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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Feb 23. 2022

'여'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성장

관계로 인해 완성되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람이 이 사람과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게 보편적이다. 정작 삶을 살아가는 건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언제부터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에 익숙해진걸까? 해당 작품의 작가인 기맹기님은 후기에서 줄곧 말했다. 이 작품에서는 남자주인공은 없고, 주인공은 천리사 한 명뿐이라고. 천리사의 남자 주인공이 누구일까, 궁금했던 때가 떠올랐다. 나도 당연하게 '남자 주인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우리는 홀로 태어났으며 홀로 떠난다. 삶의 과정에서는 함께일 때가 있겠지만 결국 나라는 사람은 개인으로 구성된다. 홀로서기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결국, 혼자서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에 익숙한 건 로맨스물에 주로 적합하다. 물론 로맨스물에서도 '남자인' 주인공과 '여자인' 주인공만 등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는 대체로 완벽한 연애의 대상을 갈구한다. 사람의 인생에서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칼처럼 나뉘어지고,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은 아님에도 말이다. 이야기 속 인물에게는 변하지 않는 대상이 있을거라 무의식 중에 믿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기로 유명한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명이거든.'


이 웹툰에서도 끊임없이 유미의 생각, 가치관, 관념, 행동들이 언급되지만 사람들은 유미의 '남자주인공'을 찾기에 바쁘다. 물론 로맨스물이니 상대가 궁금한 건 당연하지만 주시해야할 건 로맨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인물의 성장이다.

<여주실격!>은 그런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어쩌면 우리의 삶과도 비슷하다. 로맨스는 간간히 섞여있지만 나의 삶에 있어서 주류는 아니고 그것보다도 해나가야하는, 중요한 일들이 더 많다. 천리사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천리사는 어쩌면 최전선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천리사


마약사범으로 연예계를 은퇴한 천리사는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부터 해왔던 게 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기에 대한 애착은 드러나지 않는다. 천리사가 애착을 느끼는 건 오로지 '엄마와의 추억'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했던 추억이 담겨있는 집을 지키고 싶어한다. 이게 바로 <여주실격!>의 시작이다.


작품 내내 엄마에 대한 천리사의 사랑이 강렬하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도 그럴게 천리사는 어릴 적부터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천리사에게 존재하는 관계는 엄마뿐이었다. 결국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천리사에게 남은 건 연기이다. 애착도 없던 배우라는 길을, 천리사는 왜 가게 된 걸까?




천리사에게 연기의 의미


천리사는 중간중간 엄마에 대한 환각 증세를 보인다. 천리사에게 연기를 계속 한다는 건 일종의 트라우마와 계속 직면하는 상황인 셈이다. 엄마를 속상하게 하면 안된다. 최고의 배우가 되어야한다. 천리사는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한채 세뇌되어가고 있었다. 아역배우라는 건 완전히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니고, 결국 누군가의 의지로 시작해야하는 길이었고 천리사가 연기를 시작한 계기도, 계속 하는 계기도 모두 엄마 때문인 것이다.


천리사는 스캔들과 마약 사건이 터진 후 은퇴를 선언하며 말한다. 배우 같은 거 처음부터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천리사의 진심이기도 하지만 진심이 아니기도 하다. 천리사는 연기에 즐거움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지만 이 일을 꾸준히 이어나가야할 원동력이 부족한 상태다. 어떤 일을 해내야겠다는 마음이 강해도, 부조리한 상황과 비난 아래에서는 그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인데 그런 원동력도 없는 천리사가 온 세상의 적이 된 상황을 견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연기를 함으로써 생기게 되는 부가적인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게 싫어서 연예계를 떠나겠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천리사에게 연기란 무엇일까?



연기는 운명이었다. 작중에서도 천리사는 그렇게 말한다. 천리사에게 있어서 연기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결국 자신이 해야하는, 사랑해마지 않는 일인 셈이다. 또 천리사는 자신이 연기를 잘하는 걸 즐겼다. 이것도 연기를 계속 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연기에 대한 자화자찬은 작중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백기 이후 처음으로 연기를 했을 때도 '내가...연기를 못한다는 소리를 듣다니. 이 내가? 천리사가? 나....천리사인데?'' 하고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뛰어난 연기 실력은 천리사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천리사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우선 계기와 애정이 부족하니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실력까지 출중하니 노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타인의 고통을 성장을 위한 사건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약사범으로 연예계를 은퇴한 게 천리사에게는 전환점이 된 건 틀림없다. 그 결과 완전히 연기를 쉬게 되었고, 몇 년이 지나서야 돈 때문에 연예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대중의 괴롭힘에 죽어가고 연기를 피했던 천리사는 자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연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술에 의존해 연기를 하는 것도 한 두번뿐이었고 천리사에게는 이런 일을 상담할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의 등장


