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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워커 디자이너|먼지만큼 아는 것은 의미가 없다

by 조하나


바쁜 움직임과 도시의 소음에 익숙해져 서울 한가운데에 이런 곳이 있는지 지나치고 있었다. 여유롭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한 가을 햇살이 조용히 비치는 곳,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소공동 맞춤 양복점 거리.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그곳에는 북적거림을 찾아 떠난 사람들로 휑하니 드러난 빈 공간이 많았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애잔한 감성으로 가득한 이곳에 또래의 두 청년이 터를 잡았다. 오직 재봉틀 한 대와 두 손으로만 옷을 만들고 있는 S.L.W.K(Sleepwalker, 슬립워커)의 디자이너 이현석과 이인우는 소공동 거리의 분위기와 꼭 닮아있다. 그들이 만드는 옷 또한 그들처럼 군더더기 없고 요란하지 않았으며 또 말이 없다. 시간이 멈춘 듯한 S.L.W.K의 소공동 쇼룸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그래서 거창한 이야기가 없었다. 오히려 인터뷰가 끝난 후에 묻고 싶은 게 더 많아졌고, 구체화되지 않는 상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들과의 인터뷰는 시끌벅적한 대화보다는 시간을 두고 조용히 주고받은 편지에 가까웠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희언










To. S.L.W.K : 가벼운 호기심으로 다가서다


정확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섣불리 단정 짓고 정의 내리길 좋아합니다. 에디터에게 슬립워커(S.L.W.K)가 그러했지요. 그러면서도 관심을 끊지 못한 이유는 세상에 내놓은 S.L.W.K의 결과물 때문이었습니다. 2007년 5월, ‘데일리 프로젝트’를 통해 4~5종의 티셔츠를 선보이면서 S.L.W.K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는 것,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금은 2010년 F/W 시즌 준비에 한창이라는 것, 어린 시절 친구로 만난 이현석과 이인우 두 청년이 디자인과 패턴, 재단, 재봉 작업을 모두 직접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S.L.W.K에 대해 아는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섣불리 짐작하고 예상하며 나름의 이미지를 위해 애썼나 봅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편견과 오해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겠지요.


S.L.W.K는 어떠한 생각이나 개념이 말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듯했습니다. 말로써 무언가의 의미가 규정지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요. ‘옷’으로 표현하는 S.L.W.K와 ‘글’로 표현하는 에디터와의 인터뷰는 자꾸 어긋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인터뷰의 수많은 말들 중 무게감 있게 가라앉은 것들만을 골라 기사를 쓰겠다는 에디터의 설명에 S.L.W.K는 “그래서 무엇을 알 수 있게 되겠냐”라고 반문했고, “모든 것을 알 순 없겠지만, 그래도 먼지만큼은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에디터의 말에 S.L.W.K는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답했었지요.


조심스럽고 예민하고 차가운 사람들이라는 첫인상으로 시작한 인터뷰였습니다. “인터뷰하지 말고, 그냥 이야기하며 놀다 가세요”라고 말하는 현석 씨의 말에 ‘정말 그래 버릴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조심스럽게 시작한 인터뷰가 끝날 때쯤 S.L.W.K는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의미를 부여해 억지스럽게 꾸며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S.L.W.K의 쇼룸에는 평소 보기 힘든 재봉틀 두 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재봉틀로 직접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해 유통까지 처리하는 느리고도 폐쇄적인 방식을 택한 젊은 두 청년을 두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고집쟁이들이라고. 자칫 외골수 성향이라 오해를 받을 법도 한 S.L.W.K의 방식을 둘러싼 궁금함이 바로 파운드 매거진이 S.L.W.K를 찾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좀 더 빠르고 편리한 것을 쫓아가는 세상에서 그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 S.L.W.K가 가고 있는 그 길은 어떤지 듣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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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F.OUND : 과정, 깊이 그리고 무게의 의미


