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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우(a.k.a 차차) | Nobody Knows

by 조하나

지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차승우다. 애초부터 기타를 메고 무대에 선 문샤이너스의 프런트 맨 ‘차차’를 만나고자 한 게 아니었다. 문샤이너스의 정규 앨범이 나온 지 햇수로 2년이 다 되었고, 그가 ‘만식’으로 출연한 <고고70> 개봉도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아무런 명분 없이 만난 때였기에 오히려 가장 적당한 때였다. 이건 ‘차차’가 아닌, ‘차승우’의 이야기니까.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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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2011’이 돌아보는 ‘청춘 98’


1990년대 말 홍대의 구석진 골목에서 펑크를 외치던 노브레인의 ‘차차’는 요란한 세기말을 지나온 젊은이들의 상징으로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다. 자신이 스스로 원한 거였든 사람들의 필요해 의해 만들어졌든, 노브레인의 출발에서 ‘차차’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묻기 전에, 그가 음악에 빠졌던 순간을 먼저 물어야 했다.



식상하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요. 유명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게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겠죠? (차승우의 아버지는 1970년대 음악을 했던 차중광 씨다.)

아무래도 기질 같은 건 물려받았겠죠. 그래서인지 음악에 남달리 끌리는 건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 트럼펫을 불면서, 브라스 밴드도 했었거든요.


초등학교에 브라스 밴드가 있었다고요? 좋은 학교 다녔구나.

제가 다닌 학교엔 있었는데. 리라 초등학교라고.


우와~ (웃음)

어린 시절 할머니 곁에서 자랐거든요. 그렇게 부잣집은 아니었는데, 당신 딴에는 내가 가수 아들이고 또 음악에 흥미 있어하니까 부족한 거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키워야지 하셨던 거 같아요. 내가 하고자 하는 건 다 할 수 있게 해 주셨어요, 할머니께서.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만져본 기타도 할머니가 사주신 거였거든요.


‘음악을 해야겠다’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나요?

초등학교 땐 멋모르면서 클래식 음악도 듣고 그랬어요. 삼촌이 음반을 많이 모으셔서. 누나 덕에 팝 음악도 많이 들었는데, 우연히 비틀스(The Beatles)의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듣고, 충격을 받은 거죠.


구체적으로 어떤?

전체적인 비트도 그렇고, 멜로디에서 확 끌어당기는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아요. 그냥 은연중에 ‘아! 이거다!’ 하는 느낌. 음악을 듣고 고무받은 그 순간을 뭐라 말로 표현을 못 하겠어요. 음악에 대한 개념이 스스로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충격을 받으니 더 대단했던 거겠죠. 지금까지도 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순간이 지금까지 음악을 하게 만들고 있군요.

그 감정을 계속 잊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구현하고 싶은 쪽이 된 거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중이고요?

네. 누군가에게도 내 음악을 통해 그런 화학반응이 일어나길 바라는 거죠.


음악을 직업으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좋으니까 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뿐이었지,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좋아서 계속하다 보니까 어느새 그런 상황이 되어 있더라고요. 전 나이를 점점 먹고 있고…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내가 이걸 업으로 가져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명확한 플랜을 세워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고.


학창 시절엔 인터넷이 지금만큼 발달했던 때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음악을 찾아들었어요?

아버지가 음반을 많이 갖고 계셨어요. 사실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진 않은데, 아버지 앨범을 몰래 가져다 듣고, 그러긴 했어요. 그리고 그땐 오히려 잡지 같은 활자 매체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걸 교과서 비슷하게 본 거죠.


그땐 수입 음악 잡지 같은 거 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지금 다시 하라 그러면 귀찮아서 못할 것 같은데, 그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거든요. 그게 여가였고, 생활이었던 것 같아요. 삶의 낙이었던 것도 같고.


학교에서도 음악 많이 아는 친구로 유명했겠어요.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편도 아니었고, 말썽을 많이 피우긴 했는데, 또 그렇게 놀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뉴 타입’이었죠. 이상한 음악 좋아하고. 근데 그 당시에 나한테 영향을 받은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마디로 제가 ‘배려놓은’ 애들인 건데, 그중 몇몇은 지금까지도 계속 음악하고 있어요.


