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징어 게임>의 논쟁적 피날레: 누가 진짜 승자인가?

사람은 고귀하지만,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오징어 게임> 시즌3

by 조하나


조하나의 아일랜드 ▶️팟캐스트로 듣기






2025년 6월, 마침내 베일을 벗은 <오징어 게임>의 피날레는 전 세계를 극명하게 양분시켰습니다. 비평가들의 복합적인 찬사와 시리즈를 뜨겁게 사랑했던 시청자들의 압도적인 실망. 이 극심한 온도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어쩌면 이 거대한 논쟁 자체가, <오징어 게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씁쓸하고도 정직한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메시지’의 야심과 ‘이야기’의 배신


전문 비평계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으나, 중요한 유보 조항이 뒤따랐습니다. 평론가들은 시즌 3가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만한 주제적 야심과 감정적 무게감을 지녔다고 평가하면서도, 서사적 독창성과 완성도 측면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영국 <가디언>과 <파이낸셜 타임스> 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결말”이라며 시리즈가 던진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작품이 던지는 철학적 메시지와 완결성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시즌 3의 서사적 결함이 작품의 큰 성취를 가릴 수 없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평 이면에는 서사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공존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와 <할리우드 리포터> 등은 “반복되는 스토리 구조”와 “새로운 인물들을 깊이 있게 다루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마지막 시즌이 “끝까지 암울하고 절망적일 뿐”이라고 혹평했습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기술적 측면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반복적인 줄거리와 평면적인 캐릭터를 용납될 수 없는 근본적인 결함으로 본 것입니다.


결국 시즌 3에 대한 논쟁은 하나의 작품이 ‘메시지의 힘’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서사적 완성도’로 평가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오랜 질문을 다시 한번 소환한 셈입니다.








사람은 고귀하지만,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비평계의 복합적인 평가와 달리, 일반 시청자들의 반응은 훨씬 더 명확하고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습니다. 로튼 토마토와 메타크리틱에서 비평가 점수와 관객 점수 사이의 전례 없는 격차는, 수년간 시리즈에 감정적으로 투자해 온 시청자들이 느낀 깊은 배신감을 드러냅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반응을 종합해 보면, 실망감의 원인은 명확합니다. 첫째, 주인공 성기훈의 죽음과 시스템이 파괴되지 않는 결말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습니다. 둘째, 황준호 형사의 수사처럼 별다른 결실 없이 끝난 부차적인 이야기들은 지루한 군더더기로 치부되었습니다. 셋째, 수년간 몰입해 온 성기훈 캐릭터가 비논리적인 선택으로 붕괴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컸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즌 1의 문화적 특수성을 잃어버린 게임 방식과 어색한 VIP 캐릭터들의 재등장 역시 실망감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격렬한 반응은 이야기와 맺어온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위반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헬조선’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선한 주인공의 투쟁이 세상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승리’로 귀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의 피날레는 그 마지막 안식처에까지 ‘인간은 고귀하지만,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의 논리를 들이밀며, 우리가 기댈 곳 없는 무력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습니다.


시청자들이 느낀 이 깊은 배신감은 단지 이야기의 방향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수년간 감정을 이입해 온 주인공 성기훈의 캐릭터가 붕괴하고, 이를 표현하는 연기마저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설득에 실패한 이정재의 성기훈


