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면 지치지만 멈출 수 없는 명작 드라마 <더 피트>

하지만 우리는 기꺼이 15시간의 고통을 함께 한다

by 조하나




딱히 이유를 알 수 없이 바쁜 세상입니다. 어느새 드라마 한 시즌에 20편을 웃돌던 에피소드가 12편, 8편, 6편으로 점차 줄어들었죠. OTT의 등장으로 비용과 효율성을 따지게 된 결과입니다. 그런 시류에 용감하게 ‘정통 드라마’라는 묵직한 도전장을 낸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HBO Max를 통해 공개된 <더 피트(The Pitt)>입니다.


4K61BZQ_the_Pitt_S1_E1_jpg.png




이 드라마 한 시즌을 다 보고 나면 마치 제가 피츠버그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15시간 동안 혹독한 교대 근무를 하고 나온 것처럼 온몸이 지치고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의학 드라마 중 하나가 아닌, ‘체험’에 가까워요.






그런데 왜 우리는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요즘 미디어는 온통 ‘힐링’과 ‘위로’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더 피트>는 정반대예요. 이 드라마는 우리를 위로하기는커녕 15시간 동안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데려가 탈진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드라마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어쩌면 이건 우리가 더 이상 ‘가짜 위로’에 만족하지 못하고, 진짜 세상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공감함으로써 얻는 ‘진짜 감정’을 갈망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해요. 이 드라마는 우리를 위로하는 대신 ‘함께 하자’라고 말합니다.



96eb8b88-e0f0-4370-94cf-a552ffdfc297.png




2025 에미상 시상식에서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최고 드라마 작품상을 거머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피트>는 우리가 의학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익숙한 장치들, 예를 들면 감정을 고조시키는 배경음악이나 극적인 시간 편집 같은 것들을 과감히 배제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진짜 현실의 소리와 시간의 흐름으로 채우죠. 그래서 이 드라마는 우리 시대의 불안하고 지친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는, 강력하지만 때로는 보기 불편한 거울 같습니다.


요즘처럼 모든 게 빠르고 화려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꾸며지지 않은 날것의 진정성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더 피트>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듭니다.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현실’이라고 할까요. 이 드라마를 본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내가 정말 저곳에 있었던 것 같아”라고 말하는데, 이건 그냥 몰입감이 좋다는 뜻을 넘어선 감상입니다. 심지어 실제 의사나 간호사들도 이 드라마가 자신들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그렸다고 극찬할 정도니까요. 아마 이 드라마의 진짜 매력은 현실에서 도망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현실 속으로 우리를 깊숙이 데려간다는 점일 겁니다.








모두가 사랑했던 그 의사의 귀환


<더 피트>를 이야기할 때, 배우 노아 와일리(Noah Wyle)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90년대 전 세계적으로 히트했던 의학 드라마 <ER> 기억하시나요? <ER>에서 어리숙하지만 열정 넘치던 의대생 ‘존 카터’를 연기했던 배우가 바로 노아 와일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카터가 의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울곤 했죠.



noah-wyle-ER-season-1-1170x780.jpg
l-intro-1744404893.jpg





30년이 지난 지금, 노아 와일리는 <더 피트>에서 ‘로비’라는 의사로 돌아왔습니다. 로비는 지칠 대로 지치고, 팬데믹을 겪으며 모든 걸 쏟아부은 뒤 불안장애와 PTSD에 시달리는, 소진된 의사입니다. 마치 존 카터가 실제 의사로서 30년의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죠. 배우 본인도 “좀 더 지혜로워지고 성숙해진 마음으로 다시 의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ER>의 제작진이기도 했던 <더 피트>의 제작진은 우리가 가진 ‘존 카터’에 대한 기억을 아주 영리하게 활용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냥 업무에 찌든 한 피곤한 의사를 보는 게 아니라 한때 희망에 찼던 젊은 의사에게 지난 30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게 되죠.











상처 입은 치유자, 시대의 변화를 말하다


‘존 카터’가 <ER>에서 개인의 능력으로 환자를 구하는 ‘영웅’의 시대(90년대)를 상징했다면, 로비는 망가진 사회와 의료 시스템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버텨내는 ‘생존자’의 시대(현재)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더 이상 한 명의 슈퍼히어로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믿지 않는 우리 시대의 모습처럼 말이죠. 로비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때로는 실수도 합니다. 바로 그 상처 입은 모습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더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들 자신의 상처도 어쩌지 못하고 아파하면서도 타인을 돌보려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인간’의 의미를 보게 되죠.




