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 준 BTS

낯선 백인들의 바다에서 나를 구원한 건 내가 기록했던 소년들이었다

by 조하나





우리는 그때, 모두 각자의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다


세상을 온전히 직시하겠다던 잡지 《라이프》(1936)의 창립자 헨리 루스의 거창한 선언,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기 위하여. 위대한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가난한 자의 얼굴과 거만한 자의 몸짓을 관찰하기 위하여. 수천 마일 떨어진 먼 곳의 일들과 숨겨진 일들을 보고, 놀라며, 서로를 알아가기 위하여"라는 문장을 가슴에 품고 뜨겁게 살던 시절이었다.



b57706ed-e9b4-4a49-88fc-850f6c145148.jpg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중에서



음악 전문 언론인으로서 매거진 인터뷰 현장을 치열하게 누비던 나의 2013년은 사실 지독한 피로감과 냉소로 얼룩져 있었다. 한쪽에서는 대형 기획사가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공장형 아이돌 시스템을 가동해 영혼 없는 결과물들을 컨베이어 벨트 위의 공산품처럼 찍어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디 씬 특유의 겉멋과 자아 충돌로 매일같이 무너지고 깨지는 밴드들의 위태로움이 존재했다. 나는 그 극단적인 두 세계를 부지런히 오가며 환멸을 삼키곤 했다.


전문가랍시고 누군가 영혼을 갈아 넣은 창작물을 비판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음에도, 정작 나는 무엇 하나 스스로 창작하지 못하면서 남의 결과물을 트집 잡고 얄팍하게 비판하며 객관적인 척 포장하던 치기 어린 관찰자였다. 매달 마감에 쫓겨 써 내려간 나의 활자들은 예리함을 가장한 허무에 가까웠고, 진짜 세상을 목격하겠다던 초심은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그 무렵, SM과 YG, 그리고 JYP라는 3대 대형 기획사가 철옹성처럼 장악하고 있던 아이돌 씬에서 제대로 된 주목조차 받지 못하던 이른바 '중소기업돌'이자, 텃세가 어마어마했던 인디 힙합 씬의 거센 조롱까지 양쪽의 철저한 무시와 비하를 동시에 받으며 등장한 일곱 명의 신인들이 데뷔했다. '아이돌'이라는 상업적 형식을 빌려 '힙합'이라는 날 것의 메시지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던 맹랑한 소년들, 방탄소년단(그때는 BTS라는 이름도 없었다)이었다.


"힙합을 한다면서 왜 굳이 메이크업을 하고 춤을 추느냐"는 한국 인디 힙합 씬의 날 선 편견과, 거대 자본이 밀어주는 든든한 주류 아이돌이 아니라는 이유로 쏟아진 아이돌 씬의 냉대 속에서도 나는 그들의 음악에서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기성세대가 만든 잣대에 억눌린 10대들의 분노를 직접 가사로 써 내려가는 진짜배기들이었다. 특히 무대 위에서 지민이 만들어내는 독보적인 춤선과 손끝 하나까지 감정을 실어내는 섬세한 안무는 내가 그들과의 인터뷰를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확신이었다.


"방탄... 소년단? 대체 이름이 그게 뭐냐?"며 의구심을 거두지 못했던 편집장을 힘겹게 설득해 내고, 이름조차 낯선 신인인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빛나게 찍어보겠다고 스튜디오 세트장에 온갖 금박이란 금박은 다 주워 모아 정성껏 꾸몄던 그 시절은, 나의 언론인 생활 중 가장 찬란하고 다정했던 애정의 기록이다. 내가 누군가의 진심을 오롯이 응원하며 활자로 남긴, 후회 없는 찰나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_빌보드_2주연속_1위_데뷔_7년전_인터뷰_반응_(4).jpg
방탄소년단_빌보드_2주연속_1위_데뷔_7년전_인터뷰_반응_(3).jpg
방탄소년단_빌보드_2주연속_1위_데뷔_7년전_인터뷰_반응_(2).jpg