노브레인의 차승우에겐 롤 모델이 있었나요?

비틀스 음악에 고무돼서 음악을 시작하긴 했는데, 사춘기 시절에 공교롭게도 펑크록을 접하게 된 거죠. 그땐 그냥 그런 세계가 멋져 보이더라고요. 평범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은연중에 ‘앞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라는 거랑 일치되면서, 나도 뭔가 좀 특별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외양을 따라 하기 시작했어요.


평범하지 않다는 건 ‘소수’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원래 ‘천편일률적’인걸 싫어했던 것 같아요. 뻔하고 비슷한 유행어나 패션, 유행가 같은 것들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던 것 같고.


비틀스로 출발해서 매니악한 펑크록을 거쳐 현재의 문샤이너스를 통해 로큰롤 음악으로 돌아왔어요. 록 음악의 원류를 찾아가는 건가요?

지금 같아서는 다 좋아요. 모든 음악은 다 하나니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동안 이것저것 찾아본 결과 요즘 드는 생각들은 ‘모두 다 같은 거다’에요. 펑크록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클래식에서도 느낄 수 있는 거죠. 예전의 나는 그걸 모르고 구분 지었던 성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다양하게 스타일을 구현할 수는 있겠지만, 장르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 같아요.


모든 장르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물론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이드라인이라는 게 있어야 하니까, 편의성 때문에 장르를 구분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인 거죠.


음악을 시작할 땐 장르의 구분이 없는 상태였나요?

내가 처음 음악 시작할 때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어요. 경계가 없었죠. 그러다 음악을 하면서 이게 라이프스타일과 합쳐지니까, 구분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한창 펑크록 할 때는 뭔가 좀 약하다 싶으면 성에 안 차고 그랬어요. 이미지 같은 것에 영향을 많이 받던 시절이었죠. 살랑살랑한 음악은 ‘소울’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사운드가 강한, 저항적인 음악을 좋아한 이유는 마음이 그랬기 때문이었나요?

그때는 반항심이 ‘있어야 할 것 같다’라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앞으로 이런 삶을 살아야겠기에 내가 하는 음악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거요.


노브레인의 ‘차차’는 본인이 선택한 건가요, 사람들이 만들어 준 건가요?

본인이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랬더니? 공감했던 사람도 있었던 것 같고…. 근데 내가 그런 거에 영향을 받은 것 같진 않아요.


펑크록을 할 땐 폐쇄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독창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이지, 폐쇄적이고 반항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그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숨 쉬며 살아가는 젊은이였을 뿐이죠.


‘세기말 불안한 청춘’의 단면이 투영된 존재로 차승우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솔직히 제가요, 누군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릇은 절대 안 되거든요. 그때 당시 제 불만이 있었고, 제 욕구가 있었고.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거였죠. 그 당시의 상황이 물론 투영되기도 했겠죠. 근데 책임감, 내지는 누군가를 대변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 짐 더미를 메고 가는 것도 참 고생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귀찮게 살기는 싫으니까요.


노브레인 1, 2집 앨범 가사들이 모두 개인적인 거였다고요?

모두 개인적인 이야기죠. 개인적인 게 아닌 게 어디 있겠어요. 사회에 대한 시각도 물론 제 개인적으로 보는 사회인 거죠.


그렇게 꺼내놓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공감을 얻은 거네요.

사실 저도 차마 꺼내놓지 못하는 세계가 있어요. 마음은 항상 전쟁 중이기 때문에.


스스로 필터링을 하는 건가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필터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펑크록은 상대적으로 필터링이 적은 장르로 인식되는 것 같아요. 그에 따른 기대치도 있고.

