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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폭탄은 터졌을까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가 관객에게 넘긴 18분의 도화선

by 조하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세련되고 세밀하게 만들어진 정치 스릴러이자 우리 시대의 불안을 해부하는 날카롭고 불편한 심리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정체불명의 국가로부터 발사된 단 한 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그리고 세계의 운명을 결정해야 할 18분의 시간. 영화는 극도로 절제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폭발의 스펙터클이나 화려한 액션, 과도한 감정선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대신 재앙이 관리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냉정한 ‘절차극’의 형태를 취하죠. 이는 관객에게 익숙한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시스템의 마비 상태와 그 안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게 합니다.


이 작품은 비글로우 감독이 <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에 이어 완성한, 소위 ‘포스트 9/11 3부작’의 주제적 완결편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 영화들은 ‘압박감에 놓인 군산복합체’에 대해 탐구하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죠.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그 정점에 있습니다. 영화는 형식적인 엄격함과 주제적인 모호함을 통해 ‘다이너마이트로 가득한 집’과 같은, 현 세계의 불안을 담대하게 짚어냅니다. 그리고 우리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 자체가 어떻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폭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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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조각하는 법: 비글로우의 카메라와 오펜하임의 시계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형식은 메시지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곧 주제이고, 관객을 스크린 속 인물들과 동일한 심리적 압박감 속에 가두는 핵심 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이죠.




비글로우의 ‘통제된 혼돈’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 스스로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예술과 정보, 저널리즘의 교차점”에 있다고 설명한 바 있죠. 평단 역시 그녀의 연출을 “엄격함을 넘어 금욕적으로 느껴질 만큼 정밀하다”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통제된 혼돈’은 몇 가지 특징적인 영화적 기법을 통해 구현되죠.


촬영감독 배리 애크로이드의 카메라는 인물에게 극도로 가깝게 다가가는 ‘핸드헬드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끊임없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화면은 마치 ‘안정된 권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죠. 모든 결정이 버튼 위에 얹은 떨리는 손에 달려있다는 불안정한 현실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냅니다.


편집 감독 커크 백스터의 스타카토 리듬을 연상시키는 편집은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와 화상 회의, 프로토콜 보고의 파편들을 엮어내며 관객을 숨 막히는 정보의 과부하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작곡가 볼커 베르텔만의 무언가 불길하고 불안하고 강박적인 사운드 트랙은 상황실의 기계음과 뒤섞여 신체적 불안감과 불편감을 직접적으로 유발합니다. 귀를 찢는 듯한 사운드 디자인은 관객의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안전거리를 무너뜨리죠.


이러한 리얼리즘의 추구는 세트장에 상주하는 기술 고문들을 통해 ‘핵 가방’을 다루는 방식과 같은 사소한 디테일까지 철저히 고증하는 노력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비판과 공모의 역설’의 명분이 생깁니다. 영화는 핵무기 시스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미국 권력 시스템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을 숨기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교한 하드웨어와 시스템의 매혹적인 메커니즘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볼거리가 되죠. 관객은 시스템의 위험성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정교함에 매료되고 압도되는 복잡한 심리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거대한 군산복합체 시스템의 공모적 관찰자이자 방관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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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18분, 무너지는 이성: 오펜하임의 ‘라쇼몽’

이 영화의 각본가 노아 오펜하임은 전직 저널리스트 출신입니다. 영화는 18분의 시간을 미사일 방어 기지, 백악관 상황실, 그리고 대통령의 관점으로 세 번 반복해 보여주죠.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한 서사 기법으로,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각 관점의 주관성과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최근 ‘라쇼몽’ 기법을 사용한 영화 중에선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었습니다. 오펜하임은 이러한 반복되는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 “관객이 18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지독하게 짧은 지를 본능적으로 체험하기를 원했다”고 밝혔죠.


이러한 반복 구조는 평단과 관객 사이에서 극명한 호불호를 낳고 있습니다. 일부는 이 구조가 시스템 전체의 마비 상태를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라고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전기처럼 짜릿했던 1막 이후 반복되는 서사가 긴장감을 급격히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있죠.