그리고 마침내, 노아 와일리는 올해 에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ER>로 후보에 오른 지 26년 만의 수상이었죠. 때로는 삶 자체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그의 수상 소감은 더 멋졌습니다. 그는 동료 배우나 제작진이 아닌, 실제 의료진에게 이 상을 바쳤습니다. “오늘 밤 교대 근무에 들어가거나,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모든 분들께, 그 일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상은 여러분의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이 한마디로 <더 피트>는 단순한 의학 드라마를 뛰어넘어 ‘현실을 향한 진심 어린 헌사’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줬습니다.


Noah-Wyle-Emmy-Win-2.png



노아 와일리는 단순히 배우로만 참여한 게 아닌, 총괄 프로듀서이자 작가로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응급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고 하죠. 그의 이런 진심이 작품 곳곳에 묻어나기에 <더 피트>가 더 큰 울림을 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진짜 이유


진정성 말고도 <더 피트>가 강렬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독특한 형식에 있습니다.


15시간, 15개 에피소드, 하나의 교대 근무.


바로 이 드라마의 카피입니다. 말 그대로, 15시간짜리 응급의학과 의료진의 교대 근무를 15개 에피소드에 걸쳐 매시간 실시간으로 보여줍니다. 중간에 건너뛰는 부분 없이요. 그 시간의 흐름을 우리도 똑같이 느낍니다. 덕분에 우리는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힌 듯한 답답함과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의 압박감을 그대로 느끼게 됩니다.


물론 실시간 형식을 쓴 드라마가 전에도 있었습니다. 테러 위협에 맞서는 대테러 요원들을 그린 <24>가 대표적이죠. 하지만 <24>가 사건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이 형식을 썼다면, <더 피트>는 인물들이 느끼는 심리적인 피로감을 전달하는 데 사용합니다. 드라마의 핵심은 터질 듯한 사건을 막는 것이 아니라 15시간의 근무를 버텨내는 그 과정 자체에 있으니까요.









침묵 속에서 비로소 들리는 것들


이 드라마의 가장 대담한 선택은 바로 배경음악을 완전히 없앤 겁니다. 시즌 통틀어 15개의 에피소드 내내 단 1분도 음악이 삽입되지 않아요. 보통 드라마에서 우리가 슬프거나 긴장해야 할 때를 알려주는 익숙한 음악이 전혀 없습니다. 제작자 R. 스콧 젬밀은 이렇게 말했죠. “응급실에 가본 적 있다면 알겠지만, 그곳은 시끄럽고 끔찍합니다. 그걸 제대로 담아내려면 어떤 음악도 쓰지 않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라고.


음악을 끄자, 비로소 세상의 진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환자의 거친 숨소리, 다급한 발걸음, 기계의 차가운 경고음, 그리고 그 모든 소음 사이의 짧은 침묵까지. 이런 현장의 소음이 곧 이 드라마의 음악이 됩니다. 감정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 없이 갑작스럽게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순간들은 훨씬 더 날것으로,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가장 큰 울림은 때로 ‘침묵’에서 옵니다. 환자의 죽음 앞에서 흐르는 먹먹한 침묵은 그 어떤 비극적인 음악보다 더 깊은 슬픔을 전해줍니다.


이 두 가지 장치, 즉 실시간 전개와 배경음악의 부재는 우리를 단순한 시청자가 아니라 그 공간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의료진이 느끼는 압박감과 피로감을 우리도 비슷하게 체험하게 되는 거죠. 조금 불편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980 (1).png








현대의 고해성사실, 응급실


<더 피트>의 응급실은 단순히 몸이 아픈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죠. 마치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다고 할까요. 더 나아가, 이곳은 현대의 ‘고해성사실’과도 같습니다.


응급실에서는 사회적 지위, 부, 이념 같은 가면들이 모두 벗겨집니다. 삶과 죽음의 문턱 앞에서 우리 모두는 그저 살고 싶어 하는 연약한 존재가 될 뿐입니다. 인종차별주의자도, 백신 음모론자도, 유명 인플루언서도 고통 앞에서는 모두 평등해집니다. 이런 공간에서 의료진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환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듣고 보듬는 ‘사제’와 같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합니다.


드라마는 환자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들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혐오 범죄로 지하철 선로에 떠밀려 다친 여성, 인종차별적인 폭언을 견뎌내야 하는 간호사, 음악 페스티벌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의 피해자들… 이런 모습들은 우리 사회의 폭력과 분열이 낳은 결과들을 최전선에서 마주하는 의료진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또, 펜타닐 같은 약물 중독 문제는 시리즈 내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10대 아이들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실려 오는 비극적인 모습은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죠.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도 깊이 있게 다룹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민하는 10대 소녀, 환자에게 폭행당하는 수간호사, 성매매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어린 환자를 돕기 위해 애쓰는 의사의 모습까지 말이죠.


