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광야에서 길을 묻다, 산티아고라는 지도

50대의 끝자락, 겁쟁이가 꿈꾸는 생애 첫 '나만의 속도'

by 소프트스토리룸

8편에서 고백했듯,

나는 내 안의 강도 소굴이 되어버린 가짜 성전을

뒤엎고 광야로 나왔다.

마태복음 21장 말씀처럼,

내 잇속만 챙기려던 위선의 상(床)들을

둘러엎듯 껍데기들을 걷어냈다.

하지만 광야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다.

등 뒤의 성문은 닫혔고,

내 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길이 펼쳐져 있다.

이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주님,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아니, 나는 누구로서 걸어야 합니까?"

그 막막한 광야 한복판에서,

50대의 끝자락에 선 내 심장이 툭 던져올린 낯선 이름 하나가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요즘 나의 일과는 유튜브 창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검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누군가 찍어 올린 노란 화살표를 눈으로 쫓고,

화면 속 낯선 이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나도 함께 그 길을 걷는다.

인생의 수첩에는 평생 내 이름보다 타인의 이름표가

더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며느리, 형수, 아내, 그리고 엄마.

반평생이 넘는 세월은 그 이름표들을 지탱하느라 분주했고,

정작 '나'라는 주어는 문장 뒤편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교회 안에서도 나는 늘 '사역자의 아내'라는

제복을 입고 타인의 시선에 맞춰 걸었다.

그런 내가,

이제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오직 '나의 속도'로만 걷고 싶어진 것이다.

다가올 60대를 맞이하기 전,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선물로

'길 위의 시간'을 선택하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죽도록 무서워하는 겁쟁이다.

800km를 버텨낼 체력도,

당장 비행기 표를 끊을 넉넉한 여유 자금도 없다.

화면 속 순례자들의 퉁퉁 부은 발을 볼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나이에 무슨 고생을 사서 하느냐며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다.

안 되는 이유를 백 가지 넘게 나열하면서도,

유튜브 영상을 끄지 못하는 내 심장은

20대 소녀처럼 뛰고 있다.

8편에서 마주했던 그 추악한 위선들이

내 영혼을 더 이상 갉아먹게 두지 않으려면,

나는 이 거룩한 모험에 나를 던져야만 한다.

돈도 없고 기운도 없지만,

'진짜 나'를 만나고 싶다는 영혼의 갈증이

나를 자꾸 그 길로 밀어 넣는다.


이 길 끝에서 나는 누구를 만나게 될까.

겹겹이 쌓인 이름표와 낡은 신앙의 외투를

다 벗어 던지고 남은,

아주 낯설고 초라한 '인간'으로 마주할 용기가 내게 있을까?

계획이라기엔 너무 허술하고,

꿈이라기엔 너무 무모한 이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 정말 그 길 끝에 닿을 수 있을까?

아니,

그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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