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와 넷플릭스가 합작한 시리즈 <우먼 오브 더 데드>는 한 편의 잘 짜인 ‘복수 스릴러’를 넘어 , 알프스의 눈부신 설경 속 모든 것이 순수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목가적 풍경’이라는 기만적인 가면 뒤에 숨겨진 현대 유럽 사회의 병리적 심연과 완벽한 파멸을 해부합니다. 베른하르트 아이히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시리즈는 ‘장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한 여성이 남편의 죽음을 둘러싼 추악한 진실을 파헤치며 거대한 악의 카르텔과 맞서는 과정을 그립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포스트 #MeToo 시대’의 첨예한 문제의식, 이른바 ‘알파인 누아르’라 불리는 그림 같은 풍경 뒤에 도사린 폐쇄적 공동체의 부패, 그리고 ‘이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시스템적 폭력을 정교하게 교직하며 동시대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응시하게 만들죠.
한 여성 복수자의 고독한 진화
죽음과의 동거: 직업이 곧 무기가 될 때
<우먼 오브 더 데드>에서 주인공 ‘블룸’의 직업은 장의사입니다. 여기서 ‘장의사’라는 직업은 그녀의 존재론적 조건이자 복수를 완성하는 가장 강력하고 섬뜩한 무기가 됩니다. 그녀는 매일 마주하는 죽음을 통해 삶의 가장 잔혹한 진실을 대면하고, 그 지식으로 자신을 무장합니다.
죽음과의 일상은 그녀에게 비범한 심리적 갑옷을 입혔습니다. 매일 시신을 닦고, 부서진 육체를 복원하는 일은 그녀에게서 평범한 감정의 동요를 앗아갔죠. 어린 시절, 징벌처럼 관 속에 갇혀야 했던 끔찍한 트라우마는 역설적으로 그녀를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깊숙이 각인된 생존 기제는 남편의 죽음과 함께 잠들어 있던 그녀 안의 괴물을 깨우는 방아쇠가 됩니다.
또한, 그녀의 작업 공간은 복수를 위한 완벽한 성채가 됩니다. 해부학적 지식, 방부 처리용 화학 약품, 증거를 소멸시킬 수 있는 공간과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영안실까지. 그녀는 자신의 일터를 심문과 처단의 장소로, 장의 기술을 복수의 흔적을 지우는 예술로 변모시키죠. ‘장의사’라는 직업은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그녀의 전쟁을 위한 가장 완벽한 위장막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죽은 자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녀의 고독한 투쟁을 비추는 정교한 서사 장치가 됩니다. 이는 초자연적 현상이 아닌, 산 자들의 세계에서 완전히 배신당한 그녀가 자신의 양심과 직관, 트라우마와 벌이는 처절한 내면의 대화입니다. 남편 ‘마크’라는 유일한 도덕적 닻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 죽은 자들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정의감을 일깨우고 복수의 정당성을 속삭이는 침묵의 조언자가 됩니다. 이렇듯 블룸의 트라우마와 직업, 그리고 복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운명적 고리로 연결되어, 그녀의 복수를 선택이 아닌 필연으로 각인시킵니다.
사적 슬픔이 시대의 분노로 번져갈 때
블룸의 여정은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개인적 비탄에서 시작하여 , 썩어빠진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정치적 분노로 확장됩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단서들을 따라가며, 그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닌, 거만하고 특권에 찬 남성들로 이뤄진 악의 카르텔에 의한 계획된 살해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순간, 그녀의 복수는 한 남자를 위한 복수를 넘어, 수십 년간 이어진 착취와 학대의 희생자들을 위한 심판으로 승화됩니다.
물론 <밀레니엄>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나 <킬 빌>의 브라이드처럼, 블룸 역시 강력한 여성 복수자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두 아이의 ‘어머니’라는, 그녀의 복수를 더욱 복합적이고 절실하게 만드는 정체성이 존재합니다. 그녀의 폭력은 파괴를 향한 공허한 질주가 아니라, 남겨진 아이들의 세계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방어 본능과 연결됩니다.
