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이고도 복고적인, 게다가 대중적이면서 세련되기까지 한 음악으로 한국 인디 씬에 신선한 충격을 준 인물’이라는 평단의 평가는 우선 뒤로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인디밴드는 몰라도 검정치마는 안다”는 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항상 따라붙는 ‘코스모폴리탄’과 ‘뉴요커 출신’이라는 태그들은 검정치마라는 담백한 이름에 이국적이고도 세련된 이미지를 더한다.
과하지 않은 스타일리시함과 무심함 사이를 오가며, 음악으로 적당한 위트와 멋을 부릴 줄 아는 원맨 프로젝트 검정치마 조휴일이 지난 7월, 정규 2집 앨범 <Don’t You Worry Baby (I’m Only Swimming)>과 함께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돌아온 검정치마의 음악은 수수했다. 마치 멋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은 멋을 버릴 줄도 안다는 것처럼.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희언
2008년 검정치마의 데뷔 앨범 <201> 발매와 함께 조휴일은 ‘한국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재미교포 출신 뮤지션’이라는 캐릭터를 얻었다.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점이 사람들에겐 호기심이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조휴일에겐 ‘미운털’과도 같았다. 씬 안에서 혼자만 겉도는 것 같은 이질감 같은 게 분명 있었다. ‘쟨 어디서 왔길래, 연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활동을 하냐?’ 견제가 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은 순수한 실력이나 능력보다 뭔가 신파적인 에피소드를 찾으려고 하지만, 음악 외적인 부분들이 부각되면 될수록 그게 자신에게 오점이 됐으면 됐지, 도움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그다. 열두 살, 초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난 뒤 한국에서 1집이 나오기 전까지 청소년기를 미국에서 보낸 그도 이민 1.5세대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성은 부정할 수 없다. 문화적인 갭에서 오는 혼란이나 고독, 세상을 보는 시각은 그의 음악에 그대로 옮겨졌으니까.
음악을 처음 시작한 건 언제예요?
중3 때 기타를 치기 시작했어요. 그때 제가 살던 곳이 뉴저지에 있는 주택가였는데, 정말 주변에 아무 없는 곳이었어요. 물론 공연 같은 건 꿈도 못 꾸던 때였고, 기껏해야 지하실에서 애들끼리 모여서 노는 게 다였어요.
한국에서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요?
처음부터 계획을 치밀하게 짠 건 아니고, 2004년 여름쯤 교포 친구들이랑 같이 한국에 나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우리 한국 온 김에 밴드 해볼까?” 한 거죠. 그땐 펑크에 미쳐있었어요. 펑크만 했었죠. 나름 노래에 자신이 있던 시기였어요. 악기 하나 못 다루는 친구들을 대충 가르쳐가지고,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오디션을 봤어요. 근데 욕만 실컷 먹고 나왔죠. 클럽 사장님이 우리 공연 보고 “너네 안돼” 하더라고요, 테이블에 앉아 손톱 깎으면서.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놀다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그때 친구들이랑 다시 얘길 했죠. 앨범을 만들어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자고. 그래서 친구들이랑 무작정 뉴욕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뉴욕 전체가 큰 도시라 맨해튼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산들이 많거든요. 저는 대학교 휴학한 상태였고, 애들은 고등학교 이제 막 졸업했고. 그렇게 혈기 왕성한 애들을 데리고 산속에 3개월 동안 있었어요. 밤 되면 캄캄해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마치 개들을 철장에 가둬놓은 것처럼 애들이 미치더라구요. 그렇다고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웃음) 그때 꿈은 되게 컸었는데, 실제로 한건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그게 지금의 검정치마 전신이 됐던 것 같아요.
굳이 한국에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뭐예요?
한국에 잠깐씩 들어왔을 때마다 보고 들은 밴드 음악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음악을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땐 어렸고 뭔가 정리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시기여서, 그 사이 멤버들도 많이 바뀌고… 어리고 거친 영혼들이었어요. 음악적으로 진지하거나 재능이 있는 애들도 아니었고. 학교 휴학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던 제 유일한 낙이 한국인 친구들과 밴드하면서 음악 만드는 거였는데, 전 그걸 가지고 뭔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무모하게 시작했던 음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음악에 관심 있고 재능 있는 유학생이나 교포 친구들을 멤버로 꾸려나갔죠. 그러면서도 한국에 가서 음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어요. 그 기간이 한 1년 정도 돼요.
