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아픔을 박제하지 않고, 현재의 생명력으로 되살려낸 수작
11월 26일 개봉하는 하명미 감독의 <한란>은 제목 그대로 '추위(寒) 속에서 피어나는 난초(蘭)'처럼, 우리 현대사의 가장 시린 계절이었던 1948년 제주 4.3 사건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데려갑니다. 이 영화는 거대한 이념의 전쟁터가 아닌, 그저 살고 싶었던 한 모녀의 처절한 생존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영화의 배경은 1948년 겨울, 제주.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을 피해 한라산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20대 엄마 ‘아진’(김향기)과 여섯 살 딸 ‘해생’(김민채)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역 배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강인한 어머니로 변신한 김향기의 얼굴은 역사의 폭력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으려는 제주 여성의 강인함을 대변합니다.
이 작품의 가장 눈부신 지점은 ‘비극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에 있습니다. 감독은 4.3의 참상을 자극적으로 전시하거나 정치적인 구호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유도 모른 채 쫓겨야 했던 사람들의 공포와,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모녀의 애틋한 체온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숲속 동굴에 숨어 숨죽여야 하는 순간의 긴장감, 그리고 불타버린 마을을 뒤로하고 눈 덮인 산을 오르는 모녀의 뒷모습은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묵직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영화가 말하는 주제는 ‘생명의 존엄과 끈질긴 희망’입니다. ‘한란’은 실제로 제주 한라산에서 자생하며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꽃을 피우는 식물입니다. 영화는 이 꽃을 4.3이라는 역사의 한파를 맨몸으로 견뎌낸 제주 사람들에 비유합니다. 총성과 비명이 가득한 산속에서도 기어이 삶을 이어가는 아진과 해생의 여정은 죽음의 시대에도 생명은 결코 지지 않는다는 숭고한 진실을 증명해 냅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배우 김향기의 압도적인 변신입니다. 그녀는 서툰 제주 사투리와 흙먼지 뒤집어쓴 얼굴로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짐승이라도 될 수 있는 어미의 절박함을 온몸으로 연기합니다. 여기에 신예 아역 김민채의 맑은 눈망울이 더해져, 비극의 슬픔은 배가 됩니다.
<한란>은 70여 년 전 제주의 겨울에 바치는 진혼곡이자, 살아남은 모든 생명에 대한 헌사입니다. 아프지만 우리가 끝내 마주해야 할, 혹독한 역사의 겨울을 뚫고 핀 꽃입니다. 차가운 흙바닥에서 피어난 난초의 향기처럼, 이 영화가 전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위로는 올겨울 관객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