정신과 병상이 부족해서 응급실에 며칠씩 머물러야 하는 환자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환자와 소통하려는 노력, 아픈 가족을 돌보느라 지쳐버린 보호자의 이야기 등 시스템의 문제와 보이지 않는 상처들도 놓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위험한 지도 보여주죠. 뷰티 인플루언서가 오염된 화장품을 쓰고 수은에 중독되는 에피소드는 정말 섬뜩합니다.


예전 의학 드라마들이 주로 희귀병을 진단하거나 어려운 수술을 성공시키는 데 집중했다면, <더 피트>는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 즉 총기 폭력, 약물 중독, 가정 폭력 같은 사회적인 병 때문에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단순히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무너져가는 사회가 만들어 낸 상처들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환자 개인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하고 있습니다.



960x0 (1).png
THE-PITT-TAYLOR-DEARDEN.jpg
다운로드 - 2025-11-02T171914.479.jpg
the-pitt-katherine-lanasa-noah-wyle_0.png








에미상 최우수 작품상 수상의 의미


그래서 이 드라마가 에미상을 휩쓸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고 싶어요. <더 피트>는 공개되자마자 평단에서 “멜로드라마보다 의학을 우선시했다”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리얼리즘” 같은 극찬을 받았죠. 하지만 정말 의미 있었던 건 실제 의료계 사람들이 보낸 뜨거운 지지였습니다. “TV에 나온 응급 의학 묘사 드라마 중 가장 현실적”이라는 찬사가 쏟아졌죠. 제 주변의 현직 의사와 간호사들은 퇴근하고 이 드라마를 보는데 “너무 현실적이어서 내가 다시 출근한 기분이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더 피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올해 경쟁작들이 정말 쟁쟁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의 SF 스릴러 <세브란스: 단절>이나 영화 같은 스케일의 스타워즈 시리즈 <안도르> 같은 작품들을 제치고 <더 피트>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는 건 우리 시대가, 그리고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이야기하고픈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가 됩니다. 화려한 볼거리나 복잡한 설정도 좋지만, 결국에는 우리 발이 딛고 있는 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사람들의 진짜 감정을 이야기하는 작품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죠.



2025-09-15T035745Z_278499130_HP1EL9F0AVQBB_RTRMADP_3_AWARDS-EMMYS-1757908701.png
3094737_3355b.png




<더 피트>의 수상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1999년 <더 프랙티스> 이후 무려 26년 만에 에미상 작품상을 받은 ‘절차극’(매 에피소드마다 다른 사건을 다루는 장르)인데요. 요즘엔 시즌당 에피소드 수도 적고 다음 시즌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서 지친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더 피트>는 한 시즌에 15개 에피소드를 꽉 채워서, 마치 예전 TV 드라마처럼 꾸준히 시청자의 곁을 지켜줬습니다. 그러면서도 HBO 드라마답게 깊이와 완성도는 놓치지 않았죠. 이런 점들이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더 피트>의 성공은, 가장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한 삶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일깨워 준 셈이죠.









드라마가 끝나고 난 뒤, 우리에게 남는 것


<더 피트>를 보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지치고, 무거운 마음이 들어요. 하지만 그게 바로 이 드라마의 목적이자 사명이자 역할입니다. 우리에게 편안한 위로 대신,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을 똑바로 보게 만드는 것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목격자’이자 ‘참여자’가 됩니다.


제작진이 에미상 무대에서 수상 소감으로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그들은 존중하십시오. 그들을 보호하십시오. 그들을 신뢰하십시오.” 이 드라마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간절한 부탁입니다.



the-pitt-season-1-ep-11-32.png




<더 피트>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드라마입니다. 엉망이 된 이 세상의 모습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희망은 거창한 게 아니라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사람들을 존중하며, 이 힘든 세상 속에서 서로를 돌봐주는 아주 단순하고도 소중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The-Pitt.png



또한, 이 드라마가 큰 성공을 거두고 에미상을 휩쓸었다는 건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꺼이 그 고통의 현실에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드라마의 15시간 교대근무가 끝나고 난 뒤, 우리에게 남는 건 바로 그런 사람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의 온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피트> 시즌 2는 오는 2026년 1월 공개 예정입니다.






00_메일주소태그.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