#MeToo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쓴 후 등장한 이 시리즈에서 , 한 여성이 견고한 남성 권력 시스템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하는 서사는 제도적 정의에 절망한 시대에 더없이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전기충격기를 든 그녀의 모습은 억압받아온 여성들의 응축된 분노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시대적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어머니와 괴물, 그 위태로운 경계에서
<우먼 오브 더 데드>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손쉽게 허물어뜨리는 데 있습니다. 시리즈가 전개되면서 우리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자상한 어머니’인 동시에 ‘자경단원 사이코패스’라 불릴 만큼 잔혹한 살인마인 주인공을, 우리는 과연 지지할 수 있는가?
시즌 2에서 서사의 중심이 블룸의 복수로 인해 납치된 딸을 구출하는 것으로 이동하는 것은 이 도덕적 딜레마를 더욱 깊이 파고드는 영리한 장치입니다. 그녀의 모든 폭력적 행위는 자식을 지키려는 원초적인 모성애에 뿌리내리게 되고, 이는 시청자들이 그녀의 행동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그 정당성을 수긍하게 만듭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동기는 그녀의 잔혹함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그녀가 겪는 고통의 무게를 증폭시키며 용기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조종하는 변태적인 비밀 권력 집단이라는 설정은 자칫 음모론적 서사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리즈는 ‘여성혐오’와 ‘외국인 혐오’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 비판 위에 음모의 토대를 세움으로써 이 함정을 피해 갑니다. 무엇보다 시리즈는 블룸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무게에 짓눌리고 내면의 괴물과 끊임없이 싸우는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희생자들의 환영과 대화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을 고통스럽게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이 복수가 결코 영웅적인 서사가 아님을 증명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타락한 목가(牧歌)적 풍경의 미학
부패의 은신처가 된 낙원
<우먼 오브 더 데드>는 ‘알파인 누아르’라는 장르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이 장르의 핵심은 숭고하리만치 아름다운 산악 풍경과 그 속에 고립된 공동체의 추악한 비밀 사이의 극명한 대조에 있죠.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눈이 녹아내려 땅의 흉터가 드러나는 황량한 간절기를 배경으로 선택합니다. 이 미학적 결정은 단순한 배경 설정을 넘어, 마을 엘리트들의 썩어빠진 내면과 도덕적 부패를 풍경 그 자체에 투영하도록 만듭니다. 관광엽서의 완벽한 이미지를 벗겨내자, 가혹하고 용서 없는 현실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죠.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스키 리조트 ‘퀴타이’의 물리적 고립감은 그 자체로 음모가 자라나기에 최적의 배양토가 됩니다. 중앙 권력의 감시가 닿지 않는 폐쇄된 세계에서, 지역 유력자들은 스스로 법이 되어 군림합니다. 한때 순수와 치유의 공간이었을 아름다운 자연은 이제 추악한 비밀을 은폐하는 거대한 장막이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으로 전락합니다. 이는 ‘그림 같은 티롤’이라는, 오스트리아가 국가적으로 내세우는 관광 이미지를 정면으로 전복시키는 행위이며 , 국가가 투사하는 목가적 이미지가 실은 썩어가는 현실을 감추기 위한 파사드일 수 있다는 정치적 발언이기도 합니다.
오감으로 체감하는 공포의 언어
시리즈는 특유의 네오-누아르 분위기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영화적 장치를 정교하게 조율합니다. 채도를 낮춘 차가운 색감, 인물을 압도하는 광활한 산의 풍경과 숨 막히는 실내의 클로즈업을 넘나드는 촬영은 시각적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특히 결정적 순간까지 교묘하게 정보를 숨기고 드러내는 카메라 워크는 서스펜스를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여기에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가미된 미니멀한 배경 음악은 고대의 자연과 현대적 불안감의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잊히지 않는 잔상을 남기고 , 폭력의 질감과 산의 침묵을 극대화하는 사운드 디자인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서사가 되어 시청자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파고듭니다.
지옥을 향한 끝없는 질주
블룸이 남편의 두카티 오토바이를 타고 외츠탈 빙하 도로의 굽이진 길을 질주하는 이미지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시각적 은유입니다. 표면적으로 이 질주는 자유와 해방, 그리고 남성성의 상징이었던 오토바이를 전유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에 맞서는 통쾌함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이 끝없이 반복되는 스위치백 도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폭력과 트라우마의 굴레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녀가 아무리 속도를 내도 길은 출구로 이어지지 않고, 오직 같은 부패한 공동체의 더 깊은 심장부로 그녀를 이끌 뿐입니다.
