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튜디오> <더 피트> <소년의 시간>
2025년 9월 14일(현지 시각) 로스앤젤레스 피콕 극장에서 개최되고 코미디언 네이트 바가치의 사회로 진행된 제77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은 미국 텔레비전 산업의 지형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 한 편의 드라마였다.
CBS와 파라마운트+를 통해 생중계된 이날 밤은 코미디 부문에서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운 작품(<더 스튜디오>), 드라마 부문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이변의 주인공(<더 피트>), 그리고 리미티드 시리즈 부문에서 시대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소년의 시간)>이 무대를 장악하며 텔레비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예고했다.
올해 에미상은 세 편의 작품으로 요약된다. Apple TV+의 <더 스튜디오(The Studio)>는 코미디 시리즈의 역사를 새로 썼고, HBO Max의 <더 피트(The Pitt)>는 전통적인 드라마의 힘을 증명하며 강력한 우승 후보를 제압했으며, Netflix의 <소년의 시간(Adolescence)>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의 파급력을 입증했다.
이 세 작품의 압도적인 성공 뒤에는 최다 부문 후보에 올랐던 <세브란스: 단절(Severance)>의 예상 밖의 패배, 역사적인 연기상 수상자들의 탄생, 그리고 시상식 자체의 분위기를 지배했던 논란적인 진행 방식 등 다층적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제77회 에미상은 단순히 한 해의 우수한 TV 프로그램을 기리는 자리를 넘어, 스트리밍 시대의 경쟁 구도와 콘텐츠의 가치 기준, 그리고 시청자와 교감하는 방식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진 중대한 문화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제77회 에미상 시상식의 밤은 Apple TV+의 신작 코미디 <더 스튜디오>를 위한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수상을 넘어 에미상의 역사를 새로 쓰며 코미디 장르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더 스튜디오>는 고군분투하는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 '콘티넨탈 스튜디오'의 새로운 수장이 된 맷 레믹(세스 로건 분)이 예술적 무결성과 기업의 상업적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애쓰는 과정을 그린 풍자 코미디다. 이 시리즈는 IP 기반의 블록버스터가 지배하는 현대 영화 산업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마틴 스코세이지, 론 하워드, 올리비아 와일드 등 실제 거물급 영화인들이 본인 역으로 출연하는 카메오 전략은 작품의 풍자에 현실감과 깊이를 더하는 핵심적인 성공 요인이었다.
기술적으로도 <더 스튜디오>는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세스 로건과 그의 오랜 파트너 에반 골드버그가 직접 연출을 맡아, 한 번의 컷 없이 길게 이어지는 '원테이크(oner)' 촬영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에미상 감독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The Oner" 에피소드는 제목 그대로 에피소드 전체가 하나의 롱테이크처럼 구성되어, 긴박하고 혼란스러운 영화 제작 현장의 분위기를 시청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며 연출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더 스튜디오>의 가장 놀라운 성과는 수상 기록 그 자체에 있다. 이 작품은 본 시상식과 앞서 열린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을 합쳐 총 13개의 트로피를 휩쓸었다. 이는 지난해 <더 베어(The Bear)>가 세운 11개 수상 기록을 경신한 것으로, 에미상 역사상 단일 시즌에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코미디 시리즈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수상 부문 역시 코미디 시리즈 작품상을 필두로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을 모두 석권했으며, 촬영, 의상, 편집 등 기술 부문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작품의 전반적인 우수성을 입증했다.
이날 밤은 <더 스튜디오>의 주역인 세스 로건 개인에게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그리고 작품상(총괄 프로듀서)까지 4개의 트로피를 개인적으로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한 개인이 한 해에 가장 많은 에미상을 받은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대기록으로, 배우, 감독, 작가, 제작자를 넘나드는 '멀티 하이픈 크리에이터'의 힘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행복하다는 사실이 솔직히 창피할 정도"라며 진심 어린 기쁨을 드러내기도 했다.