하지만 이 서사 구조는 단순한 영화적 실험을 넘어 영화의 핵심 주제를 담고 있는 은유 그 자체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전통적인 선형적 서사를 가졌다면 ‘어떻게 날아오는 미사일을 막을 것인가?’라는 문제 해결에 집중했을 겁니다. 그러나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합니다. 시간을 여러 번 순환시킴으로써 영화의 초점은 ‘결과’가 아닌 ‘과정’ 그 자체로 이동하죠.


각각의 반복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정보의 부재나 소통의 단절, 그리고 프로토콜과 인간 감정 사이의 충돌이라는 더 깊은 혼란의 층위를 조금씩 드러냅니다. 관객은 공포와 압박감 속에서 인간의 이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목격하게 되죠. 결국 이러한 서사 구조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핵 억지력’이라는 관료주의적 심리적 함정에 대한 완벽한 은유가 됩니다. 인물들은 탈출구가 없는 절차의 순환 고리에 갇혀 있으며, 관객이 느끼는 서사적 반복에 대한 좌절감과 답답함은 시스템 안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정확히 조응합니다. 그러니까 구조가 곧, 주제가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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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지지 않은 폭탄, 결말을 거부한 결말


이 영화의 가장 논쟁적인 요소는 대통령이 보복 명령을 내리기 직전에 암전되는 갑작스러운 엔딩입니다. 미사일이 실제로 폭발했는지, 미국은 반격했는지, 영화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죠. 물론, 이러한 ‘열린 결말’은 때로 감독의 서사적 책임 회피나 예술적 면피로 비칠 위험도 있습니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거부하는 것이 불친절한 태도로 읽힐 수도 있고요. 하지만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엔딩은 단순한 회피가 아닌, 관객을 현실의 문제에 직접 관여하도록 만드는 고도로 계산된 주제적 선택입니다.


제작진은 처음부터 이러한 결말을 의도했다고 합니다. 비글로우와 오펜하임은 인터뷰에서 “관객을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명확히 밝혔죠. 세상이 구원받거나 혹은 파괴되거나 하는 등의 명확한 결말은 관객에게 안도감을 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만들지만, 모호한 엔딩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위태로운 세상에 대한 대화를 유도한다고 말입니다. 비글로우 감독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폭발’은 스크린 속 핵폭발이 아니라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 사이에서 시작될 대화의 폭발인 거죠.


배우들 역시 이러한 의도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대통령 역의 이드리스 엘바는 자신의 캐릭터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고 밝혔죠. 그는 그 선택을 미국인 천만 명의 죽음과 지구 전체의 파괴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결정’이라 설명했습니다. 국방부 장관 역의 재러드 해리스는 이 결말의 모호함이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끝맺게 함으로써 깊은 사유를 이끌어낸다고 평가했죠.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엔딩은 관객을 향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도발입니다. 영화는 서사적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스크린이라는 제4의 벽을 허물고, 결정의 실존적 부담을 스크린 속 인물에게서 관객에게로 전이시키죠. 영화는 ‘소비되는 이야기’에서 ‘답해야 할 질문’으로 변합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도 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자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 세계가 바로 그 ‘폭탄으로 가득한 집’임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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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불안’이라는 사회적 은유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는 ‘핵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가 직면한 광범위한 불안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악당 없는 스릴러: 시스템 자체가 공포다

영화의 핵심 설정은 미사일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왜 발사했는지 끝까지 모르죠. 러시아, 중국, 북한, 중동 지역 모든 국가를 후보에 올립니다. 미국은 적이 많으니까요. 혹은 예측 불가능한 불량 국가나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각본을 쓴 오펜하임은 미사일 발사 주체를 영화 끝까지 밝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특정한 악당이 아닌 시스템 자체에 집중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고 설명했죠.