그런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필터링이 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나오는 음악 스타일이 아닐까요? 근데 그것조차도 나중엔 좀 귀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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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승우를 둘러싼 모든 허상과의 싸움


차승우의 인터뷰 기사는 대부분 그의 타고난 기타 실력에 집중되어 있다.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 또한 항상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인터뷰 기사 속에서의 그는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고, 자신의 매력 또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차승우가 인생에서 처음 맞이했다는 ‘위태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노브레인에서 나와 일본에 갔을 때, 굳이 음악을 전공으로 학교에 입학할 이유는 없지 않았나요?
그게요. 비자라는 걸 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서 명목상 학교에 입학한 거죠.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었을 사람인데 말이죠.
비자 때문이라니까요. (웃음) 그땐 쉬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도망인가?
도망이죠. 그런데 환경이 바뀌니까, 또 새로운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새롭게 개척할 것들이 많아서 온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외롭지는 않았어요. 마침 본의 아니게 밴드 생활도 하게 됐고. 얘기하자면 긴데… 일본에서 학교 다닐 때 제 행색이… 머리에 포마드 바르고 약간 좀 그런… 비주얼이었거든요. 일본에 그런 사람들만 모이는 옷가게가 있었어요. 제임스딘처럼 생긴 사람들이 모이는 옷가게요. 거기 가서 옷 사면서 샵 매니저랑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로큰롤 밴드를 소개받았어요. 씬에서 십 년도 더 된, 나이도 많은 밴드였죠. 거기서 귀국할 때까지 활동했어요.


일본에서의 밴드 활동이 지금 한국에서의 음악 생활에 영향을 많이 주나요?
안팎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가능성도 많이 열리게 된 것 같고. 일본에서는 아무도 내 존재를 모르고, 그저 한국에서 온 어리바리한 유학생으로만 알고 있었죠. 노브레인에서는 제가 프런트맨의 입장이었잖아요. 근데 일본에서는 프런트맨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막내의 입장이 된 거죠. 못하면 혼도 나고, 항상 긴장하면서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입장이 달라지니까 이렇게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밴드 하면서도 그때 생각하면서, 다른 멤버들 입장도 많이 생각하려고 해요.


노브레인에서는 안 그랬다는 건가요?
노브레인 때는 좀 독선적이었던 것 같아요. 변명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


필요악이었던 건가?
그렇죠. 결국 갈등이 심화되긴 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모두 다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심한 건 언제예요?
지금 같이 활동하고 있는 최창우(문샤이너스 베이시스트) 씨가 술 먹고 새벽에 전화했어요. 노브레인 시절부터 알고 지냈는데, 술김에 항상 “나중에 우리 같이 밴드 하자” 했었죠. 전화해서 “몇 년 전에 우리 한 약속, 잊지 않았지? 얼른 한국 들어와서 나랑 같이 밴드 하자” 하더라고요. 그 전화 한 통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전화 한 통으로?
네. 전화 한 통으로. 이미 타국 생활에 관성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3년 지나니까 이것도 할 만큼 한 것 같고.


싫증을 빨리 느끼나 봐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타지에서의 생활도 일상이 되어버리니까 슬슬 ‘한국에 돌아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전화를 받게 된 거죠.


음악은 안 질려요?
음악은 안 질리네요.


음악‘만’ 안 질리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내가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걸 수도 있겠고. 이게 없으면 나 자신이 아예 없어져 버리는 거기 때문에. 그러면 죽는 거잖아요. 무너지는 거잖아요 내가. 이건 싫증을 느끼고 자시고 할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을 하면.


내가 없어질까 봐 못 놓는 것도 있는 거예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음악을 오래 하면서, 매너리즘을 느낀 적도 있나요?
있죠. 요새 쭉 그랬어요. 최근 2년 동안.


문샤이너스 1집 나오고 나서?
그렇게 되네요.


공연을 엄청나게 했잖아요?
공연 많이 했죠 물론. 즐기면서 했지만, 그 과정이 좀… 그랬어요. 저로선 뭔가 상당히 폭발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 같은데, 이게 또 관성화가 되어버린 거죠. 하던 걸 계속하다 보니까.


그럼 앨범을 내시던가요. (웃음)
그러니까요.


가만 보니 자기 자신과 끝도 없이 싸우는 분이시네. (웃음)
그게, 당연히 음악으로, 이걸 구원할 건 새로운 음악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들지만. 그 시기가 힘들었던 이유는… 그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이 오더라고요. 컨트롤이 안 돼서.