하지만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조력자'가 존재한다. 천리사에게도 당연히 조력자가 있다. 보호자의 위치로 들어설 수 있는 드라마 감독, 공명인이었다. 공명인은 천리사의 엄마인 천수국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천리사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이다. 여기서도 주목할만한 점은 공명인이 직접적인 도움은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명인은 그저 천리사가 노력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 안에서 천리사는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연기 천재라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지키기 위해서 시작했지만 처음으로 스스로 노력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공명인은 말그대로 기회를 제공한 것뿐이고, 천리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조력자는 언제나 주인공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주인공이 필요한 정도로만 도움을 준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천리사가 '성장이 준비된 주인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회와 계기라는 도움 하나만으로도 좋은 성장의 발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성장물에서는 라이벌과 제자 역시 등장한다. 자신의 역할을 탐내는 마하경과 연기로 전향하려는 아이돌 제야이다.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한계를 단정지었다는 점이다. 마하경은 '고작 얼굴 좀 예쁠뿐인 셀럽'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제야는 '연기를 못한다'는 평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노력은 하겠지만 난 어차피 이 정도다, 하고 자신의 한계를 이미 만들어버린 것이다. 한계를 만들어놓으면 욕심은 생길 수 없다. 욕심이 없으면 발전할 수 없다. 자신의 실력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며 어떤 성장의 기회도 기회로 여기지 않는다.


천리사는 이 둘에게 노력할 계기가 되어준다. 어떤 계기를 제공한다기보다 천리사 자체가 계기가 된다. 마하경은 천리사를 질투했고 천리사를 이기고 싶어서 연기 공부를 한다. 제야는 천수국의 도움으로 연예계의 첫 발을 딛고, 천리사를 보고 연기를 그만뒀고, 결국 천리사에게 연기를 배운다.




이런 관계가 진전되면서 이 둘은 연기자로서 성장하게 된다. 천리사에게는 없었던, 연기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그와 동시에 천리사도 연기에 진심으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전까지는 하면 재밌네 정도의 차원에서 느끼는 재미였다면 이제는 재미있어서 하고 싶은 정도가 된 것이다. 천리사는 연기를 할 때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고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서 더 연기에 몰입하고 싶어지고 더 잘하고 싶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게 성장의 발판이 되자 자신 또한 더 깊이 성장할 수 있게 됐다.





주인공의 마지막 역경


고난과 역경을 맞이하고 천리사는 다시 한번 연기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연기를 처음 포기했던 그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천리사를 향한 세상의 말과 눈초리가 가득하던 때. 그 때 입었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연예계로 돌아왔던 천리사는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숨어버리고 만다. 마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과 다른 게 있다면 이제는 천리사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천리사의 조력자들은 아주 작은 계기만을 만들어준다. 시상식에서 공명인과 제야는 '배우 천리사'의 존재에 이야기한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 말들에서 천리사는 배우로서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 않는 순간들을 떠올리고는 자신은 배우로 활동하고 싶다는 걸 깨닫는다.


복귀 후 연기를 처음으로 해낸 순간도, 마하경과 부딪히며 성장하던 순간도, 제야를 가르치던 순간도 모두 배우 천리사가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시상식에 체육복 차림으로 뛰어든 천리사는 언제나 거짓만을 말해왔던 대중들의 앞에서 연기에 대한 진심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천리사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천리사의 성장이 우리에게 와닿는 이유


이 작품에서 나는 성장이라는 키워드 덕분에 스포츠물과 비슷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연예계물에서 이렇게까지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를 만난 적이 있었나? 단 한번도 없었다. 천리사는 이전에 없던 캐릭터인 건 확실하다. 그럼에도 우리와 가장 맞닿아있는 캐릭터이다.


첫사랑과 헤어져서 세상이 무너질 것 같지만 현실은 무너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일때는 제대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 잘하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아도 해야했다. 좋아하게 됐을 때는 기쁘고 다른 사람이 칭찬해주면 뿌듯하다. 무서울 때는 도망갔다가도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할 때가 있다. 간간히 설레는 일들도 있다.



사실 우리 인생은 하나에만 달려서 움직이지 않고 수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움직이는 것처럼 크고 작은 일들에 부딪혀서 움직인다. 하나의 일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게 놀라울 정도로 정신없이 굴러간다. 그 안에서 성장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자주인공이 누구든 간에 주인공은 천리사의 성장을 더욱 응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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