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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시인의 노래 <석류의 빛깔>

영화라는 매체가 어디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

by 조하나



영화라는 매체가 어디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권력의 검열이 한 예술가를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 목격하고 싶다면 11월 26일 개봉하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이 저주받은 걸작을 마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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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그나마 해외 망명의 기회라도 얻었던 것과 달리, 파라자노프는 이 영화 때문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철저히 응징당했습니다. 그는 반체제 혐의로 4년간 투옥되었고, 무려 17년 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했습니다. 감독의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가 품었던 무한한 영화적 가능성은 감옥의 벽 뒤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빼앗긴 이름, <석류의 빛깔> vs <사야트 노바>


우리가 이 영화를 <석류의 빛깔(The Color of Pomegranates)>이라 부르는 것부터가 실은 비극의 시작입니다. 감독이 원했던 원래 제목은 <사야트 노바(Sayat Nova, 노래의 왕)>였습니다. 18세기 아르메니아의 전설적인 음유시인 아루틴 사야딘의 일생을 기리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소련 검열 당국은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가 고취되는 것을 경계하여, 영화의 제목을 멋대로 바꾸고 내용을 난도질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감독에 대한 예우를 담아 이 영화를 <석류의 빛깔 / 사야트 노바>라고 병기해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서사를 거부한 ‘살아있는 회화’


영화는 전기 영화의 문법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파라자노프가 스크린 위에 펼쳐놓는 세계는 움직이는 영화라기보다, 차라리 ‘살아있는 회화’에 가깝습니다.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적인 구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인물들, 그리고 대사를 대체한 마임과 상징들은 관객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이 난해한 이미지를 견디고 나면, 관객은 현실을 벗어난 기이한 평행세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붉은 피처럼 번지는 석류 즙, 펄떡이는 물고기, 낡은 고서와 레이스 등은 시인의 고뇌와 사랑을 넘어 아르메니아의 수난사를 시각적으로 은유합니다. 특히 감독의 뮤즈 소피코 치아우렐리가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1인 6역을 소화하는 모습은, 예술가의 영혼 안에서 모든 경계가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대담한 시각적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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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지우려 했던 민족의 기억


소련이 그토록 이 영화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명백합니다. 영화 곳곳에는 아르메니아의 숨결이 생생하게 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동과 유럽의 교차로인 카프카스 지역의 독특한 풍습, 양털을 깎아 융단을 짜고 포도를 밟아 와인을 만드는 노동의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전통이 화면 가득 출렁입니다. 검열관들은 이 압도적인 ‘민족지적 풍경화’가 체제 안보를 위협한다고 믿었고, 결국 감독을 수용소로 보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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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되살아난 영감의 원천


비록 감독은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시대를 초월해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주도한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영화는 만신창이가 된 필름을 딛고 되살아났으며, <더 폴>의 타셈 싱 감독은 파라자노프를 자신의 예술적 스승으로 꼽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증명은 팝 스타 레이디 가가의 <911> 뮤직비디오입니다. 가가는 뮤직비디오 전체를 <석류의 빛깔>에 대한 오마주로 채우며, 20세기의 박제된 이미지가 21세기의 팝 컬처와 얼마나 세련되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석류의 빛깔 / 사야트 노바>는 머리로 이해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망막과 심장으로 체험하는 거대한 시(詩)이자, 권력의 폭력 앞에서도 끝내 지워지지 않은 한 예술가의 숭고한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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