정서적으로 한국 대중과 공감하기가 더 쉽다고 생각한 건가요?
아니요. 그때 저한테는 한국말로 가사를 쓰는 게 참 힘든 일이었어요. 굳이 한국에 가서 음악을 해야겠다 결심이 있었다기보다 시작해 놓은 게 있으니, 이걸 마무리 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준비를 잘해서 한국에서 데뷔를 하면 잘 될 거란 생각이 있었어요?
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앨범 나오기 전에 음악 몇 곡을 가지고 2007년 잠깐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을 했었어요. 그때 검정치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냉담했어요. 음원에 대한 반응도 그렇고, 라이브에 대한 반응도 그렇구. 그때가 국카스텐, 장기하와 얼굴들이 쌈싸페 ‘숨은 고수’ 되고 한창 주목받기 시작할 때였는데, 우리도 그걸 하나의 돌파구로 생각했었거든요. 우리 이거 되면 페스티벌도 나가고 주말 공연도 뛰겠구나 했는데, 결과가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한국 사람들은 음악을 듣는 게 내 기준과 많이 다르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막상 음악 들어보면 우리보다 수백 배 구린 밴드들이 너무 많고, 아무리 봐도 검정치마가 특별한데 아무도 안 알아봐 주니까 그 상황이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검정치마는 한국 음악 씬에서 전혀 안 통하는 음악이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2개월 정도 한국에 머물다가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근데 생각해 보니 그 음악들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그 길로 바로 앨범 작업을 완성했어요. 앨범에 영어 노래도 있는 이유는 한국에 돌아가서 이 앨범을 발매할 건가, 미국에서 그냥 이렇게 쭉 작업을 할 건가,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확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다 결국 다음 해 한국에서 정식으로 앨범을 발매했어요. 대단한 반응이었구요. 같은 음악인데도 1년 만에 달라진 반응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흐름을 잘 탄 것 같아요. 그때가 인디밴드 씬 자체의 흐름이 굉장히 좋아질 때였으니까. 검정치마가 그 흐름을 형성한 것도 있었고. 음악만 좋으면 진심은 어디서나 통한다 말들 하지만, 솔직히 그건 다가 아닌 것 같고. 운도 좋아야 하고, 시기도 잘 타야 하는 것 같아요.
데뷔 앨범 반응마저 영 아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다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겠죠. 지금 이 자리에… 아마 없었겠죠.
성공적인 데뷔 앨범 이후 검정치마의 활동이 마냥 순탄했던 건 아니다. 소속사와 뮤지션 간의 불미스러운 일로 잡음이 일었고, 검정치마는 다시 한번 음악 외적인 가십과 오해들에 휩싸여야 했다. 상처받은 마음과 만신창이가 된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널 작은 조각배에 올랐을 그의 뒷모습이 2집 앨범을 받아 든 순간에서야 떠올랐다. 조휴일은 이제와 태연하게 그것은 상처가 아니었노라 부정하지 않았고, 또한 그 상처를 무기 삼아 엄살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 사이 그는 배신과 상처를 극복해 내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하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검정치마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까 했어요. 레이블과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을까 걱정도 하고….
그건 한국 음악 씬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죠 뭐… 이제 그런 거에 대해 많이 초연해졌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어렸고, 활동을 막 시작했던 때라 뭘 잘 모르던 시절이었죠. 사실 그게 나름대로 상처긴 해요. 하지만 그게 좀 특별한 케이스일 순 있겠지만, 사회 생활하면서 제가 처음으로 배운 아주 큰 레슨이기도 했죠.
음악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나요?
