개쳐놓은 라이터를 숨기는 데 성공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성빈이 쥐고 있던 라이터는 권력과 다름없었고 그 라이터에 의해서 김윤도, 고준호 본인도 기습당했기 때문에.



죽어가는 과정에서 고준호의 본능은 그저 생존과 위험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살고 싶어서 도망가려 했고, 발버둥 쳤고, 오태연이 죽지 않길 바라며 소리를 질렀고, 다른 애들이 죽는 걸 막기 위해서 라이터를 숨겼다.



본인이 여기서 죽는다는 걸 알고서 고준호가 선택한 행동은 그저 라이터를 숨기는 것. 자신은 여기서 죽지만 남아있는 다른 애들의 안전을 생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상황에서 고준호가 선택한 건 그것이었다. 마지막까지 혼자서 '책임'지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어떻게든 더 이상의 피해는 막아야겠다는 고준호의 이타심이 발휘됐다고 볼 수 있다.



고준호가 바보 같거나 미련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고준호가 그저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 선의로 인해서 다른 애들을 지킬 수 있었고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고준호가 시신에서 약물 냄새를 맡았다는 오태연의 증언과 고준호가 특정 약물에 반응한다는 걸 바탕으로 약물과 관련된 용의자를 추릴 수 있었고, 결국 장기복용 중이던 한성빈을 용의자로 추적할 수 있었다. 또한 라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사망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고준호가 무언가를 책임지고 감내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들에게 일을 맡겼다가 사건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커지는 것보다 자신이 수습 가능한 선에서 혼자서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왔고 그런 자신을 믿어왔을 테니까.



그 안에서 한성빈은 일반적인 사고 범주 밖의 인간이었고 지능을 가진 짐승이었다. 고준호의 배려는 한성빈에게는 쓸데없는 동정으로 느껴졌고 배려하기 위해 만든 상황이 고준호에게는 허점이 되고 말았다.



고준호의 선의는 사람을 구했지만 결국 본인은 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본인을 구할 생각보다 타인을 구할 생각으로 선의를 베풀었던 고준호를 생각한다면, 그게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선의를 외면한 사람의 결말

오태연의 외전에도 고준호의 이야기밖에 없었던 만큼, 고준호의 선함을 이야기하면서 오태연을 빼놓을 수는 없다. 고준호의 선함을 알면서도 외면했고 결국 가장 비참한 끝을 맞이하게 된 인물. 대외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사는 것 같겠지만 누구보다도 속이 곪았을 것이다.




오태연은 고준호가 자신을 믿어서 모든 걸 털어놨다는 걸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해서 경찰에게 가장 먼저 사건의 실마리를 이야기한 것도 오태연이었다. 고준호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고준호가 죽고 나서는 끝없이 합리화를 하고, 나오고 나서도 결국 그곳에서의 일을 책으로 써 내려간 오태연.


수많은 독자들은 오태연을 비난했다. 나 역시도 오태연의 행동에 대해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오태연은 스스로 지옥에 걸어 들어가길 선택했다. 글을 쓴다는 건 그곳에서의 일을 복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정리한다는 뜻이다. 주어지기만 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어떻게 느꼈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하나하나 문장으로 만들어나간다. 그것만큼 잔인한 게 없다.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던 오태연은 수사 당시 밝혀졌던 내용을 커뮤니티에 올리기도 하고, 합의하지 않고 녹음본을 공개해 버리는 등의 행동을 저지른다. 그 뒤로는 사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며 인플루언서가 된다.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긴 오태연의 행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타인을 생각한 고준호와 굉장히 대비된다. 사건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것 역시 그 안에서의 자신의 행동이 '그럴만했다'라고 합리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힘들었고 괴로웠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게, 이런 식으로 합리화는 더 싫다는 고준호와의 차이점이다.



친구들을 팔아서 성공했다고 모두가 이야기하지만, 오태연의 지옥은 이제 시작이다. 이청록도, 강한나도, 신유정도, 송준택도, 모두 이 사건을 딛고 새로운 삶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오태연은 사건 직후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며 괴로워하기보다는 회피하며 합리화하는 걸 선택한다. 나보다 더한 애도 있었다며 이청록을 심판대에 세우기도 한다. 제때 마주하지 않은 잘못의 후폭풍은 더 크게 찾아온다.




인플루언서가 된 오태연은 외전에서도 사건에 매여있다. 생존자와 피해자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받으면서 이미 끝난 사건을 되풀이하며 과거에 살고 있다.


그리고 고준호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피한다. 고준호에 대해 깊게 생각할수록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게 되니까. 하지만 영상을 통해 고준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고 처음으로 과거를 직면한다.

 

"네가 얼마나 남을 생각해 주는 좋은 사람인지 선함의 본질을 알았다면..."


"거길 데려갔던 건 난데... 널 스튜디오에 부른 게 난데!!! 넌 날 한 번도 원망 안 했어."


"내 평생 운은 널 만난 거에 다 썼을 수도 있어. 끝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어. 영원히... 내가 조금만 덜 이기적이었다면... 내가 널 믿었더라면..."


"네 사려 깊음을 믿고 사랑했더라면... 네게 가장 많은 이해를 받았을 내가 그걸 몰랐다는 게..."



오태연 역시 본인이 이기적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고준호가 얼마나 선했는지까지도. 어쩌면 오태연이 사건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걸 주저했던 건 자신이 고준호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기가 스튜디오에 부르지 않았다면, 고준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줬다면, 그래서 단합했다면...




오태연은 자신이 이기적임을 후회하고 있다. 고준호에게서 받은 선함과 배려를 돌려주지 못했다고. 과거에서 벗어난 애들과는 다르게 오태연은 영원히 지옥에서 살 것이다. 여태까지의 행보로는 이기적이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왔지만 이제 어떻게 하면 좋냐는 마지막 물음으로 볼 때, 오태연은 이기적인 성향을 조금이나마 탈피하지 않을까. 돌려줄 수 없는 선함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주면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떻게 본다면 고준호의 선함이 오태연까지도 구하게 된 거라고 할 수도 있다. 고준호가 선했기 때문에, 그런 고준호를 외면했기 때문에, 오태연은 망가져버렸지만 결국 고준호로 인해서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게 됐다.


그러니까 고준호의 선함은 의미 없지 않았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선함과 다정함을 말한 캐릭터가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봐도 없는 것 같다. 다정함이 이해되지 않거나 무모하기만 해서 온실 속 화초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었다. 그 다정함이 누군가를 구하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마주했지만 너무 해피엔딩만을 바라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준호라는 인물을 통해서 무너지지 않는 다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됐다. 어떠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뜻을 관철해 나갈 수 있다는 게 존경스러웠다.


세상을 바꾸는 건 폭력이나 무력이 아니다.  선함과 다정함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만큼 강한 건 없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찾는다. 괴로워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무언가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게 설령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더라도. 만약 고준호가 라이터를 숨기지 않았다면 더 많은 피해자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오태연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한성빈이 범인이라는 걸 영영 몰랐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선한 인물로부터 우리는 선함을 배운다. 다정을 학습한다. 나도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선하다고 믿는다. 사람의 근본은 선하기 때문에 누구나 선해질 수 있고 악해질 수 있다. 그리고 선함은, 무엇보다도 빠르게 전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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