랩몬스터(이 때만 해도 'RM'이 아닌 '랩몬'으로 자주 불렸다)가 소속사 스태프들의 권유 때문에 선글라스를 벗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정국은 갓 중학교를 졸업했고, 지민과 뷔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래도 자신들의 "인생이 힙합이다"라며 당찬 패기를 보이던 소년들은 한없이 투명하고 절박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 "제발 다음 앨범이 나올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말하던 랩몬을 기억한다. 그는 진심이었다. 당시 데뷔 앨범은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부엌 담당' 진과 '침실 담당' 제이홉이 좁은 한 방에서 서로의 잠꼬대를 들어가며 살을 부대끼고 버텨내던 짠하고도 다정했던 합숙 생활의 풍경은 그들이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강렬함 이면의 처절한 인간미였다.







백인들의 바다에서 배운 생존법


몇 해 후 나는, 한국 생활의 치열함을 뒤로하고 낯선 이국의 바다에서 다이빙 강사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깊은 수중 동굴부터 태국의 맑고 깊은 바닷속까지, 내가 마주한 것은 수압보다 더 숨 막히는 인종차별과 편견이었다.


내가 일하던 다이빙 센터는 온통 백인 유러피언들로 가득했고, 나는 그곳에서 유일한 동양인 여성이었다. 숨 돌릴 틈 없던 서울을 떠나 고요한 심해로 도망쳐 왔다고 믿었건만, 그곳에는 서구 백인 중심 사회가 견고하게 쌓아 올린 아주 오만하고 폭력적인 기본값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아시아, 그것도 태국으로 휴가를 온 한 덴마크 가족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동양인 강사는 아무래도 불안하다며 백인 강사로 바꿔 달라는 무례한 요청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한 스위스 젊은 청년은 내 면전에서 대놓고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동양인에게 무언가를 배워본 적이 없어"라고 농담이랍시고 다른 이들과 낄낄거렸다.


내가 PADI 마스터 인스트럭터라는 최고 수준의 강사 자격을 달고 있어도, 백인들이 태어나 배운 세상에서 나는 그저 작고 미덥지 못한 아시안 여자일 뿐이었다. 서양 백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설명이 필요치 않은 존재'라는 특권을 디폴트로 누리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자격이나 능력을 하얀 피부색 하나로 자연스럽게 입증 받지만, 동양인 여성인 나는 공기통을 메고 물속에 들어가 내 실력을 직접 증명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의심과 편견의 눈초리라는 무거운 납덩이를 매달고 견뎌내야만 했다.


그 폭력적인 편견과 차별 앞에서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 가만있으면 이 사람들이 나를 정말 물로 보는구나'.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미덕이라 배웠던 한국식 겸손이나 타인을 향한 배려는 이 거친 서양인들의 바다에서 철저한 약점으로 작용할 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꼿꼿하게 기개를 세웠고, 때로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독하게 나의 실력을 과시하며 스스로 맹수가 되어야 했다. 외롭고 서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고맙게도 곁에 있던 센터의 다른 백인 동료 강사들이 손님들에게 다가가 "이 친구는 내가 보장하는데 정말 훌륭한 강사이니 믿어도 좋다"고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설득해 주곤 했다. 그들의 선의는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백인 남성의 부연 설명이나 든든한 보증서가 있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전문가로 인정받는 내 현실이 참으로 씁쓸했다. 매일 아침 웃는 얼굴로 나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무대에 올라야 하는 삶은, 심해의 수압보다 더 무겁게 매 순간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한 피로감을 동반했다.





세상을 바꾼 BTS


내가 타국에서 낯선 이방인으로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며 고군분투하던 2017년과 2018년, 서울의 지하 촬영 스튜디오에서 내가 기록했던 일곱 소년들 역시 지구 반대편의 더 거대하고 견고한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주류 팝 시장의 문턱을 넘으려 할 때 쏟아진 것은 환호만이 아니었다.


