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섯 명의 생존자만이 남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by 조하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으나 정의는 멈췄다


2026년 3월 28일, 또 한 줄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평생을 '피해자'라는 주홍글씨와 싸우며 진실을 외쳤던 '생존자' 한 분이 고요히 숨을 거두셨다. 이제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240명 중 우리 곁에 남은 이는 단 다섯 분뿐이다. 기억의 증언자가 한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든 지금, 한 세기의 끝자락에 선 평균 연령 95세를 훌쩍 넘긴 이들의 생체 시계는 멈춤 없이 흐르는데, 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진정한 사죄와 정의의 시계는 여전히 1945년 어딘가에 고장 난 채 멈춰 서 있다.


이 절박한 카운트다운은 우리에게 묻는다. 마지막 증언자가 사라진 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반세기의 침묵을 깨고 최초의 폭로를 시작했을 때 세상은 비로소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이 저지른 추악한 범죄를 마주했다.


당시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과 비난이 컸던 탓에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숨겨야만 했던 시대적 압박 속에서도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열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며 "내가 살아있는 증거다"라고 외쳤다. 이 굳센 포효는 어둠 속에 묻혀있던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숨어 지내던 수많은 생존자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시민사회는 이 용기 있는 날을 기려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성노예제 기림일'로 정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의 국가기념일로도 지정되어 그 숭고한 뜻을 이어가고 있다.


1996년 히로시마 증언집회에 선 김학순 할머니..jpg 1996년 히로시마 증언집회에 선 김학순 할머니





정의의 시작: 올바른 용어 선택


우리가 여전히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위안부'라는 명칭은 사실 가해자인 일본이 범죄의 강제성을 은폐하고 피해를 축소하기 위해 만든 '가해자의 언어'다.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사회는 이 비극적 사건의 본질이 명백한 전쟁 범죄임을 강조하며, '일본군 성노예제(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올바른 용어 사용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기에 올바른 용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가두는 틀을 깨고 가해국의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는 정의의 시작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 수요집회 30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740회를 넘어 이어지고 있는 수요집회는 단순한 시위가 아니다. 정식 명칭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되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주 수요일 낮 12시면 같은 자리를 지켜온 이 집회는, 단일 주제로 열리는 세계 최장기 집회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매주 새롭게 쓰고 있다.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7가지 핵심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정부의 전쟁 범죄 인정. 둘째, 철저한 진상 규명. 셋째, 진정성 있는 공식 사죄, 넷째, 법적 배상. 다섯째, 전범 책임자 처벌. 여섯째, 역사 교과서 기록. 일곱째,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초기에는 소수의 생존자와 활동가들로 시작한 수요집회는 이제 세대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이 연대하는 평화와 인권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맞서 온몸으로 써 내려간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이자,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숭고한 저항의 서사다. 우리가 멈추지 않는 한 일본 정부가 기다리는 '자연적인 해결'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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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설계한 지옥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는 전쟁 중 발생한 우발적인 일탈이 아니다.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일본이 '군기 유지'와 '성병 예방'이라는 미명 아래 국가와 군의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기획하고 운영한 조직적인 '성착취 시스템'이었다. 이 거대한 범죄의 그물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베트남 등 일본군이 발을 디딘 아시아·태평양 전역에 뻗어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여성들까지 수용소로 끌려가 피해를 입었을 만큼, 이는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자행된 범죄였다.


정확한 전체 피해 규모는 안타깝게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는 전쟁 종료 직후 일본 정부와 군이 자신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관련 문서와 기록을 조직적으로 소각하고 폐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와 국제사회는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 이상의 여성이 이 지옥 같은 시스템에 동원된 것으로 추산한다. 대한민국 정부에 공식 등록된 240명의 피해자는 그 거대한 비극의 빙산의 일각이다.


취업 사기, 유괴, 납치 등 온갖 기만적인 수법으로 끌려간 소녀들은 전선 곳곳의 좁은 방에 갇혀 '전쟁 물자'로 취급당했다. 일부 일본 우익 세력은 당시 여성들이 고액의 보수를 받는 계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간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설령 '계약서'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이는 인신매매와 강압에 의한 원천 무효였으며, 피해자들에게 약속된 임금은 군표라는 명목으로 지급되어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거나 각종 비용 명목으로 공제되어 실제로는 노예 상태의 채무 이행에 불과했다.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그곳에서 자행된 것은 성욕의 해소가 아니라, 인간성을 말살하는 고도의 국가적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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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 지어진 두 번째 감옥


더욱 비극적인 것은 1945년의 해방이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을 기다린 것은 가부장적 사회가 덧씌운 '순결 이데올로기'라는 또 다른 감옥이었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강요받으며 스스로를 숨겨야 했던 40여 년의 세월은, 가야트리 스피박이 지적한 '이중의 억압' 그 자체였다. 스피박은 저서 <서벌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통해 제국주의와 가부장제라는 두 거대 권력이 어떻게 약자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지 분석했다. 피해 여성들은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폭력에 짓밟혔을 뿐만 아니라, 귀환 후에는 '정조를 잃은 여성'을 죄인 취급하는 자국 사회의 가부장적 시선에 갇혀 입을 봉인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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