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영화 추천작 <보이즈 인 더 밴드>
이 시대를 영화로 투영하는 성공한 배우들이 모두 모인 ‘올스타’ 무비 <보이즈 인 더 밴드>.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순전히 배우진만 보고 플레이했다. 영화가 끝난 후엔 벅차오른 마음으로 나의 손가락에 감사했다.
제작진들이 직접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미니 다큐멘터리 <보이즈 인 더 밴드: 우리만의 이야기>까지 보고, 영화에 관한 해외 기사와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며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화 혁명을 지켜본 증인 중 하나가 된 걸 영광이라 느꼈다.
고백하자면, 나는 퀴어 영화를 나서서 찾는 관객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편의 퀴어 영화들이 내 맘을 바꿨고 교육시켰다. 부끄러운 편견을 돌아보고 고쳤다. 특히 자비에 돌란 작품을 통해 여러 가지 에디토리얼이나 GV를 진행하며 영화가 예술로서 사회에 작용하는 역할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한지 깨달았다.
아무리 시대가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메인 스트림은 퀴어 영화에 차갑다.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다. 퀴어 영화는 퀴어만의 갈등과 문제, 세계를 다룰 거란 편견이 크다. 하지만 세상에 ‘그들만의 문제’라는 건 없다. 여성으로서 차별받는 문제와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성적 취향이나 인종, 경제적 상황 등 다양한 이유로 차별받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공감하는 건 당연하다.
잡지사 피처 에디터 일을 하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며, 자연스럽게 성소수자 친구들과 교집합을 만들어갔다. 다이빙 강사로 해외에서 지내며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란, 한국보다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성소수자 친구들도 많이 만나게 됐다.
영화의 간접 경험과 인생의 직접 경험으로 ‘그들은 나와 다르면서 또 다르지 않다’는 걸 배웠다. 그들과 내가 다르다는 기준 자체에 대해 의심했다. 애초에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심어진 이유를 고민했다. ‘다수’는 옳고, 더 나아가 정상이며 ‘소수’는 그르고 비정상이라 교육받고 자란 시스템을 비판했다. ‘그들의 문제’가 아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 모두의 문제, 남녀노소, 인종, 경제적 위치, 성적 취향 등 모든 걸 초월한 인류의 보편적 문제로 봐야 한다.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남성이 여성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백인이 흑인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을 서포트할 때 문제는 조금이나마 해결의 기미가 보인다. 편견의 뿌리를 찾아 없애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공감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백 년 전 쓰인 고전을 읽고,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본다. 공감은 문화가 가진 힘이다. 문화는 가장 우아하고 비폭력적인 ‘혁명’이다. <보이즈 인 더 밴드>는 우아한 혁명이다.
넷플릭스 영화
감독 조 망텔로
각본 마크 크롤리
제작 라이언 머피
출연 짐 파슨스, 재커리 퀸토, 맷 보머, 앤드류 라넬스, 찰리 카버, 로빈 드 지저스, 브라이언 허치슨, 마이클 벤자민 워싱턴, 턱 왓킨스
입이 떡 벌어지는 영화 크레딧
조 망텔로는 <위키드> <테이크 미 아웃 <어새신> 등 수많은 대작들을 히트시킨 브로드웨이의 스타 감독이다. 제작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감독이자 <글리> 시리즈와 <래치드>로 유명한 라이언 머피가 맡았다. 라이언 머피가 넷플릭스에 독점으로 작품들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고 정말 일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어떻게 이 스케줄로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는지. 역시 라이언 머피가 제작하고 짐 파슨스가 출연한 넷플릭스 시리즈 <오, 할리우드>를 인상 깊게 본 터라 이번 영화 역시 기대됐다. 각본은 마크 크롤리가 맡았는데, 이 사람은 <보이즈 인 더 밴드> 작품 그 자체라 뒤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야겠다.
출연진이 어마어마하다. TV 시리즈 <빅뱅 이론> ‘쉘든’으로 익숙한 짐 파슨스, <스타트렉>의 재커리 퀸토, TV 시리즈 <화이트 칼라>의 맷 보머를 비롯해 <위기의 주부들> <틴 울프> <래치드>의 찰리 카버, 로빈 드 지저스, 브라이언 허치슨, 마이클 벤자민 워싱턴, 턱 왓킨스, 앤드류 라넬스, 이렇게 9명의 남자 배우들이 출연한다. 특히 앤드류 라넬스는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나는 정말 열심히 봤던, 미국 게이 가정이 아이를 입양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 <뉴 노멀>을 보고 팬이 되었다. <걸스>에도 나오는데 그가 출연한 모든 역할이 게이였다. 그렇다. 이 9명의 배우는 모두 실제 커밍아웃을 하고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 캐스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출연을 결심한 배우들 역시 생각할수록 대단하다.