S.L.W.K는 모두가 갖고 있을 법한 ‘옷’에 대한 가벼운 관심으로부터의 출발이었습니다. 우리의 시작에는 그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지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뚜렷한 목적 또한 없었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어렸고,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으며, 당장 흥미 있어하는 것에 열중했으니까요. 브랜드의 사업적인 구상보다는 유희나 자기만족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우연찮은 기회로 재봉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만드는 행위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옷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때 2권의 책을 빌려 입고 있는 옷을 뜯어보며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반복해 즐기는 것이 바로 일의 원동력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이러한 ‘계속됨’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깊이’를 발견했고, 해볼 만한 일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깊이 있게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던 즈음, 책을 많이 찾아보았습니다. 책을 통해 힘을 얻었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방식이 틀린 방식이거나 미련하고 힘들기 만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패션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감각에만 의존하거나 기초를 무시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옛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사람들 자체가 우리에겐 영감이 됩니다. 이들은 반짝이다 사라지는 순간적인 것보다도 더 오래 빛나는 어떠한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볍지 않은 옷’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흥미로 시작해 옷 만드는 일에 빠져들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문제에 봉착하고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만족하고 발전하며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는 이러한 ‘과정’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해결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더 많은 기회가 있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려면 순간의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더 깊은 영역을 표현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머릿돌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옷을 만드는 데에 다수가 취하고 있는 방식에 특별히 불만이 있었거나 반항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남들과 다른 새로운 방식을 취해야겠다는 생각 또한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우연의 힘이었고, 자연스럽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작업 방식의 모든 것은 ‘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전문 기술자의 손을 거치지 않고, 바로 뽑아내는 것뿐 우리의 작업 방식은 특이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옷을 퀄리티 있게 뽑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다만 현재 패션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식이기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따로 작업하지 않고, 한 곳에서 디자인, 패턴, 재봉의 작업을 거칩니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며, 구조상 불가능한 문제들이나 해당 디자인과 연결되지 않는 재봉법을 해결합니다. 상품의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우리는 급격히 흥미가 떨어집니다. 우리는 결과물보다 옷을 만드는 과정에 더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의 디자인은 어떠한 틀 없이 자유롭게 진행됩니다. 약간의 뉘앙스를 주긴 하지만, 직접적인 아이디어로 나타내는 방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맞는 쪽을 연구하고 있는 과정이고 어느 정도의 확신도 생기고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 우리만의 시그니처 디자인을 갖게 되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브랜드가 시작된 후, 학습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상태로 이제 어느 정도 머릿속에 생각했던 모습이 착오 없이 구현되는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매 시즌마다 재봉을 하다 보면 손을 통해 느낌이 옵니다. 이전에 비해 작업이 더욱 수월해지고, 옷의 퀄리티가 향상되고 있다는 발전의 느낌 같은 것 말이죠.


우리의 작업 방식을 두고 다수의 방식에 대한 반항심이라 오해하는 시선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고집스럽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편견을 갖는 것 또한 우리 자신은 그렇지 않기에 쉽게 넘길 수 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해결하는 것보다 우리 스스로 직접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일을 그 누구보다 우리가 더 소중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조금 더 깊게 고민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작업 방식으로 인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향한 시각이 부정적이고 고집스러울 것이라는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는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고 나아지는 것 자체에서 만족을 얻는 것일 뿐 좋은 환경이 있음에도 보이기 위해 억지로 힘든 길을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소공동에 쇼룸을 오픈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트렌드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애잔한 정서가 깔려있는 동네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무언가를 앞서 나가 트렌드를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방식이 아니기에 전통 방식을 가까이하고, 이를 존중함으로써 기본에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이곳에 들어와 작업하면서 우리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 나아가는 과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눈앞의 것보다 멀리 있는 최종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천천히 고민하고 생각하며 결단을 내리는 것,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의 의미입니다. 정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자신 있게 정의를 내리는 것과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걱정 없이 말하고 그려내는 모습, 확실해지고 단단해진 무너지지 않는 성향, 나를 지지해 줄 최고의 기술을 가진 몇몇 사람들, 좋은 시장으로의 진출 등 항상 머릿속에 그리는 모습들은 있지만, 이 또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리라 생각합니다.







소공동 쇼룸을 나오며


지금까지의 시간을 ‘학습과 습작의 과정’ 일뿐이라 말하는 S.L.W.K를 찾는 이들 또한 그들의 옷과 닮아있습니다. 5~6일 정도의 제작기간을 기다려 만난 S.L.W.K의 옷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기본에 충실한 마인드를 지지합니다. 견고하고 튼튼한 내구성과 위트 있는 디테일은 S.L.W.K의 기본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쇼룸에 놓인 바디에 걸쳐진 재킷을 보며 말했습니다. “저 재킷이 겉으로 보이기엔 주머니 세 개와 버튼 두 개로 이뤄진 것이 다인 것 같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옷 안쪽의 뼈대가 무엇보다 중요해요. 뼈대를 만드는 과정에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고, 우리는 그걸 배워가고 있는 과정인 거죠.” 그래서 그들은 소공동 거리의 맞춤 양복점 기능사들과의 대화를 즐기나 봅니다.


가벼운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오래 한 길을 가는 무게감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 배우고 깨달아가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과정을 지나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유별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온 어른들을 존경하며, 가볍지 않은 진중함을 배우고 있는 그들은 오늘도 소공동 거리에서 마른 한숨을 내뱉습니다. 기술자를 무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한국 패션계에서 전문 기술자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고, 자연스럽게 양성기관 또한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디자이너만을 꿈꾸고, 그 디자인을 제대로 구현해 낼 기술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실정입니다. 개선의 노력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지요. 어떤 젊은이도 오래된 거리의 맞춤 양복점에서 기능사들에게 일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화려한 런웨이의 꿈만 좇습니다. 이것이 바로 S.L.W.K가 디자이너인 동시에 기술자가 된 이유입니다.