본인 자신의 문제인 건가요?
마음의 병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 2년 정도 ‘망각의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본 공연들은 ‘망각의 상태’에서 올라간 무대였어요?
네. 그 상황으로써는 몸부림이었죠. 나름 치열했어요. 되게 필사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시기가 본인에게 자주 온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처음 왔어요, 인생에서.


보통 사람들은 차승우가 일본으로 떠났을 때가 인생의 큰 전환점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그때는 따분하고 그런 건 있었지만, 이번처럼 위태위태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땐 기조 자체가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나이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있겠죠. 그때는 어렸고, 젊었고. 지금은… 이것과 싸우는 게 보통 만만치 않더라고요. 상당히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기 때문에.


문샤이너스의 ‘차차’는 그런 거 안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랑도 싸워야 해요, 저는.


무대 위의 ‘차차’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고.
저는 박제가 아니기 때문에…. (웃음) 스스로 버릴 건 버리고,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거 가지고 다녀봤자 뭐가 좋겠어요. 쓰레기 등에 짊어지고 가는 게.


하지만 그런 이미지가 ‘차차’에겐 플러스가 되지 않았나요?
그래서 더 싫증을 많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최근 흔들렸던 것에 대한 답을 찾았나요?
네. 변화죠 뭐. 역시나.


그 답은 항상 있었던 것 같은데.
변화긴 변화인데, 어떻게 변할 것이냐……?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았어요?
모호하게나마 알 듯 말 듯한 그런 건데, 그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일단.


마음이 편해졌나요?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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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을 내리는 과정


일본에서 돌아온 차승우는 여전히 기타를 메고 무대에 섰다. 이미 기타 플레이어로서의 실력을 충분히 인정받은 그는 좀 더 성숙한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자신이 구현해내고자 하는 음악에 대한 설득력을 얻기 위한 그의 행보는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너무 일찍 ‘록스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길을 잃었다. 그가 외치는 ‘로큰롤’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울림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찾아왔다. 물론 씬 자체의 한계나 현실적인 문제들은 누구보다 차승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을 스스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라고 생각하나요?

저 자체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어쩔 수 없이 그런 수식어가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그러게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인 건가? 음악의 골자는 다 똑같은 건데, 록 밴드이기 때문에 인디나 언더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해는 가는데, 수긍은 못하겠어요. 모든 대중음악이 애초에 마이너부터 시작된 거 아닌가?


‘음악의 경계가 없다’라는 마인드로 바뀐 시기가 언제인 것 같아요?

글쎄요. 요즘은 제 능력이 안 닿는다는 걸 절감하고 있는 시기라. 설득력을 얻을만한 무언가가 나오게 된다면 그게 증명이 되겠죠.


차승우가 늘 외치는 로큰롤은 뭐예요?

그런 거 물어보시면 사실 정해진 대답밖에 안 나와서.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언어화되는 시점에서 왜곡이 생기고, 과장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럼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말고, 그림의 색깔만 말해줘요.

무지개색. (대답과 동시에 그는 개구쟁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모든 시작은 개인적인 인상에서 출발할 테고, 그걸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랑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것. 꼭 음악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모든 것을 통해서 구현해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임감이나 의무감 같은 것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제 나이도 있고, 이걸 일이 년 한 것도 아니고요. 의무감이 없다고 얘기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진 거 아니었어요?

100% 자유로울 순 없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는 이상.


지금 노브레인 시절 이야기할 때와는 정반대의 대답을 하고 있는 거 알아요?

글쎄요. 그때는 정리가 좀 안 돼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어떤 것에 대한 의무감이죠? 싫으면 안 하는 스타일이잖아요.

싫어도, 어쩔 수가 없는 게. 비슷한 상황을 자꾸 접하게 되면, 결국 뭔가 사람이 결론을 내기 마련이잖아요. 왜냐면 똑같은 실책을 반복하다가 ‘아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게 사람인 거고.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있다 보니까 저도 계속 결론을 내리는… 그런 거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야 되나 보다 하고.