연극이 원작인 영화라 연극 무대처럼 영화의 90%가 ‘마이클(짐 파슨스)’의 집 거실을 배경으로 나오는데 이 아홉 배우들이 한 공간에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할 일을 다 한 거나 다름없다.
<보이즈 인 더 밴드> 시놉시스
1968년 뉴욕 맨해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기 조심스러웠던 사회 분위기로 대부분 ‘클로짓’에 숨어있던 게이들. 해롤드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기 위해 마이클이 자신의 집으로 게이 친구들을 초대한다. 자신들만의 온전한 파티를 기대했지만(해롤드의 생일 선물로 남창 ‘카우보이(찰리 카버)’도 이 파티에 함께 한다) 마이클의 동창이자 이성애자인 앨런(브라이언 허치슨)이 불청객으로 등장하며 전개된 하룻밤 소동극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앨런’
피하고 싶지만 영원히 도망칠 수만은 없는 현실 같은 사람
앨런은 70년대 미국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정상’이라 믿는 집단에 완벽하게 매치되는 인물이다. 이성애자이고 결혼했으며 변호사에 크리스천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물론 ‘남과 여’의 결혼에 한해)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믿는, 또한 자신을 사회의 좋은 시민이라 믿는 신념에 가득 찬 남자다. 앨런은 성소수자들이 집 밖을 나가는 순간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앨런이 마이클의 집에 모인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성소수자들이 단지 성소수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편견과 차별을 받고 사는지 짐작케 한다.
한편으론 영화에서 가장 모순된 캐릭터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왜 영화 초반 앨런이 흐느끼며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 건지 궁금하다. 마이클의 게이 친구들이 가득한 그 집을 떠나지 않은 것도 결국 앨런의 선택이었다. 추측은 관객마다 다를 것 같다. 영화는 그걸 영원히 비밀로 붙였다.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방황하는 ‘마이클’
에르메스 스카프를 사랑하는 마이클. 사랑하는 친구 해럴드(재커리 퀸토)를 위해 관대하게 생일 파티에 공을 들이지만 정작 주인공 해리가 나타나자 “늦었네, 재수 없네” 고래고래 핀잔을 주고 독설을 늘어놓는다. 영화의 전반부 그가 이야기하는 ‘자기 연민’, 영화의 후반부 그가 이야기하는 ‘자기혐오’. 여전히 게이인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며 방황하는 마이클은 스스로 마음에 상처를 내고 회복하고를 반복한다. 마치 다른 이들에게 받을 상처에 대비해 치르는 사전 훈련처럼 느껴진다. 그 당시 성소수자로 사는 건(지금도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예민하고 여린 마이클에게 쉽지 않았을 테니.
못생기고 곰보 가득한 유대인 게이 ‘해럴드’
제커리 퀸토가 연기한 해럴드는 마력을 지닌 인물이다. 자신을 ‘못생기고 얼굴엔 곰보가 가득한, 유대인에, 게이인!’이라 셀프 디스를 하지만 이에 동조하는 이는 정작 아무도 없다. 그의 제스처, 목소리, 톤, 발음, 스타일, 눈짓까지 모든 게 매력적이다. 마이클에게 해럴드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동경의 대상이자 증오하는 연적이다. 마이클은 그처럼 사람들을, 세계를 사로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서 주인공이 되고픈 욕망은 해롤드를 통해 이루고 싶지만 어쩐지 상하는 자존심을 어찌할 길이 없다.
마이클과 해럴드의 ‘Love & Hate’ 관계는 이들이 성소수자라서가 아닌, 흔한 연인 관계, 혹은 친한 친구 관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말하자면 전혀 특별할 게 없는 일이다. 이들이 ‘게이’라는 포인트에만 집중한다면 괜히 뭔가 있어 보이고 신비로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게이라서 겪는 감정이나 관계가 아니다. 이들의 삶에 ‘게이’라는 요소는 다양한 삶의 양념 중 하나여야 하지, 항상 메인 요리가 될 필요는 없다. 여기에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훌륭하게 이용된 연극적 장치,
한정된 공간 배경으로 답답함을 느꼈다면 그건 감독의 의도가 통한 것.