아시아에서 온 ‘보이 밴드’를 향한 노골적인 인종 차별과 서구 중심주의가 빚어낸 지독한 멸시는 상상을 초월했다. 서구의 거대 시상식들은 그들의 예술적 성취를 정당하게 대우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글로벌 팬덤의 막강한 화력을 이용해 시청률을 올리고 소셜 미디어 지표를 채우려는 계산기만 두드렸다. 인터뷰 현장에서는 멤버들이 영어에 능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헛웃음을 짓거나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백인 진행자들이 허다했다. 그 무례함은 내가 낯선 백인들로 가득한 바다에서 겪었던 공기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년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조롱의 언어들을 수집해 음악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전 세계적인 헤이터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그들은 침묵으로 응수하는 대신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했다. 무엇보다 10년 넘게 자신들을 지켜준 팬들에게 더욱 집중하며 그 거대한 압박감을 오히려 유연한 추진력으로 바꾸어 현명하게 이겨냈다. 그들이 보여준 무대의 완성도와 압도적인 실력 앞에서는 그 어떤 백인 우월주의자들도 감히 시비를 걸 수 없었다.


단순히 인기 있는 아이돌을 넘어 시대의 목소리가 된 이들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의 기자가 한국 음악 시스템을 'K-강박'이라 조롱하며 깎아내리려 했을 때, RM은 피해자다움에 갇히지 않은 당당함으로 맞섰다. 그는 1930년대의 참혹한 식민 지배와 강제동원 문제에서 드러난 국가의 무능함을 직시하면서도, "우리는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해 왔고 그것이 K를 가능하게 했다"며 "K는 선구자들이 싸워 얻어낸 프리미엄 라벨"이라고 우아하면서도 날카롭게 응수했다.


코로나19 글로벌 팬데믹 시기,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극에 달했을 때도 그들은 주저 없이 목소리를 냈고, UN 연설을 통해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달했으며, 미국 백악관까지 찾아가 조 바이든 대통령 앞에서 전 세계 아시아인들을 위한 강력한 연대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들의 서사와 나의 궤적은 이국땅에서 교차했다. 똑같이 편견과 차별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던 나에게, BTS가 전 세계를 무대로 뚫어낸 거대한 길은 곧 가장 완벽한 방패가 되어 돌아왔다. 2013년의 내가 그들에게 빌려주었던 작은 지면이, 몇 년 뒤 내가 발 딛고 서 있던 타국 땅의 거대한 지지대가 된 셈이다.


BTS를 필두로 블랙핑크,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한국의 문화적 성취들이 세계의 정점을 찍으면서, 다이빙 센터에서 내가 만나는 백인 다이버 고객들의 공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더 이상 나는 '누군지 모를 동양인 여자'가 아니었다. 동양인에게 배우기 꺼려하던 사람들의 눈빛은 호감과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나는 더 이상 백인 동료들의 보증서나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세련되고 강력한 문화 자본을 가진 국가'에서 온 강사로 격상되었다. 설명이 필요치 않은 존재,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BTS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선물했다.


무명 시절, 누구보다 먼저 내가 알아보고 기록했던 소년들이, 마침내 낯선 바다에서 나를 설명할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며 구원해 낸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빚이 많다.





BTS 5집 <ARIRANG>, 채우기 위해 비울 수 있는 용기


오랜 시간 한국의 음악계, 특히 인디 뮤지션들과 가까이 지내는 동안 나는 '음악'과 '예술', '창작'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너무나 많은 희생의 민낯을 만났다. 밤샘 작업 후의 고양감보다 그들을 더 괴롭혔던 것은 음악을 향한 열정 이면에 도사린 멤버들 간의 지독하고 살벌한 자아 충돌과 성격 차이다. 서로의 천재성을 시기하거나 사소한 코드 진행 하나로 자존심을 세우며 팀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는 매일같이 들려오는 파열음과, 그로 인한 짙은 피로감을 깊이 체감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조하나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나를 위해 쓴 문장이 당신에게 가 닿기를|출간작가, 피처에디터, 문화탐험가, 그리고 국제 스쿠버다이빙 트레이너

2,852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4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7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