<더 스튜디오>의 압도적인 성공은 텔레비전 아카데미 회원들, 즉 방송 산업 종사자들의 자기 성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반영한다. 할리우드의 내부 작동 방식을 다룬 쇼가 이토록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투표권을 가진 이들은 이 쇼의 풍자와 유머 속에서 자신들의 일상, 고충, 그리고 업계의 부조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자신들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로서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압도적인 지지는 산업 중심의 이야기가 가진 '홈그라운드 이점'을 시사한다. 에미상 유권자들이 보편적인 주제만큼이나 자신들이 가장 잘 이해하는 내러티브에 크게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내부자의 공감대가 작품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결과적으로 <더 스튜디오>의 대승리는 향후 더 많은 자기 참조적인, 할리우드 중심의 콘텐츠 제작을 장려하는 순환 구조를 강화할 수 있다. 이는 '에미상이 최고의 텔레비전을 기리는가, 아니면 텔레비전에 '관한' 최고의 텔레비전을 기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드라마 부문은 제77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극적인 이변이 연출된 무대였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HBO Max의 <더 피트>가 작품상을 거머쥐며, 전통적인 장르 드라마의 힘과 시대적 공감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더 피트>는 피츠버그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숨 가쁜 15시간의 근무를 15개의 에피소드에 걸쳐 실시간으로 그려낸 독특한 형식의 메디컬 드라마다. 베테랑 배우 노아 와일리가 연기하는 지치고 냉소적이지만 사명감 넘치는 응급의학과 의사를 중심으로, 인력 부족과 예산 삭감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의료진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담아냈다.
특히 이 작품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붕괴 직전의 의료 시스템이 마주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실제 의료계 종사자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지지를 받았다. 일부 비평가들은 다소 멜로드라마적인 측면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긴박감 넘치는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상식 전, 드라마 부문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는 단연 Apple TV+의 <세브란스: 단절>이었다. 무려 27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을 세운 이 작품의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더 피트>는 드라마 시리즈 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주연상(노아 와일리), 여우조연상(캐서린 라나사)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이날 밤 최대의 이변을 일으켰다. 이 결과는 단순한 '깜짝' 수상을 넘어, 에미상 유권자들의 표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분석된다.
<더 피트>의 승리에서 가장 감동적인 서사는 주연 배우 노아 와일리의 수상이었다. 그는 1990년대 전설적인 메디컬 드라마 <ER>에서 젊은 의사 존 카터 역으로 다섯 차례나 에미상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의사 가운을 입고 연기한 <더 피트>로 생애 첫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순간은 그의 오랜 경력에 대한 헌사와도 같았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을 오늘 밤에도 근무 중인 모든 의료진에게 바친다"고 말하며 작품이 담고 있는 진심을 전달해 큰 박수를 받았다.
<더 피트>의 승리는 텔레비전 제작 철학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는 복잡하고 지적인 고도의 콘셉트를 가진 SF 시리즈(<세브란스: 단절>)에 맞서, 현실에 발 딛고 선 인간 중심의 감성적인 드라마가 거둔 승리였다.
한 HBO 임원은 <더 피트>의 성공이 더 긴 시즌과 매년 돌아오는 '전통적인' TV 제작 방식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시청자와 캐릭터 간의 꾸준한 유대감 형성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가들 역시 <더 피트>가 <세브란스: 단절>보다 "더 감성적이고 시의적절했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유권자들의 취향이 양분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브란스: 단절>과 같은 '프레스티지 TV'가 그 야심과 복잡성으로 비평적 찬사를 받는 한편, 의료 위기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은유 없이 직접적으로 다루며 감정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에 대한 선호도 역시 커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플롯 중심의 미스터리보다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가 거둔 승리다. 이 결과는 방송사와 스트리밍 플랫폼에 잘 만들어진 전통 장르물이 최고의 상을 받을 수 있는 유효한 길임을 보여주며, '시네마틱'한 단편 시리즈만이 최고라는 인식을 넘어 지속 가능한 롱폼 스토리텔링에 대한 투자를 장려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리미티드 시리즈 부문에서는 Netflix의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이 경쟁자들을 압도하며 시상식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 작품의 성공은 잘 만들어진 사회 드라마가 지닌 강력한 힘과 시대정신을 포착하는 텔레비전의 역할을 증명했다.
<소년의 시간>은 13세 소년 제이미 밀러가 동급생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되는 심리 범죄 드라마다. 이 시리즈는 영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청소년 칼부림 범죄를 모티브로, 소셜 미디어의 위험성, '맨오스피어(manosphere)'로 대표되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남성성 왜곡과 급진화, 그리고 현대 사회의 남성성 위기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작품은 실제 영국에서 발생했던 청소년 폭력 사건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부모와 자녀 세대 간의 단절과 온라인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파고들며 사회 전체에 중요한 대화를 촉발시켰다.
