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꿈꾸며, 방 안의 고립을 선택하다
9편에서 산티아고를 가겠노라 호기롭게 선언했지만,
나의 현실은 여전히 침대 위,
혹은 사방이 막힌 거실 안이다.
화면 속 순례자들은 거침없이 대지를 딛고 서지만,
나는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웃의 발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사람이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시선과
그 입에서 나올 화살 같은 말들이 두렵다.
8편에서 마주했던 그 추악한 위선들이
내 영혼에 새겨놓은 흉터는 생각보다 깊었다.
시장바닥 같은 세상을 뒤엎고 나왔지만,
정작 나는 그 소란으로부터 도망쳐
나만의 감옥을 만든 셈이다.
산티아고에 가려면 운동화 끈을 묶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집 앞 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것이
피레네산맥을 넘는 것보다 더 높은 산처럼 느껴진다.
일부러 운동화를 신고 나갈 용기는
아직 내게 없다.
그나마 나를 세상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은 강아지 산책이다.
녀석의 간절한 눈빛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다.
마지못해 집을 나설 때도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봐 땅바닥만 보고 걷는 나의 산책은
'운동'이라기보다 '도망'에 가깝다.
사람이 없는 새벽이나 늦은 밤,
강아지와 함께 걷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런 겁쟁이가 정말 800km를 걸을 수 있을까?'
'현관문 하나 여는 게 이렇게 힘든데,
스페인의 그 낯선 길 위에 설 수나 있을까?'
우습게도, 이 깊은 고립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다시 '산티아고 영상'이다.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내가,
지구 반대편의 길을 무한 반복하며 본다.
그것은 망상이자, 동시에 생존을 위한 산소 호흡기다.
지금의 나는 광야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나가기 위해 방 안에서 떨고 있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주님은 이런 나의 비겁함도 알고 계실까.
밖으로 나가지 못해 거실을 서성이는 이 초라한 발걸음도,
언젠가 그 길 위에 닿기 위한 예비 연습이라 불러주실까.
나는 오늘 산티아고행 비행기 표 대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당당하게
강아지와 산책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현관문을 여는 그 짧은 순간의 공포를 이겨내는 것.
그것이 현재 나의 가장 처절한 순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