프런트맨을 연기한 이병헌의 연기는 시즌이 갈수록 더 빛을 발했습니다. 특히 그가 게임 참가자로서 시즌 2에서 선보인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코믹 연기는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는 시스템의 대변자인 동시에 인간적 고뇌를 숨긴 프런트맨의 복합적인 내면을 무게감 있게 표현하며 극의 중심을 잡았습니다. 그의 연기력은 다소 느슨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를 설득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반면, 주인공 성기훈을 연기한 이정재의 연기는 시즌 2와 3에서 과도하게 과장되고 어색해졌습니다. 각성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눈빛과 목소리, 말투, 제스처 등 모든 것이 배우의 수단으로 쓰여야 마땅하지만, 이정재는 시즌 2부터 ‘수양대군’을 연상케 하는 목소리와 말투, 힘이 잔뜩 들어간 부담스럽고 어색하고 과장된 눈빛을 마지막 시즌까지 시종일관 고집했습니다. 이것이 황동혁 감독의 연출이었는지, 경험 많은 배우 본인의 의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반란의 실패 후 좌절과 분노,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의 어두운 내면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목소리와 말투, 눈빛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작품의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문제는 연기력뿐 아니라 캐릭터의 서사 자체에 있습니다. 시즌 3에서 성기훈의 캐릭터는 붕괴됩니다. 특히 시스템에 저항하기보다 개인적인 구원과 희생을 택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시리즈 전체의 동력을 떨어뜨리고 이야기에 발목을 잡습니다. 황동혁 감독은 “성기훈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거치며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과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 할 배우의 연기는 입체적이지 못했습니다. 설득력 있는 연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니, 개인적 구원을 택하는 성기훈의 마지막 선택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헬조선’의 완벽한 수출품, 그 성공의 역설


<오징어 게임>의 진정한 천재성은 새로운 장르의 발명이 아니라, 기존 요소들을 시의적절하고 강력한 메시지로 종합해 낸 데 있었습니다. ‘데스 게임’이라는 익숙한 장르에, 캐릭터들의 서사를 통해 쌓아 올린 한국적 정서 ‘한(恨)’과 ‘정(情)’, 그리고 파스텔톤 세트와 잔혹한 폭력의 극단적 대비가 만들어낸 독특한 미장센을 더했습니다. 이를 통해 단순한 생존 게임을 넘어, 후기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정밀하게 은유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 성공의 핵심 동력은, 극심한 경쟁과 불평등 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불안, 즉 ‘헬조선’ 담론을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알레고리로 포장해 냈다는 점에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 풍자하고 조롱함으로써 세계적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자기비판적 경향은 ‘K-장녀’, ‘K-노예’처럼 사회 병리 현상에 접두사 ‘K-’를 붙이는 최근의 문화 현상과도 맥을 같이하며, 한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강력한 자기 성찰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성공의 역설이 발생합니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연이은 흥행은 K-콘텐츠가 자본주의에 대한 세련되고 날카로운 비판과 동일시되는 세계적 인식을 구축했습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하나의 수익성 높은 글로벌 브랜드가 된 것입니다. 체제를 비판하는 행위가 체제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품이 되어버린 이 아이러니의 가장 극적인 증거는, 넷플릭스가 시리즈의 핵심 메시지를 그대로 차용해 리얼리티 쇼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를 제작한 현실입니다. ‘가진 자들을 위해 가난한 자들이 싸우는 폭력을 상품화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는 작품의 목소리는, 자신의 성공에 의해 완벽하게 잠식당했습니다.







소모되는 약자들: 강새벽에서 222번으로 이어지는 클리셰


<오징어 게임> 시리즈는 사회적 약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본주의의 잔혹함을 고발하지만, 그들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 역시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특히 시리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핵심적인 여성 캐릭터, 시즌 1의 강새벽(정호연)과 시즌 3의 김준희(조유리)의 서사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궤적을 그리며, 이는 작품이 가진 한계와 클리셰를 보여줍니다.


시즌 1의 강새벽은 탈북민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게임에 참여한 그는 극도의 냉소와 불신으로 무장했지만, 지영(이유미)의 희생과 성기훈의 인간적인 모습에 점차 마음을 엽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그의 서사는 주인공 성기훈의 각성을 위한 비극적 장치로 소모됩니다.


시즌 3의 222번 참가자 김준희 역시 임신부라는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인 약자입니다. 그는 게임 내내 약하고 무력하며 선한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끝내 험난한 게임 속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모성애와 생존 본능 사이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입니다. 그의 존재는 게임의 잔혹성을 극대화하고 다른 참가자들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역시 아이를 성기훈에게 맡기고 희생적인 죽음을 선택하며, 그의 서사는 성기훈이 최종적인 희생을 결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발판으로 기능합니다.


