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눈으로 조각한 쓸쓸한 미학
11월 27일 개봉하는 <속초에서의 겨울>은 포스터만 보면 프랑스 영화 같지만, 스크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와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감독도, 남자 주인공도 외국인이지만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경계인(Diaspora)'의 정체성을 품고 있습니다. 원작은 한국계 작가 엘리사 슈아 뒤사팽에게 전미도서상을 안겨준 동명 소설이며, 프랑스계 일본인 코야 카무라 감독이 100% 속초 올로케이션으로 완성한 한국-프랑스 합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적막만이 감도는 속초의 겨울을 무대로 합니다. 낡은 펜션에서 일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수하’(벨라 김)와, 새로운 영감을 찾아 그곳을 방문한 중년의 프랑스 만화가 ‘케랑’(로쉬디 젬). 영화는 우연히 마주친 두 이방인이 춥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고 관찰하는 과정을 느리지만 밀도 있게 따라갑니다.
해외 영화제를 통해 먼저 공개된 후 평단은 이 작품을 두고 "차갑고 건조하지만,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섬세한 수작"이라 입을 모았습니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익숙한 공간의 낯선 재발견’입니다. 코야 카무라 감독의 카메라는 우리가 흔히 알던 관광지 속초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쓸쓸하고도 매혹적인 풍경으로 바꿔놓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항구의 칼바람, 비릿한 수산시장, 그리고 하얀 종이 위로 번지는 검은 잉크의 사각거림까지. 영화는 서사를 설명하기보다 공간의 질감과 온도를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합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이 정적인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신예 벨라 김은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 경계인의 불안을 완벽히 표현해 내며 "올해의 발견"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프랑스 국민 배우 로쉬디 젬은 묵직한 존재감으로 영화의 중심을 잡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뻔한 로맨스가 아닌, 서로의 결핍을 응시하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유지되며 세련된 여운을 남깁니다.
다만, 이 영화는 친절한 서사나 극적인 사건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불친절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진첩을 보는 듯하다"는 평처럼, 기승전결의 속도감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분위기에 깊이 침잠하는 '무드 피스(Mood Piece)'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파민이 터지는 자극적인 영화들에 지쳤다면, 낯선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나를 마주하게 되는 이 고요하고 서늘한 겨울 여행은 당신에게 깊은 미학적 충족감을 선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