이제 어른이 된 건가요?

그게 뭐 어른이 되는 거라면 그런가 보다 해야죠. 어쩌면 애초에 어른이었을 수도 있어요.


직접 쓴 가사들을 보면, 어른이 안 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아니에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가사들을 쓰는 거예요.


또래의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할 때, 생활이나 마인드가 더 자유로운 편이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일찍, 많이 생각하고 결론을 낸 게 많죠. 저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절대 체험하지 못할 것을 체험해 왔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면에서는 제가 더 어른인 거죠.


음악 하는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건, 현실과의 타협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차승우가 말하는 어른이 된다는 건 뭐죠?

실수가 줄어들고, 능수능란해지는 거겠죠. 그런 면에서는 아직 어른이 되는 건 먼 일 같기도 하네요.


음악으로 강렬한 인상을 구현하는데 스타일도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무대에 대한 관객들의 인상이 곧 화학반응이잖아요. 라이더 재킷을 입고 공연을 하는 것과 스마트한 차림으로 공연하는 것 중 그걸 보고 느끼는 데서 많은 차이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거죠. 수트 차림과 과격한 사운드는 서로 이질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인데, 그렇게 이질적인 면들이 서로 융화돼서 한 호흡으로 나오면 재밌겠다 생각했어요.


무대 위에서의 문샤이너스 수트 차림은 1950~60년대에 대한 오마주인가요?

비주얼적인 면에서는 한동안 그랬다고 생각해요.


다음 앨범엔 바뀐다는 건가요?

수트를 입고 무대에 오르는 건 이제 좀 할 만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옷도 많이 헐었어요, 이제는. (웃음) 그래서 다음 걸 즐겁게 찾아보고 연구하는 중이에요. 음악과 함께 스타일의 변화도 같이 가야 하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 같아요, 비주얼이라는 게. 저는 그 화학반응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시각적인 느낌과 청각적인 느낌의 충돌에서 오는 화학반응이요.


로큰롤에 대한 애착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나 무드로부터의 향수인가요?

저는 그게 상당히 재밌는 거예요. 그게 저한테는 ‘즐길 거리’에요. 어떤 밴드가 어떤 시대에 어떤 룩을 즐겨 입었나 하는 거. 그런 자료를 찾아보는 것도 되게 즐길만한 거라 생각해요.


본인이 겪지 않은 문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럼 미화되기도 하겠죠?

그게 판타지인 거죠. 전 그런 판타지가 좋아요.


모방을 통해 진화할 수 있는 거잖아요. 시대에 대한 오마주로 출발해서 결국 보여주고 싶은 건 뭐예요?

기본적으로 새로운 걸 해야지, 하는 마음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재미있는 거, 잘할 수 있는 걸 해봐야지, 하고 시작한 거죠. 지금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인데, 중요한 건 거기에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자기만의 소울이랄지, 감정이랄지. 그러면서 아마 새로운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차승우만의 ‘플러스알파’가 있어야겠네요.

가능성은 보이는데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고 있고. 애매모호하죠. 그것도 여지가 있는 거기 때문에 저는 좋아요. 목표가 있는 거니까.


그게 자신의 목표인 건가요?

네. 결국 나만의 시그니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주의적인 관점에서.


지금 스스로 만족을 못하는 건가요?

이거 가지고 만족을 할 순 없죠. 아직은 더 있는데. 제가 그걸 훌륭하게 구현을 못 해내고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조금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으면서도, 유니크한 걸 창출해내고 싶다는 욕구가 항상 있죠.


사람들의 인정이 전제되는 음악이 우선인가요, 자기만족이 우선인가요?

물론 자기만족으로 시작은 하는 거겠지만, 저는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규정을 지었어요. 펑크 시절부터 마찬가지였어요, 사실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펑크록을 하고 싶었지, 절대로 사람들의 귀에 거슬릴만한 무언가를 내놓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내가 처음 느꼈던 카타르시스를 무대나 앨범을 통해 제 음악을 듣는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거죠.


전달 방법이 노브레인 때보다 문샤이너스가 더 친절해진 것 같은데.