이처럼 <오징어 게임>은 ‘희생하는 약한 여성’이라는 클리셰를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강새벽과 김준희는 모두 사회적 약자이며, 그들의 서사는 모성애나 연대와 같은 숭고한 가치를 강조하지만, 끝내는 남성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결국 이 시리즈는 약자의 고통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약자들을 서사적으로 착취하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가장 숭고한 희생, 가장 완벽한 패배


<오징어 게임> 시즌 3의 ‘갓난아기’의 서사를 보며 ‘<설국열차>, <기생충>의 수직버전’이라 불리는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이 떠올랐습니다. 두 작품 모두 폐쇄된 공간을 자본주의의 알레고리로 사용하고, 마지막에 ‘아이’를 희망의 메시지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더 플랫폼*>의 아이가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아래로부터 위로’ 보내는 저항의 메시지라면, <오징어 게임>의 아기는 성기훈의 개인적인 구원과 희생을 통해 지켜낸 ‘희망의 불씨’에 가깝습니다.


*<더 플랫폼>을 보고 며칠을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멋진 작품입니다. 그러나 <더 플랫폼 2>는 절대 보지 마세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더 플랫폼>의 결말은 아래로부터의 메시지가 시스템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오징어 게임>의 결말은 시스템이 개인의 숭고한 저항을 다음 시즌을 위한 가장 흥미로운 ‘사건’으로 기록하며 무심히 확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성기훈의 여정은 집단행동의 실패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의 마지막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구원의 몸짓이지 정치적 혁명의 시도가 아닙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3의 성기훈 역시 참가자 222번이 낳은 갓난아기를 보호하는 것을 마지막 사명으로 삼습니다. 마지막 게임에서 자신의 목숨과 아기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가 죽기 직전 VIP들을 향해 외친 “우리는 말이 아니야. 인간이야”라는 절규는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비인간적인 시스템 앞에서 개인의 인간성을 증명하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즉, 성기훈의 희생은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자기 증명의 행위인 것입니다.


성기훈의 ‘인간’에 관한 선언은 공허하고 무력합니다. “우리는 말이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야!” 그의 절규는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VIP룸의 두꺼운 유리창에 부딪혀 먼지처럼 부서집니다. 그 공허한 메아리는, 거대한 시스템이 개인의 숭고한 저항을 어떻게 한 줄의 ‘데이터’로 처리하고 아카이빙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외침은 저항이 아니라, 시스템의 장부 맨 마지막 줄에 기록된 값비싼 ‘감가상각’ 일뿐입니다.


성기훈의 숭고한 인간적 희생은 시스템에 의해 즉각적으로 흡수되고 관리됩니다. 프런트맨은 아기가 게임의 ‘우승자’가 되도록 조치하고, 상금과 함께 아기를 자신의 동생인 황준호 형사에게 보냅니다. 시스템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사건’을 처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뿐입니다. 궁극의 아이러니는 게임이 파괴되기는커녕, 마지막 장면에서 프런트맨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새로운 미국판 게임의 참가자를 모집하는 장면(케이트 블란쳇의 카메오 출연과 함께)을 목격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입니다.







누가 진짜 승자인가?


<오징어 게임> 시즌 3를 둘러싼 논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작품이 장르적 쾌감을 넘어 ‘인간은 아름답지만, 결국 시스템에 무력하다’는 암울한 철학적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잔혹한 피날레는 스크린 밖에 있었습니다. 체제를 비판한 이 이야기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자본주의 상품이 되는 현실. 257억 원의 제작비로 1조 원의 가치를 창출한 넷플릭스야말로 이 게임의 의심할 여지없는 최종 승자입니다.


프런트맨의 예언처럼,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게임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의 탄생과 성공, 그리고 스스로 글로벌 상품이 되어버린 그 생애 주기 자체가, 이 명제가 얼마나 냉혹한 진실인지를 증명하며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스크린 속 VIP를 비웃었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그 게임의 가장 열렬한 관객이자 후원자였다는 완벽한 역설. 이것이 <오징어 게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불편하고도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