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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비 Oct 05. 2021

당신의 잔인한 한미녀 사용법

서사없는 여성 캐릭터의 허약함에 대하여


이 시대에 딸을 키운다는 걱정은 전시대에 딸을 키우던 부모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신체와 정신의 안전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자라면서 겪었던 은근한 추행과 희롱들, 그로 인한 공포와 수치심 같은 것을 내 딸도 경험하며 자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큰 두려움이다.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신도 마찬가지로 걱정이 된다며 “죽여버리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상의 가해자를. 그에겐 여성의 안전이 참 단순한 문제다. 가해자가 있으면 보복하겠다, 는 게 그의 입장의 요약이자 전부이다.


반면 평생을 여자로 살았던 나에게 이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직접적인 범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론 사회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각종 편견들을 바로잡고 존중을 얻어내는 것이, 성범죄의 가해자를 거세하거나 목숨을 빼앗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본다.


미디어에서 손쉽게 소비되어지는 여성의 모습은 그래서 문제가 된다. 빌런마저 멋있게 포장해주는 남자의 악역과는 달리, 질투에 휩싸인 여적여라던지, 자신의 성을 무기로 삼아 남자를 장악하려는 여자들의 캐릭터를 어떤 포장도 없이 “여자들 원래 그러지 않음?ㅋㅋ”로 갈음하는 캐릭터들을 볼 때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렇다. <오징어 게임>의 한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지구에 인구가 60억이니 한미녀같은 여자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보는 내내 그녀가 불편했던 것은, 작중 캐릭터에 담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드러났으나 그 의도에 전혀 설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극한 상황이 되면 이런 일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상상으로 한미녀를 기획했다는 감독의 인터뷰에서 그가 말하는 ‘이런 일’이라는 게, 인간으로서나 여자로서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깜빡이 없는 악다구니와 오버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보편적 상식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캐릭터를 등장시켰으면, 그런 별난 인간이 된 배경이라도 설명해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과거에 대한 서사는 없다. 감독은 ‘이런 여자들, 말 안 해도 알지?’ 하고 관객들에게 윙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할 만한 여자를 실제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현실의 여자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거기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 의 속담과 함께 선사하는 논개적 결말은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걸 복수라고 할 수 있나? 도대체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하고 아득해질 뿐이다.


감독은 한미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 마초적 판타지 속 등장하는 여성의 한 전형이자 스토리에 필요한 자극적 양념으로 소비했다. 그녀는 무리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섹스를 하는 역할로써 존재한다. 당뇨로 발이 썩어가는 어머니의 쌈짓돈을 훔쳐 도박을 하는 파렴치한을 마음만은 착한 녀석이 세상을 잘못 만났다며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대비된다. 미디어에서 표현되는 이러한 전형성은 대중들에게 소리 없이 파고들어 현실 속에서도 왜곡된 편견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그 편견이 ‘성’과 결부된다면 더욱 위험하다. (관련 기사 “섹스를 협상 카드로 쓰는 여자? '오징어 게임'의 위험한 서사” https://hankookilbo.com/News/Read/A2021092917050002449?1633136400240 )​


성별을 바꾸어 생각하면 문제의 이상함이 좀 더 잘 드러난다. 당신은 노상에서 나물 파는 병든 어머니의 쌈짓돈을 훔쳐 도박에 탕진하고, 자식 양육에 무책임한 여성이 ‘알고 보면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옹호받는 영화를 단 한 편이라도 본 적 있는가? 혹은,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몸집이 좋고 힘이 센 남성에게 원치 않는 성상납을 하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남성은 어떠한가? 너무나 끔찍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왜 여자들에겐 이런 상황이 훨씬 더 가벼운 이야기로 소비되는가?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에게서 성적 공포를 느끼며 산다. 그게 현실이다. 여러 평론가들이 여러 매체에서 언급했듯, 위급한 상황에서 남자에게 성을 매개로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여자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서사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원하는 자의 망상일 뿐이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미디어에서 거리낌 없이 다루어져도 좋은 오락의 소재가 될 수는 없다. 거기다 극 중 그녀의 행동들에 대해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여자에 대한 뿌리 깊은 무지라고 본다.


오락영화니까, 가볍게 웃고 넘어가도 된다. 전시대에 유행했던 배틀로얄이나 아포칼립스 관련 오락물들을 이것저것 가져다가 곱게 기워 한복으로 지은 듯한 영화다. 멋있다고, 재밌는 작품이라고 웃고 지나쳐도 된다. 모든 미디어가 완전무결한 도덕적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미디어를 통해 손쉽게 이야기되어지는 ‘보편적 정서’라는 것이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오히려 위험한 편견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당신의 농담은 하는 사람만큼이나 듣는 사람도 재밌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딸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보다 더 안전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나는 나의 딸이 구시대가 씌워놓은 프레임 안에서 자기 검열의 칼날을 스스로에게 겨누기보다는, 자신의 성인권을 편안히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면 한다. 이 것이 너무 큰 욕심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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