포장은 좀 더 달달해진 것 같은데 메시지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더 뒤틀려 있는 것 같아요. 포장방법은 의지 대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변해가듯이 자연스럽고 억지스럽지 않은 거죠.


본인의 영적 스승(Guru)은 음악인가요?

음악 그 자체죠. 제가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저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요.


음악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악이 결국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람이 바뀌면, 세상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지금. 절대적인 것이 나오면 분명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러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저는 그 짐을 지고 싶진 않아요.


제2의 비틀스나 엘비스 프레슬리는 왜 안 나오는 걸까요?

어떤 의미에서든 파이오니아(Pioneer)를 앞지를 순 없는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개척자잖아요. 그런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끝난 거’죠.


차차는 적어도 한국의 파이오니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도 짐인 건가?

사실 좀 무거워요.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믿고는 있지만, ‘음악이 그만큼 위대한 것이다’라는 것뿐이지, 나 자신과 동기화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실책이 너무 많은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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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i Guru De Va Om


비틀스의 노래가 흐르는 ‘3분’이라는 시간이 차승우의 인생에 주술을 걸었다. 결국 그에게 음악은 삶의 방편이자 이루고 싶은 꿈이 되었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눈이 되었다. 그런 그가 이제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또 다른 길을 찾고 있다. 그저 잠시 반짝이는 ‘록스타’가 아닌, 진정한 ‘로큰롤러’로서의 자신의 삶과 음악을 일치시키는 방법. 그는 결국 답을 찾아내 또 다른 결론을 내어 우리 앞에 설 것이다. 결국 모든 답은 자신 안에 있을 테니까.


<고고 70>의 ‘만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만식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지금 거의 예순 넘지 않았을까요? 잠시만…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그는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다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뭘 하든 간에 지금도 계속 ‘고고’하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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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 magazine, March 2011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나는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오롯이 홍대 길 위에서 보냈다.


2000년대 초반, 나는 대학에 다니며 힙합 전문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건너편엔 라이브 클럽 DRUG엔 ‘불머리(불대갈)’와 ‘차차’ 같은 1세대 펑크 로커들과 리스터들의 세상이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린 음악도 패션도 스타일도 달랐지만, 자정을 넘긴 모두가 취한 밤엔 아스팔트 도로 한가운데 앉아 서로 뒤엉켜 친구가 되었다.


홍대놀이터에 ‘차차’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차’의 기타 실력과 무대 위 카리스마는 선 굵은 상징이자 전설이 되었다. 2010년대, 인디 잡지 에디터가 되어 인터뷰로 ‘차차’를 만났다. 그는 답이 없는 무언가를 좇으며 방황하고 있었고, 나는 그와 인터뷰하며 어쩌면 그의 고뇌는 그에게 너무 큰 재능이 있기 때문이라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는 노브레인에서 나와 영화 <고고70>에 출연했고, 밴드 문샤이너스를, 그 뒤엔 더 모노톤즈 프런트맨이 되었다. 어떨 때 보면 이 세상 그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로커 같다가도, 또 어떨 때 보면 세상 번뇌를 모두 이고 진 듯 보이기도 했다. 강하면서도 여리고, 성숙하면서도 어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이든 숨김이 없다. 아닌 척도, 있는 척도, 없는 척도 안 한다. 그게 진짜 로커의 애티튜드다.


최근 6년간 음악적 활동이 없던 차차가 2025년 6월 말, 한남동 마르디메르크디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다. 김간지가 드럼을 쳤고, 한경록이 베이스를 들었으며, ‘불대갈’ 성우 오빠도 무대에 올라 노브레인 곡을 불렀다. 이제 오십이 가까워지는 대한민국 1세대 로커들의 공연장엔 여전히 10년, 20년 전 그들을 찾았던 관객들이 그대로 있었다.


“음악, 뭐 안 하고 살아도 되지, 하는 주의였는데, 역시… 재밌네. 역시… 이거였네” 하는 걸 보니 조만간 ‘차차’는 또 무언가 하지 않을까. 뭐, 그러다 안 할 수도 있고. 어쨌든 ‘차차’는 ‘차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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