에이~ 그만두면 어떻게 해요.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그건데…. (웃음)
적어도 ‘내가 더러워서 한국에선 음악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러기엔 제가 너무 아깝잖아요. ‘젠장, 더러워서 나는 자살할래’와 ‘더러워, 다 죽여버릴래’ 중에서 전 후자 쪽이에요. 1집을 낼 땐, 내가 나 자신에게 가진 기대치만 있었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가진 기대치는 아예 없었잖아요. 근데 1집 이후로 사람들의 기대치라는 게 생겼고, 저도 거기에 어느 정도 부응해야겠고. 네, 사람들의 기대 때문에라도 앞으로 모든 앨범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1집이 잘됐기 때문에 2집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잖아요. 그걸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죠. 한국에서 적응이 힘들었건,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그게 저한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음악은 제가 만드는 건데, 외부 요인의 영향 때문에 음악 하는 것 자체를 피하거나 기피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부모님은 지금도 미국에 계시나요?
아뇨. 미국 생활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셨어요. 제 국적은 미국이구요. 2집 작업을 하러 미국에 나가있을 때 이미 미국에 우리 집은 없던 상태였죠. 거기서 그냥 자취방 얻어서 살면서 스튜디오 왔다 갔다 하며 녹음하고 그랬어요.
미국에서 작업을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실 여행 다니고 돌아다니는 걸 싫어해요.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하지. 그래서 한국에서 1집 활동하는 동안 미국에 대한 향수가 컸던 것 같아요. 2년 정도 한국에 나와 있었는데, 집에서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게 처음이었거든요. 되게 돌아가고 싶었어요. 미국은 한국 아파트와 달리 대부분이 단독 주택이잖아요. 그래서 미국에선 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기 영역에 대한 애착감이 남달랐어요. 한국 아파트는 온통 사각형이고 전부 똑같이 생겼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아요. 지하실 내려가는 계단, 나무 목재 무늬부터 뒷마당 풍경, 마주 보이는 집 모양, 각 창문마다 보이는 풍경도 다르고. 제가 집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단 걸 한국에 와서 더 절실히 느꼈어요. 저는 모든 곡 작업을 미국 집에서 했었고, 집에서 생활하는 패턴에 익숙했었거든요.
이젠 한국이 ‘Home’이 됐네요.
네. 제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그곳이겠지만, 이제는 여기(한국)가 집 같죠. 옆에 있는 사람들도 집의 일부분이 될 수 있으니까… 이젠 여기가 더 집 같아요.
휴일씨 블로그에 “2004년 본 서울은 황홀했다”고 적었더라구요. 지금은 강남과 강북의 정서적인 차이를 알아챌 만큼 한국 정서에 많이 적응한 것 같은데….
저도 한국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한국인인걸요. 미국과 한국, 두 문화 자체가 다르지만 두 문화를 모두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어요. 미국 문화도 잘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지만 완벽하게 익지는 않죠. 한국 문화도 마찬가지고. 특히 ‘관계’ 같은 경우가 그래요. 분명 이해하는 정서고, 한국적으로 당연한 정서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내가 하려면 잘 안 되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외아들’ 가사가 나왔군요. (웃음)
2집 노래들 가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많겠어요. 노래는 노래일 뿐, 해석하기 나름이겠죠. 거기에 제가 의미를 부여하거나 설명하면 안 돼요. 그러면 노래가 가진 매력이 반감되거든요. 설명을 해야만 그 노래가 사람들로부터 공감과 이해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노래로써 매력이 없는 거예요.
1집 활동하면서 겪은 일들이 검정치마에겐 어떤 변화를 줬나요?
이젠 아무도 안 믿겠다는 결심 같은 게 생긴 건 아니구요. 인간관계에서 요령이 좀 생기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제가 겪었던 일이 특별한 일인 것 같진 않아요. 누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겪는, 성장통 같은 거니까요.