그들이 택한 방식을 향한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불편해한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멀리서 가만히 서서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쉽게 편견을 갖고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보면, 그들 또한 우리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S.L.W.K는 그저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시간에 대한 무게감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이었을 뿐, 유난스럽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뷰의 시작에서 S.L.W.K는 “먼지만큼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알 거면 아예 모르는 것이 낫다는 그들의 말은 마치 “알 거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과 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3년을 꽉 채운 시간 동안 재봉틀과 씨름하며 옷을 분해해보고, 수차례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한 땀 한 땀 재봉질을 하나 봅니다. 분명 지금은 그들에게 최종적인 지점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발전할 모습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그들은 말로 무언가를 억지스레 포장하는 일보다 누군가에게 자신들이 노력하고 고심하며 공들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에 더욱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로 알리고, 또 그것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배우고 경험해 학습해가며 가벼움을 지양하고, 자신들의 결과물에 점차 무게감을 실어가는 것, 그것이 인터뷰를 통해 파운드 매거진이 알아낸 S.L.W.K의 먼지만 한 일부분이었습니다.



F.OUND magazine, October 2010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슬립워커 디자이너 현석과 인우를 인터뷰해야겠다 결심한 건 그들의 작업 방식이었다. 조선호텔 뒷골목 오래된 양장점이 모인 작업실에서 디자인부터 재단, 재봉까지 모두 둘이서 직접 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장인 정신’ 핸드메이드 옷은 입소문을 타고 마니아 층을 거느리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작업실을 방문했는데 녹음기를 켜는 순간, 둘은 입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는 뚫어질 듯 나만 쳐다봤다. 이제 막 창간호를 펴낸 초보 기자에겐 버거운 상황이었다. 인터뷰어를 향한 인터뷰이의 알 수 없는 적대감, 상대방이 진짜인지 가까인지를 가려내려는 팽팽한 기싸움, 몇 번씩 자리를 엎고 돌아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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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과 인우는 그동안 자신들이 만난 에디터들이 죄다 엉터리였다고 했다. 하지도 않은 말을 뒤틀어 쓰거나 우스운 질문을 해댔다고. 그들은 인터뷰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이런 순간들을 꽤 자주 마주했다. 책임감 없고 영혼 없이 일을 하는 에디터들에게 상처 받은 이들이 많았다. 미디어에 대한 아티스트들의 적대감과 냉소를 먼저 공감하고 이해해야 했고, 나는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준비해 간 질문지를 덮고 녹음기를 껐다. 그리고 순전히 내가 살아온 삶과 경험에서 비롯된, '인터뷰'가 아닌 '대화'를 청했다. 러시안 인형 하나씩 벗겨내듯, 고양이 걷듯 조심스럽고 겸손하고 배려있게, 그들에게 조용히 존중을 표했다. 서서히 그들이 마음을 여는 게 느껴졌지만 이미 나는 인터뷰 기사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들의 작업실에서 나오는 길,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함께 했던 포토그래퍼는 말없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밀어낼 거면 애초에 인터뷰 수락은 왜 했나, 그들을 잠시 원망도 했다. 도저히 기사를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감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잡지는 반드시 나와야 한다.


밤새 고민하다 도저히 문답식으로 쓸 수 없는 기사를 편지글 형식으로 써보면 어떨까 해서 무작정 시도해봤다. 첫 번째 파트는 내가 슬립워커 디자이너 듀오에게 쓰는 편지, 두 번째 파트는 그들이 나에게 쓰는 편지, 마지막 파트는 내가 매거진 독자들에게 쓰는 편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하게, 그들을 최대한 배려해 쓴 진실된 이야기였다.


인터뷰이가 극단적으로 냉소적이고 인터뷰에 협조적이지 않다고 그들을 비난하거나 피하는 대신 나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싶어 시도한 편지글 형식의 기사는 결과적으로 근사했다. 편집장은 처음엔 “이렇게 인터뷰 기사를 쓰는 건 네가 유일하다”며 고민하다 결국 오케이 했다.


책이 나오고 슬립워터 현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세심하고 진실된 인터뷰는 처음”이라는 감사의 인사였다. 옷을 디자인하고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젊은 장인’들에게, “먼지만큼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는 ‘젊은 어른’들에게, 나만큼이나 극도의 예민함을 가진 이들에게 내 진심이 통한 것 같아 벅찼다.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틀리지 않았구나, 안도했다. 이들과의 인터뷰는 초보 에디터였던 나에게 좋은 트레이닝이 됐다. 이들은 현재 ‘코스트 퍼 킬로’라는 도메스틱 브랜드를 만들어 쉽게 사고 입고 버려지는 옷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은 깊이와 무게는 절대 안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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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 퍼 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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