유럽의 심장, 여성과 이방인을 삼키는 구멍
‘타자’를 사냥하는 사회
시리즈의 진정한 공포는 개별 악당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들의 폭력을 가능하게 하고 묵인하는 사회 구조 자체에 있습니다. 동물 가면을 쓴 유력자들이 이주 여성을 사냥하고 고문하는 끔찍한 설정은, 현대 유럽 사회가 ‘타자’를 어떻게 비인간화하고 소모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알레고리입니다.
희생자들은 모두 ‘둔야’처럼 공동체 외부에서 온 난민과 이주민 여성들입니다. 그들의 실종은 제대로 수사되지 않고, 그들의 생명은 소모품처럼 취급되죠. 가해자들이 이토록 대담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희생자가 바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주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피해자가 지역 오스트리아 여성이었다면 결코 벌어질 수 없었을 범죄라는 사실은 , 희생자의 소외된 지위 자체가 음모를 가능케 한 전제 조건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외국인 혐오’가 단순히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 처벌받지 않고 번성하게 만드는 사회적 토양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동물 가면’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희생자를 사냥감으로 전락시킨 야만성을 상징합니다.
허구에 들러붙은 현실
이 허구적 서사가 얼마나 끔찍한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지는, 실제 통계 수치가 명징하게 증언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이주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으며 여성 폭력 방지를 위한 국가적 조치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2023년 기준, 오스트리아의 인구 백만 명당 인신매매 피해자 수는 47명으로 EU 평균(24명)을 압도적으로 상회하며 최고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EU 전체적으로 피해자의 대다수가 비 EU 시민권자인 여성이라는 사실 역시, 드라마 속 이주 여성 착취가 현실에 기반한 시나리오임을 뒷받침합니다. <우먼 오브 더 데드>가 창조한 허구의 공포는 실재하는 위기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죠.
시스템 전체가 공범일 때
<우먼 오브 더 데드>가 고발하는 것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의 총체적이고 완전한 실패입니다. 악의 카르텔은 경찰, 사제, 지역 사업가 등 공동체의 기둥을 떠받드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법과 종교, 경제 등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제도가 뿌리부터 썩었음을 의미하죠.
유일하게 정의의 편이었던 경찰이자 블룸의 남편이었던 마크는 바로 그 시스템 내부에서 부패를 고발하려 했기 때문에 살해당합니다. 그의 죽음은 시스템이 자정 능력을 완벽히 상실했음을 증명하죠. 이는 블룸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녀의 복수는 사적 원한을 푸는 행위를 넘어, 붕괴된 정의의 폐허 위에 자신만의 법을 세우려는 필사적인 투쟁이 되는 것이죠.
불완전한 복수
<우먼 오브 더 데드>는 한 여성의 복수 서사를 넘어, 장르 미학의 정수를 펼치며 복합적인 페미니즘과 동시대 유럽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고발장으로 기능합니다.
블룸의 피로 얼룩진 승리가 안겨주는 카타르시스는 짧고 모호합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 일부를 파괴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맞서 싸운 거대한 시스템은 약간의 균열만 갔을 뿐 여전히 건재하며, 이 모든 비극을 낳았던 사회 구조 역시 그대로입니다. 시즌 2의 마지막, 또다시 죽음의 문턱에 선 그녀의 모습은, 과거의 악몽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어쩌면 이 시리즈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이 서늘하고 불완전한 잔상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수의 통쾌함을 선사하면서도, 결코 값싼 위로나 희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판타지를 훨씬 더 어두운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림으로써, <우먼 오브 더 데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화면 속 허구적 공포가,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과 얼마나 섬뜩하게 가까이 있는지를. 그렇게 이 작품은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던 누아르의 시선을 목가적인 공동체의 썩어가는 심장부로 옮겨왔으며, ‘복수하는 어머니’를 가장 강력하고 복합적인 현대의 원형으로 세우며 장르의 역사를 한 단계 더 진화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