조휴일은 2집 앨범의 노래 가사를 통해 상처에 대해 말한다. 어린애 떼쓰듯 칭얼대지 않고, 대단한 비장함도 없으며, 그저 담담하고 무심하게 자신의 상처를 노래한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더 애잔하고, 오랜 여운을 남긴다. 이런 느낌엔 담담한 가사만큼이나 어쿠스틱한 사운드도 한몫을 했다. 친구들과 동네 창고에서 천방지축 내내 음악만 하던 소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맨발로 길을 걷고, 하늘을 바라보고, 바다를 건너며 세상에 내던져진 듯한, 검정치마의 또 다른 음악을 들으며 우리가 공감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노래하는 두려움이나 아픔, 배신, 상처들이 우리가 세상을 살며 겪어온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2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 것 같아요?
호불호가 많이 갈려요. 실망하고 떠난 팬들도 있고, 2집을 더 좋아해 주는 팬들도 있고, 새로 생긴 팬들도 있죠. 하지만 그건 앨범이 나올 때마다 밴드로서 감수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앨범이 나올 때마다 기존 팬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오히려 그거야말로 밴드에겐 최악의 상황인 거잖아요.
2집은 ‘뿅뿅거리는 음악’ 대신 담백하고 심플한 어쿠스틱 사운드로 채워진 것 같아요. 마음에 힘을 빼고 편하게 작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사운드에 가까워진 건가요?
노래를 대부분 통기타로 만들었어요. 그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때니까 가사는 술술 나왔죠. 그렇게 쉽게, 자연스럽게 쓴 곡을 스튜디오에 가지고 가서 뭔가 인위적이고 화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옷을 입히기 싫었어요. 그냥 노래와 노랫말에 어울리는 옷을 입히다 보니, 그게 어쿠스틱 사운드가 된 거예요.
어쿠스틱 사운드가 가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아무래도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연주나 멜로디보다 가사가 더 부각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긴 했어요.
다른 인터뷰에서 “2집은 3집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란 이야길 했는데, 이번 앨범은 검정치마의 앨범을 기대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선물 같은 의미도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선물까진 아니지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했어요. 1집을 내고 나서, 뭔가 정말 대단한 걸 하고 싶은 욕망은 어떤 뮤지션이든 가지고 있을 거예요. 물론 저도 그랬어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내가 만든 노래들을 남들에게 들려주기 모자라다, 부끄럽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떳떳하지 못할 거 같았어요. 1집에 비해 2집 노래들 자체가 덜 캐치하고, 그렇다고 사랑을 주제로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노래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모든 노래들이 내가 편하게, 자연스럽게 작업한 결과물들인데, 대중성이 덜 하다고 해서,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칠 것 같다고 해서 꺼려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을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음악 활동을 길게 보고 있다는 건가요?
네. 굉장히 길게 보고 있어요 저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앨범 하나로 그걸 다 하려는 게 아니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천천히, 차근차근 해나가고 싶어요.
좀 이른 질문이지만, 다음 앨범 구상은 끝냈어요?
네. 이미 노래들은 다 써놨어요. 늦어도 올 겨울부터 작업에 들어가는 게 목표예요. 빠르면 내년 초부터 녹음을 시작할 계획이고, 내년엔 더블 앨범으로 3집을 낼 생각이에요.
작업량이 굉장히 많은가 봐요. 부지런하기도 하고….
에이~ 2집 나오는데 3년이나 걸렸는데요. (웃음) 1집 나오기 전에 이미 작업량이 상당했어요. 미발표곡만 해도 200곡이 넘어요. 1집이 수많은 곡들을 추리고 추려서 괜찮은 것들만 모아 놓은 ‘한 다발’이라면, 2집은 1집이 나온 이후로 쓴 곡들을 특별히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놓은 결과물이에요. 뭔가 고르고 멋을 낸 게 아닌, 자연스러운 거에 가깝죠.
‘내 색깔을 이렇게도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로 자신만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는 거네요.
처음 시작한 장르는 펑크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1집이 나올 때도 혼자 집에서 만드는 음악들 중엔 어쿠스틱도 많았어요. 2집을 변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 이게 변화라기보다는 그저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아티스트 컬렉티브를 만들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걸로 인한 한계는 없어요?