이는 냉전 시대의 스릴러와 현대 스릴러와의 명확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페일 세이프>(Fail Safe)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와 같은 고전 영화들은 소련이라는 명확한 적을 상정한 양극 체제의 논리 위에서 철저하게 작동했습니다. 여기서 공포의 근원은 두 거대 세력 사이에서 시스템이 오작동하는 것이었죠. 반면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21세기의 다극화되고 혼란스러운 세계 질서를 반영합니다. 이제 공포는 더 이상 ‘예측 가능한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책임의 소재조차 불분명한 완전한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정체불명의 미사일’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근원적 불안을 은유합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사이버 공격, 현실을 잠식하는 가짜 뉴스, 불분명한 기원을 가진 팬데믹, 그리고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테러와 무작위 폭력에 대한 공포. 영화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위협이 ‘특정한 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정보는 불완전하고, 신뢰는 부재하며, 치명적인 오판의 가능성만이 편재하는 글로벌 시스템의 취약성 자체에 있다고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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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명의 통계, 단 한 명의 딸

제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꼽는 부분은 국방부 장관 리드 베이커가 비극적 선택을 하는 장면입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과 딸과의 소원한 관계 속에서 고뇌하던 그는 미사일의 예상 목표 지점이 딸이 살고 있는 시카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는 딸에게 마지막 전화를 건 후, 펜타곤 옥상에서 헬기에 오르는 대신 스스로 몸을 던집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픈 아이, 실패한 관계, 어젯밤 숙취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베이커 장관의 장면은 이러한 사실을 인간적으로 보여주죠. 어떤 인물에게는 시카고의 ‘천만 명 사상자’는 전략적 계산을 위한 추상적인 변수이자 통계 수치이지만, 베이커에게 그 통계는 단 한 명의 사랑하는 딸의 얼굴로 수렴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뉴스에 보도되는 익명의 피해자에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을 넣으면 전혀 다른 비극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장면은 시스템이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무시하고 삭제하는지, 혹은 그 반대로 거대한 시스템의 논리가 한 인간의 구체적인 사랑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이고 감정적이며 철학적인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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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살은 무력한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마지막인 능동적 행위입니다. 그는 딸을 구할 수도, 그녀의 생명을 하나의 변수로 취급해야 하는 시스템 안에서 제 기능을 할 수도 없죠. 그의 투신은 이 불가능한 세계의 논리에 대한 최종적인 거부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 ‘상호확증파괴’, ‘보복 공격’, ‘감수 가능한 손실’과 같은 냉혹한 관료적 언어들이 인간의 사랑과 슬픔 앞에서 어떻게 산산조각 나는지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폭탄으로 가득한 집’이 만들어 낸 첫 번째이자, 가장 가슴 아픈 희생자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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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리더십의 부재, ‘오바마’라는 향수


영화 속 인물들은 현대 사회의 이상과 불안을 투영하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특히 이드리스 엘바가 연기한 미합중국 대통령 캐릭터는 복합적인 해석의 장을 열어줍니다.


제작진은 이 캐스팅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대부분의 평론가와 관객들은 이 캐릭터를 “오바마를 연상시키는 인물” 또는 “희미하게 오바마로 코드화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죠. 그의 편안한 권위나 자연스러움, 근본적인 품위, 그리고 자선 농구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 등은 특정 리더십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환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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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제작진의 의도보다 관객의 집단 심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의 의미는 창작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 속에서 완성되니까요. 혼란스러운 현대 정치 지형 속에서, 침착하고 지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도덕적 중심을 가진 리더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특정 인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드리스 엘바의 캐스팅과 그에 따른 ‘오바마 해석’은 위기 상황에서의 유능하고 품위 있는 ‘미국다운’ 국제 리더십에 대한 집단적 향수, 즉 그리움을 자극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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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듭니다. 영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 즉 이상적인 리더를 제시하고, 심지어 그런 인물조차 시스템의 광기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가 처한 위태로운 상황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헤쳐 나가길 바라는, 바로 그 ‘리더십의 부재’에 대한 슬픈 노래처럼 들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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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선택은?


이 영화의 궁극적인 힘은 스릴러 장르로서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긴장감을 무기로 더 불편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데 있습니다. 비글로우와 오펜하임은 스크린 속 폭탄을 터뜨리는 대신 현실 세계의 관객들 사이에서의 대화를 촉구합니다.


영화는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폭탄으로 가득한 집 안에 살고 있음을 냉정하게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죠.



당신은 폭탄으로 가득한 집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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