원작이 연극이고 감독 역시 연극 연출이기 때문에 연극적 요소와 장치가 많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의 90% 이상은 마이클의 집이 배경이고, 연극 무대처럼 배우들은 모두 모여 대사를 한 호흡처럼 이어간다. 발코니에서 달빛 아래 추억 가득한 춤을 추며 시작한 파티는 불청객 앨런의 등장과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마이클의 거실로 모두가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카메라는 마이클의 거실 중간에서 360도 회전하며 롱테이크로 배우들의 움직임과 대화를 포착한다. 특히 마이클의 대사량이 엄청난데,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짐 파슨스가 얼마나 멋진 배우인지 알 수 있다.
한정된 장소에 모여 온갖 은유와 비유, 냉소를 날리는 마이클과 친구들은 그 당시 뉴욕, 아니 미국 사회, 아니 그들을 대하는 세계에서 소외돼 고립된 ‘옷장’ 속처럼 답답하다. 감독 인터뷰를 보니,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서 오랫동안 9명의 배우들이 모여 연기하는 걸 보면서 관객들이 어느새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꼈으면, 의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차별과 편견에 치이며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느끼도록 하고 싶었을까.
무지갯빛처럼 제각각, 살아 숨 쉬는 9인의 캐릭터!
영화에 등장하는 9인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빛난다. ‘게이’라고 하면 우리가 떠오르는 고정관념 이미지라는 게 있다. 여성스러운 몸짓에 과한 스타일링, 패션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을 것 같고, 대화할 때 괜히 어깨를 툭- 하고 칠 것만 같은. 보통 영화에 10명의 배우가 출연한다고 하면, 10명의 캐릭터가 제각각인데(실제 우리네 세상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 ‘게이’는 영화에 나오면 그냥 캐릭터 자체가 ‘게이’다. 대다수가 예상하는 스타일대로 옷을 입고 말을 하고 제스처를 한다. 네이버 검색창에 ‘게이’를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로 ‘게이 특징’이 뜬다. ‘게이’는 성적 취향을 말하는 거지 그 사람의 성격을 말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태국에서 다이빙을 가르치며 특히 유럽에서 여행 온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가끔 내가 실수를 했다. “난 네가 게이라서 ~~ 할 줄 알았어” 같은, 무의식에 툭 튀어나오는 말이다. 그 친구는 자신 자체로 사는 거니 ‘게이’라는 캐릭터로 사는 게 아니다. 나의 빈약한 교육과 경험에서 나온 부끄러운 편견이었다. 이내 실수를 깨닫고 정중하게 사과하며 잘 몰라서 그랬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성소수자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이건 어떤 형태의 소수자들을 대할 때든 마찬가지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게이’에 대한 단 하나의 고정관념 이미지를 이 영화는 9개의 각각 다른 캐릭터로 쪼개어낸다. 그리고 그 캐릭터 하나하나가 제각각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살아있다.
차별받는 커뮤니티 안에서도 지속되는 차별,
하지만 “내일 전화할게”
게이들만의 문제, 그들만의 생활 방식, 그들의 삶 자체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 영화에서 마이클이 친구들에게 제안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하기’ 게임은 커밍아웃하지 못한 ‘클로짓 게이’들에겐 잔인한 고문이다.
마이클은 이렇듯 자신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게이 친구들의 커뮤니티 안에서 그들과 공감하는 한편, 동시에 잔인하기도 하다. 서로 돌보고 지지해 줘야 할 커뮤니티 안에서도 갈등과 시기, 혐오, 차별이 존재한다.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 어떤 거대한 미스터리도 음모도, 배신도 없다. 내내 마이클과 물어뜯으며 서로 냉소적인 독설만 퍼붓던 해럴드가 파티를 끝내고 나서는 길, 뒤돌아 마이클을 바라보며 “내일 전화할게” 하는 장면으로 이들의 커뮤니티는 표현된다.
