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Sep 06. 2022

원래 주인공도 주인공입니다

빙의물의 역설

최근 웹소설과 웹툰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빙의물이다. 대체적으로 주인공은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진 인물의 몸으로 빙의하게 되는데, 원래 인물이 처해야 했던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없었던 일들을 만들어나가며 "이전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클리셰가 클리셰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각기 다른 핵심을 가진 빙의물에서 독자들은 매력을 느끼고 지금은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빙의물을 보는 독자들은 작품을 보는 내내 한 가지 의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마 빙의되어 있는 주인공도 가지고 있을 의문점을 독자도 동시에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진짜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빙의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독자들의 주인공이 아닌, 원래 그 삶을 살고 있던 진짜 주인공. 이는 빙의된 주인공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네이버 웹툰 인기작인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와 <엔딩 후 서브남을 주웠다>은 이런 점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빙의 방식 및 주도권의 변경


<남첫가 :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의 리플리는 스물두 살 대학생으로 원룸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자신이 좋아했었던 소설에 빙의했다고 이야기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것이 비해서는 <거의 모든 장면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개연성이라곤 오직 남주의 잘생김과 여주의 착함으로 만들어진 그런 소설>이라고 할 만큼 냉정한 평가를 보여준다. 리플리는 그중 악녀도 아닌 여주도 아닌 여주 친구도 아닌 대사 없는 엑스트라였다.

처음 빙의된 리플리는 낙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이 완결 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으며 주어진 백작 영애의 삶을 마음껏 즐기기로 한다. 그동안 현실의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현실과 이곳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 점이 기시감이 든다. 당장 우리가 빙의된다고 한다면 주어진 가상현실을 즐기기보다 현실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길 마련인데 리플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가족이나 친구를 그리워하는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추후에 밝혀지길 리플리는 전형적인 빙의자의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의 남자 친구를 빼앗았다고 소문나버린 돌아가고 싶지 않은 현실. 그렇기에 빙의된 세계에서 낙관적으로 지낼 수 있었던 건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리플리의 이름과 동일한 리플리 증후군은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 행동을 상습적으로 하는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이르는 말이다. 작품에서는 이 리플리 증후군을 재밌는 관점으로 풀어나간다. 결말로 나아가며 리플리는 끝없이 이 세계가 "허구의 세계"일까 봐 두려워하게 된다. 엔딩을 맞이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던 초반과는 다르게 남자 주인공인 제로니스와 결혼식을 올리고 또 다른 엔딩을 맞이하면 이 세계가 멸망할까 봐 걱정한다. 그리고 이런 걱정은 진짜 리플리를 대면하며 해소된다.





<엔서주 : 엔딩 후 서브남을 주웠다>의 피오니에는 이야기가 엔딩을 맞이한 후 옆 나라 공주로 빙의한다. <남첫가>와 다르게 엔딩이 이미 나와있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계기나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피오니에는 침착하고 낙관적이다. 자신의 최애를 만날 수 있고 위로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을 느끼며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있다.


<남첫가>의 리플리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전환점이 있어 그걸 기다리고 있던 중이지만 <엔서주>의 피오니에는 왜 빙의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거부하지 않았을까? 우선 기본적으로 빙의자들이 누리는 혜택인 부, 미모, 가족을 가졌기에 현실이 더 나아서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는 1차원적인 문제를 회피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엔서주>는 "최애"라는 존재로 피오니에가 이곳을 선택할 수밖에 만든다. 덕질과 덕후가 대중화된 요즘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기에 독자들은 피오니에의 행동-현실을 걱정하지 않는 모습-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도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엔서주>는 초반부에 빙의물 독자들이 가지는 찜찜함인 "원래 주인공의 존재"에 대해 짚고 넘어간다. 몸이 병약했던 진짜 피오니에는 1년 전 이미 죽었으며, 빙의된 피오니에는 나 대신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진짜 피오니에의 부탁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이를 통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아 남의 것을 대신 누리고 있다는 일종의 죄악감을 해소시킨다. 주인공의 인증을 받은 합당한 삶인 것이다. 그래서 피오니에가 최애인 리히트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건 그 누구의 반감도 사지 않으며 독자들도 민폐나 대책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빙의된 이 현실에서 피오니에의 역할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니까.



주인공과 빙의자의 갈등


<남첫가>와 <엔서주> 모두 빙의의 근본을 마지막 관문으로 삼고 있다. <남첫가>의 경우 엔딩을 맞이한 후 파멸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해 걱정해 엔딩을 피하려 하고, <엔서주>의 경우 죽은 줄 알았던 피오니에가 리히트 때문에 자꾸 위험에 빠지게 되는 자신의 몸을 걱정해 빙의자를 없애버리려 한다. 엔딩이 나지 않은 세계에서는 전환점으로 삼았던 소설의 엔딩이, 주인공이 빙의를 허락한 곳에서는 빙의자의 박탈이 주 갈등이 된다. 두 작품 모두 "진짜 주인공"과 "빙의자"의 대면을 끝으로 갈등을 해소한다.