<소년의 시간>이 남긴 가장 빛나는 순간은 15세의 신예 배우 오언 쿠퍼의 역사적인 수상이었다. 그는 리미티드 시리즈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에미상 역사상 최연소 남자 연기상 수상자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청소년기의 혼란과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낸 그의 연기는 평단과 대중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감격에 찬 수상 소감에서 "3년 전만 해도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오늘 밤은 여러분이 귀 기울이고, 집중하고,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면 인생에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라고 말해 시상식 최고의 감동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소년의 시간>은 후보에 오른 모든 주요 부문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리미티드 시리즈 작품상을 시작으로, 남우주연상(스티븐 그레이엄), 남우조연상(오웬 쿠퍼), 여우조연상(에린 도허티), 각본상, 감독상까지 총 6개의 트로피를 독식하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배우이자 공동 창작자인 스티븐 그레이엄이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은 작품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연기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였다.
이 시리즈는 기술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각 에피소드를 길고 연속적인 단일 테이크로 촬영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시청자가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극도의 현실감과 혼란, 심리적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증폭시켰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작품의 무거운 주제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소년의 시간>의 압도적인 성공은 사회적으로 시급한 문제를 다루는 스토리텔링의 힘을 명확히 보여준다. 어둡고 보기 불편하며 시의적인 이 영국 드라마가 리미티드 시리즈 부문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청소년과 인터넷, 왜곡된 남성성,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 부재 등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불안을 직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는 에미상 유권자들이 텔레비전을 중요한 사회적 기록물로 인식하고 있으며, 예술적 완성도와 감정적 힘을 바탕으로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 기꺼이 최고의 영예를 안긴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작품의 성공은 '중요한' 텔레비전이 가장 큰 무대에서 '상 받는' 텔레비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앞으로 더 많은 국제 공동 제작 및 수입 작품들이 어려운 사회적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도록 장려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모든 시상식이 그렇듯, 제77회 에미상 역시 환희의 순간 뒤에는 아쉬움의 그림자가 존재했다. 특히 올해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작품들이 고배를 마시면서,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갈렸다.
올해 에미상의 가장 큰 이야깃거리 중 하나는 단연 <세브란스: 단절>의 작품상 수상 실패였다. 총 27개 부문이라는 압도적인 최다 후보 지명으로 시상식 전부터 주인공으로 점쳐졌던 이 작품은 드라마 시리즈 작품상 트로피를 <더 피트>에 내주며 큰 충격을 안겼다. 시즌 2는 특유의 독창적인 설정과 미장센을 더욱 발전시키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유권자들의 최종 선택을 받지는 못했다.
물론 <세브란스: 단절>이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총 8개의 상을 수상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특히 브릿 로어가 드라마 여우주연상을, 트러멜 틸먼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 부문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트러멜 틸먼의 수상은 해당 부문 최초의 흑인 배우 수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더했다.
작품상 실패의 원인으로는 여러 분석이 제기된다. 일부 시청자와 비평가들은 시즌 2가 시즌 1에 비해 전개가 다소 느리고 스타일이 내용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복잡하고 난해한 SF 미스터리 장르의 특성이 <더 피트>가 가진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적 호소력에 비해 유권자들에게 덜 매력적으로 다가갔을 수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거 에미상을 휩쓸었던 두 강자, <화이트 로투스(The White Lotus)>와 <더 베어>의 부진 역시 올해 시상식의 주요 관전 포인트였다.
<화이트 로투스>: 10개의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며 기대를 모았지만, 본 시상식에서는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러한 부진의 배경에는 비평적으로 이전 시즌들에 비해 다소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시즌 3 자체의 한계가 있었다. 또한, 여러 명의 배우가 동일한 조연상 부문에 후보로 오르면서 표가 분산된 것 역시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더 베어>: 지난해 코미디 부문 기록을 세웠던 <더 베어> 역시 주요 부문에서 무관에 그쳤다. 이는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이 코미디 부문에 출품되는 '카테고리 사기(category fraud)' 논란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은 결과로 풀이된다. 더불어, 시즌 3가 이전 시즌만큼의 추진력과 신선함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평적 반응도 유권자들의 외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거물들의 침묵 속에서 예상치 못한 작품과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가장 큰 이변은 HBO의 <썸바디 썸웨어>에서 열연한 제프 힐러가 코미디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해리슨 포드와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거둔 그의 승리는 시상식에서 가장 따뜻하고 놀라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또한, <더 피트>의 캐서린 라나사가 드라마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은 그날 밤 펼쳐질 거대한 이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제77회 에미상은 수상 결과만큼이나 시상식 자체의 진행 방식과 무대 위에서 벌어진 다채로운 순간들로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았다. 감동적인 수상 소감부터 논란을 일으킨 진행 방식, 그리고 화려한 레드 카펫까지, 시상식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올해 시상식의 가장 큰 특징이자 논란의 중심에는 사회자 네이트 바가치가 내건 '기부 챌린지'가 있었다. 그는 미국 비영리단체 '보이즈 앤 걸즈 클럽'에 1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수상자가 45초의 소감 시간을 넘길 때마다 1초당 1,000달러를 기부금에서 차감하는 규칙을 도입했다.