비집고 들어갈 커뮤니티 자체가 아예 없는 어린 소년 ‘카우보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길, 카우보이가 택시 안에서 해럴드의 어깨에 말없이 기대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아름답고 젠틀한 선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사이를 오간다. 동시에 우아하고 부드러운 순간들 역시 우리를 어루만진다. 영화는 온갖 냉소와 독설이 가득하지만, 영화를 채우는 인물들 간의 케미스트리와 따뜻하고 우아한 제스처는 남자 배우들로만 채워진 영화가 얼마나 우아하고 섬세한 느낌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마이클은 그를 둘러싼 커뮤니티,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희망을 갖고 나아가길 원한다. 나와 당신과 다르지 않다.
우아한 혁명가, 마크를 기리며
<보이즈 인 더 밴드>는 1968년 오프브로드웨이(관객석 100석 이상, 500석 이하의 브로드웨이보다는 작은 규모의 공연)에서 초연해 이후 1,000회의 공연을 이어간 작품이다. 70년엔 영화화되기도 했다.
미국의 1968년은 어떤 시절이었냐 하면, 미국 FBI와 경찰이 성소수자들을 색출해 기록, 관리하던 때였다. 성소수자란 게 알려지면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교도소, 혹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69년 뉴욕 스톤월 술집을 경찰이 급습해 단속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성소수자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소수자가 아닌 이들도 목소리를 보태며 수천 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항의 시위를 한 게 그 유명한 ‘스톤월 항쟁’이다. 이후 성소수자들이 본격적으로 단체를 결성해 보다 조직적으로 인권을 주장하는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73년,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하는 조항을 삭제한다.
스톤월 항쟁이 일어나기도 1년 전에, 이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는 게 믿어지는가?
그 당시 게이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은 이 작품이 최초였다고 한다. 연극 각본을 쓴 마크 크롤리는 자신 또한 공개적으로 오픈한 게이였다. 마크는 작품 속의 ‘마이클’을 자신으로부터 창조했고, 이미 세상을 떠난 단짝 친구에게서 ‘해럴드’ 캐릭터를 만들었다. 당시 연극에 캐스팅된 배우들 중엔 실제 게이도 있었고 이성애자도 있었지만, 이런 소재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자체가 배우 커리어에 치명타를 주는 시절이었기에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대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용기는 2020년의 LGBTQ 커뮤니티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출발이 되었다.
클래식을 우아하게 재연하면, 시대를 재현하게 된다
2018년, <보이즈 인 더 밴드> 50주년을 맞아 이 작품은 오프브로드웨이가 아닌 브로드웨이에서 재공연 된다(50년의 세월을 지나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브로드웨이로 간 것도 의미 있다). 그리고 이 연극은 2019 토니상(베스트 리바이벌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리바이벌 연극에 출연한 감독, 배우진(각본은 언제나, 당연히 마크)은 그대로 영화 <보이즈 인 더 밴드>를 만들게 된다.
나는 이 현대판 연극과 영화에 출연한 9인의 게이 배우들의 쿨한 애티튜드가 너무 마음에 든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커밍아웃하는 성소수자가 많아졌다 해도, 여전히 많은 면에서 차별과 혐오를 받는 이들이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위해, 더 나아가 인권을 위해, 이렇게 모여 역사적인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LGBTQ 커뮤니티가 앞으로 또 다른 50년을 더 나아갈 힘을 줄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또 삶을 방관하거나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축복하는 이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혁명’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형태의 ‘스톤월 항쟁’인 거다.
50년 전 이 영화가 처음 영화화했을 때 호주에선 이 영화를 ‘추잡하고 음란하다’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시켰다. 50년 후, 2020년 버전의 <보이즈 인 더 밴드>는 전 세계 사람들이 24시간 접근할 수 있는 넷플릭스에서 개봉되었다. 50년의 시간이 이런 질감으로 느껴지니 기분이 묘하다. 50여 년 전 그때, 성소수자들의 문화나 커뮤니티마저 없었던 시절, 이 한 편의 연극으로 시작된 ‘게이 컬처’ ‘게이 커뮤니티’는 이렇게 시대를 관통해왔다. 문화의 우아한 혁명이다.
넷플릭스에는 영화의 뒷이야기, 30분짜리 미니 다큐멘터리 <보이즈 인 더 밴드: 우리만의 이야기>도 릴리즈 되어 있으니 함께 보면 좋다.
Edward Martino Crowley
August 21, 1935 – March 7, 2020
이 모든 역사, 그리고 문화 혁명을 시작한 마크 크롤리는 지난 3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