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가키의 밤은 한낮의 태양보다 끈질겼다. 맹렬했던 폭우가 남기고 간 습기가 섬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검은 파도 소리마저 끈적하게 엉겨 붙는 듯한 열대야였다.
바 ‘피셔맨’의 붉은 조명과 소란스러운 열기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벤과 그녀 사이에는 으레 남녀 사이에 오갈 법한 얄팍한 탐색의 언어나 수작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 밤은 같이 있을래?”라거나 “내일은 뭐 할까?” 같은, 관계의 소유권을 확인하려는 비릿한 문장들은 애초에 필요치 않았다. 말없이 앞서 걷던 벤이 낡은 스튜디오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녀 역시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넓은 등 뒤를 따라 자연스럽게 현관을 넘었다. 마치 수십 년을 함께 유영해 온 심해의 물고기들처럼 그들의 궤적은 어떤 의문도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매끄럽게 포개어졌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스위치를 더듬어 켜는 그녀의 손길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았다. 천장의 낡은 실링팬이 덜덜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하자 벤은 말없이 냉장고를 열어 오리온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차가운 알루미늄 캔의 감촉이 그녀의 뜨거운 손바닥 위로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녀는 캔 입구를 만지작거리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바에서 마리코의 낭창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묘한 패배감. 어딘가에 단단히 정박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유일한 종착지가 되고 싶어 하는 비루한 정착민의 DNA가 만들어 낸 그 질척한 우울이 아직 발치에 맴돌고 있었다. 스스로가 벤의 기나긴 여정 속에 찍힌 수많은 점 중 하나, 잠시 쉬다 가는 ‘휴게소’ 혹은 ‘정류장’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를 향한 갈망보다 무거운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이 이국적인 섬까지 도망쳐 와서도 결국 누군가의 눈동자 안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드는 구차한 습성. 폐부를 짓누르는 이시가키의 습기는 그런 그녀의 자괴감을 더욱 무겁게 부풀리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 투명한 이방인 곁에서 끊임없이 관계의 이름을 지으려 했고, 보이지 않는 불안의 닻을 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벤이 다가와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젖은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서두르거나 무언가를 노골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그저 체온을 나누려는 무심하고도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 정직한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내면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불안의 끈이 기묘한 파열음을 내며 툭 하고 끊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벤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과거의 이력을 캐묻지도, 오지 않은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는, 오직 현재만을 깊숙이 유영하는 저 맑고 서늘한 파란 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속에서 그녀는 불현듯 아주 완벽하고도 눈부신 진실 하나를 건져 올렸다.
정의되지 않은 관계. 이름 지어지지 않은 사이.
한국에서 그녀를 숨 막히게 했던 것은 언제나 이름들이었다. 여자친구, 아내, 며느리, 혹은 대출금을 갚아나가는 성실한 직장인. 사회가 요구하는 그 견고한 이름표들은 언제나 특정 규범 안에 가두고 통제하기 위한 감옥이었다. 하지만 벤과의 관계에서 그녀는 아무런 이름표가 없었다. 소유권이 없으니 지켜야 할 의무도 없고, 약속된 미래가 없으니 배신당할 두려움도 없다.
정류장. 그래, 그녀는 차라리 정류장이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여행자가 머물다 떠나면 떠나는 대로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절대적인 무중력의 공간이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터이기에 비로소 누구든 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자유가 그녀에겐 있었다. 누군가의 영토가 되어 평생을 관리당하느니 차라리 아무 이름 없는 찰나의 정류장이 되는 것이 완벽한 해방이 아닐까.
그녀가 통과해 온 한국에서의 숱한 청춘의 밤들은 언제나 억압과 연기의 연속이었다. 이십 대 초반, 영등포 사창가 골목에 일부러 접어들어 서행하는 차 안에서 창밖의 여성들을 품평하며 낄낄거리던 남자 선배들의 옆얼굴. 그들은 여성의 몸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고깃덩어리와 과시용 전시품으로 분할했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가능한 본능으로 숭배받았고, 그녀의 몸은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을 채워주기 위한 스크린으로 전락했다. 짐승의 본능을 핑계 삼는 그 비열한 권력의 카르텔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남자의 거친 숨소리에 맞춰 적당한 타이밍에 가짜 신음을 내뱉으며 진짜 자신의 욕망은 깊은 심해로 가라앉혀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 이시가키라는 섬,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없는 벤의 낡은 스튜디오, 그의 투명한 심연 앞에서는 그 지긋지긋한 폭력의 굴레가 완전히 힘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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