지금은 조금 더 셀렉티브하게 자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니까 자유롭고 좋아요. 검정치마의 음악적 방향과 맞는 성향의 공연을 조절할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 한계보다 오히려 가능성이 무한해져서 좋아요. 요즘은 필름이나 음악을 집에서 랩탑 하나로 충분히 작업할 수 있잖아요. 검정치마 1집도 실제로 그렇게 제작했구요. 홍보 면에서도 인터넷이나 SNS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평해졌어요. 자본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게 안 나온다는 건 변명이에요.
2집 앨범의 컨셉이 ‘바다 위를 홀로 떠다니는 외로운 항해’잖아요. 지금도 검정치마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나요?
진짜 그렇죠. 언제 파도가 올지 모르는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어요.
목적지는 정해진 항해인가요?
네. 괜찮은 정규 앨범이 최소한 5장은 나왔으면 좋겠어요. 누가 들어도 부정할 수 없는 정말 괜찮은 앨범이요.
검정치마의 1집과 2집은 ‘Top 5’에 들어가나요?
네. 전 개인적으로 1집과 2집 모두 맘에 들어요. 앞으로 3장 정도 괜찮은 앨범을 더 내면, 그다음부턴 좀 더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미국에서 준비한 2집 앨범을 손에 들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바다를 건너며 조휴일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에게 어떤 ‘희망’ 같은 게 있었을까. 바다를 건너온 그의 앨범은 결국 그의 손을 떠나 우리에게 넘겨졌다. 그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없을 만한 대중성 없는 이야기라 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의 노랫말과 멜로디를 곱씹으며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 공감하는 사람들 또한 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항해는 이제 막 시작됐다. 몇 번의 파도를 만나긴 했지만, 다정한 앵무새와 변하지 않는 햇살과 바람도 만났다. 이제 그는 파도를 만나도 쉽게 난파하지 않을 단단한 돛을 하나씩 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밉지 않은 여유까지 부린다. “걱정하지 마, 자기야”라며 다정한 말을 건넬 만큼.
F.OUND magazine, October 2011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내가 인디 매거진 <F.OUND>의 창간호를 만든 2010년부터 홍대 인디 음악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검정치마, 십센치 등이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을 이어 꾸준히, 그리고 처연하게 홍대 골목 작은 라이브 클럽 무대에 섰다.
그때 내가 본 검정치마는 '처연'과 '초연' 사이 어디쯤이었다. 생각보다 서로 대면대면하고 잘 어울리지 않는 홍대 인디 씬에서 미국서 살다 온 검정치마는 슬쩍 떨어진 섬처럼 떠다녔다. 쿨하고 무심하고 세련된 듯하면서도 지질한 인디 감성이 유행을 타던 시기였다.
그런 정서와 감성이 그만의 스타일이 되어 검정치마가 홍대에서 꽤 잘 나가는 인디밴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인디 레이블 사장이 소속 뮤지션 앨범 판매, 공연 수익 등을 오랫동안 횡령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사람들이 정말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인디 씬의 구성원이자 관찰자로서 굉장히 분노했는데, 이후 벌어진 일들에 더 절망했다. 끼리끼리 해 먹는, 좁디좁은 한국의 인디음악 씬에서 다른 인디 레이블이나 음악평론가 등 관계자들은 모두 입을 싹 닫았는데, 이게 외부로 알려져 다 들춰내면 자신들 또한 같은 짓을 했다는 게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배 고프고 추워도 '인디' 신을 사랑하는 지지하는 이유를 진정성에서 찾았는데, 그 모든 건 어쩌면 허상이자 허영이 아닐까, 속이 허해졌다. 이토록 '젊음'은, '청춘'은 끝없이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버려지는구나.
공연비 20만 원 중 10만 원을 받아도 계속 무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국카스텐 멤버들에게 그 사장을 쫓아가 화라도 내라고, 뺨이라도 때리라고 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않고 그 모든 걸 그냥 무대에서 풀어 버렸다.
그리고 사라진 검정치마가 그 사기 친 인디 레이블 뒷담화로 가득한 2집을 들고 나타났을 때 나는 버선발로 그를 반겼다. 포기하지 않아 줘서, 음악을 계속해줘서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음악을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