<남첫가>는 엔딩을 맞이한 리플리는 진짜 리플리와 대면한다. 악녀 로제의 만행으로 의식을 잃은 리플리는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데, 바로 리플리와 자신이 몸이 바뀐 이유가 리플리가 건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의 위치는 약탈자에서 저주에 걸린 피해자로-굳이 따지자면-전환된다.


독자들이 언뜻 보기에 손해를 입은 쪽은 진짜 리플리이다. 빙의된 리플리는 그곳에서 백작 영애이고, 소중한 친구도, 사랑하는 연인도 있기에 시궁창 같은 현실보다 나아 보인다. 게다가 독자들이 현실에 산다는 점에서 빙의된 리플리의 삶은 더욱 이상적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리플리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한 사람과 평생을 제주도에서 살아온 사람이 생각하는 제주도가 다른 것처럼 독자들이 보지 못했던 그 세계의 단점에 대해 줄줄이 읊어준다. 백작 영애라는 지위만큼 무거웠던 의무나 행동들. 현실에서 진짜 리플리는 자신을 억압했던 상황-백작 영애-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소설이라 가지고 있었던 세계의 한계,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세계를 버리고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현실에 만족한다. 그렇기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독자들이 보지는 못했지만 리플리가 빙의된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나간 것처럼 진짜 리플리도 이곳을 선택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원한 저주를 걸고, 이야기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절대 만날 수 없는 세계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태어난 세계와 이치와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선택했기에.


<엔서주>의 피오니에는 오로지 행복만을 추구하다가 여러 번 생명을 위협당하게 된다. 그걸 보다 못한 진짜 피오니에가 나타나 경고를 선언한다. 파혼하고 가르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다른 영혼으로 교체하겠다고. 진짜 피오니에가 빙의의 결정권까지 가졌다는 점에서 이 경고는 꽤 위협적이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라고 몸을 넘겨줬더니 알아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피오니에에게 화가 난 진짜 피오니에의 심정도, 사랑하는 사람과 있고 싶었지만 위험에 휘말리게 된 피오니에도, 모두 이해할 수 있기에 독자들도 어느 쪽이 잘못됐다고 쉬이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피오니에는 또다시 위험에 빠지고 다시 한번 진짜 피오니에에게 불려 간다. 진짜 피오니에는 빙의된 피오니에에게 "진짜 나라도 된 줄 알았냐며 가짜 주제에 말을 듣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진짜 피오니에가 권력을 가진 이상 빙의자와 몸의 주인이 일종의 갑을 관계처럼 형성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진짜 피오니에가 바라는 건 도대체 누구의 행복이었을까? 죽은 자신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고 가족들을 위해서 자신이 가짜로 살아있게 하는 것도 어떻게 본다면 가짜 행복에 불과하다. 왜 피오니에는 영혼을 불러서 자신에게 빙의시킨 걸까?

진짜 피오니에는 죽은 뒤 피오니에가 자기 대신 살아가는 것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병약하고 조용했던 자신과 다르게 활발한 피오니에를 보며 박탈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신보다 지금의 피오니에를 좋아하는 것 같은 오빠들을 보며 느낀 질투와 부러움, 피오니에게 느끼는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 아닌 것에 대한 시기.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며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까. 이런 감정은 열등감으로 이어지길 마련이지만 진짜 피오니에는 피오니에를 응원하길 선택했다. 자신이 없어도 된다는 약간의 허탈감에서 비롯됐을지는 모르지만 자신과 분리해 피오니에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진짜 피오니에가 바랐던 것은 "자신"의 행복이었다. 몸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진짜 피오니에와 했던 약속을 어겨가면서까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나가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피오니에가 바로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걸 확인한 진짜 피오니에는 작별을 선언하고 떠난다.



빙의물 속 진짜 주인공


독자들은 시점을 전개해나가는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진짜 주인공을 방해물이나 걸림돌처럼 치부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 만족하고 있기에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으니까. 이미 주인공이 돌아오기에는 너무 많은 게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남첫가>와 <엔서주>주인공을 바라보는 방식은 특별하다.


진짜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를 찾았고,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으로 이 세계를 내어줘야 하는 쪽이다. 세계를 받아들이는 쪽은 오로지 소설의 줄거리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뒤바뀐 세계에 금방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진다. 그것만으로도 최고의 엔딩을 만들어내는 걸 보면 어디서도 잘 살 사람들이다.

빙의물이라는 건 흔하고도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진짜 리플리는 백작 영애가 아닌 자신의 존재를 봐주고,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행복을 찾았고, 진짜 피오니에는 떠나야만 하는 순간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넘겨준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찾았다.


주인공과 빙의자의 대면은 빙의물에서 반드시 맞이해야만 하는 장면이기에 진짜 주인공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독자들이 보지 못했던 삶이라 더욱 응원하게 되며 주인공의 행복을 침범하지 않았고 그들의 삶을 내줬다는 점에서 감사함마저 느끼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걸 탐내지 않았고 빙의자가 만든 행복이 자신이 가져야 하는 행복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진짜 주인공이 빙의자에게 현실에서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배경을 제공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빙의자들이 빙의된 세계에서 살아가며 사건을 해결하고 사랑을 이루어가는 동안, 진짜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단순히 현실에서 도망쳐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삶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것.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끝없이 고민하는 것. 이게 바로 독자들이 빙의물에게 빠진 이유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성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