이 독특한 시도는 시상식의 고질적인 문제인 긴 수상 소감을 줄이려는 의도였지만, 비평가와 시청자들로부터는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많은 이들이 이 규칙이 "어색하고", "잔인하며", "재미없다"고 평가했으며, 수상자들이 일생일대의 순간에 진솔한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박탈하고 사회자를 "규율부장"처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결국 시상식 말미에 총 35만 달러가 기부되는 훈훈한 결말을 맞았지만, 시상식 내내 감동의 순간을 억누르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촉박한 시간제한에도 불구하고, 몇몇 수상자들은 짧지만 강렬한 소감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해나 아인바인더의 정치적 발언: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으로 코미디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해나 아인바인더는 소감 말미에 "Go Birds, f**k ICE, and free Palestine(필라델피아 이글스 파이팅, 이민세관단속국은 엿 먹어라, 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이라고 외쳐 시상식 최고의 정치적 순간을 만들었다. 이 발언은 방송에서 일부 묵음 처리되었으며, 그녀는 시상식 후 인터뷰에서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을 밝히며 소신을 이어갔다.
스티븐 콜베어의 작별 인사: 종영을 앞둔 <더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가 토크 시리즈 작품상을 수상하자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청률 1위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종영 발표로 논란이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콜베어가 쇼에서 트럼프를 비판하자 벌어진 정치적 외압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스티븐 콜베어는 무대에 올라 상실과 사랑, 그리고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을 담은 감동적인 연설과 함께 팝가수 프린스의 가사를 인용하며 시청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역사적이고 진심 어린 순간들: 이 외에도 트러멜 틸먼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 , 크리스틴 밀리오티가 자신의 심리치료 노트 뒷면에 적어온 수상 소감을 유쾌하게 읽어 내려간 순간, 그리고 브릿 로어가 수상 소감 종이 뒷면에 "LET ME OUT(여기서 내보내 줘)"이라는 <세브란스: 단절> 속 대사를 적어 보여준 재치 있는 이스터에그 등이 화제가 되었다.
시상식의 또 다른 볼거리인 레드 카펫에서는 수많은 스타들이 화려한 패션을 선보였다. 특히 <화이트 로투스> 시즌 3에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한 블랙핑크의 리사는 여러 매체에서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셀레나 고메즈 역시 강렬한 붉은 드레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편, 시상식 중간에는 <길모어 걸스>와 <로앤오더: 성범죄전담반>의 출연진들이 무대에 함께 올라 팬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재회의 순간을 선사했다.
제77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은 스트리밍 플랫폼이 텔레비전 산업의 창의적, 비평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자리였다. Apple TV+, HBO Max, Netflix가 주요 부문을 석권하며 전통적인 방송 네트워크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올해 에미상이 던진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서로 상충하는 가치들이 충돌하며 텔레비전 산업이 겪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을 드러낸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시상식은 할리우드의 자기애(<더 스튜디오>)를 전례 없이 칭송하는 동시에, 전통적이고 진심 어린 휴먼 드라마(<더 피트>)의 귀환에 박수를 보냈다. 복잡하고 도전적인 SF 드라마(<세브란스: 단절>)의 연기력은 인정하면서도, 최고 작품상의 영예는 더 접근하기 쉬운 경쟁작에게 안겨주었다. 또한, 현대 사회의 실패를 고발하는 어둡고 시의적인 드라마(<소년의 시간>)를 최고로 꼽으면서도, 정작 시상식 자체는 깊은 감정 표현을 억제하려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모순들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탐색하고 있는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제77회 에미상은 하나의 명확한 트렌드가 아닌, 옛것과 새것, 복잡함과 직접성, 냉소와 진심 사이의 흥미로운 긴장감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는 텔레비전이 여전히 가장 역동적이고 중요한 문화적 매체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우리의 시대를 대변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