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청춘은 젊은이들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

넷플릭스 영화 추천작 <위 아 40>

by 조하나






위 아 40(The 40 Year Old Version)

연출: 라다 블랭크

각본: 라다 블랭크

배급: 넷플릭스

공개: 2020년 10월 9일

출연: 라다 블랭크, 피터 킴, 오스윈 벤자민, 리드 버니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출연 배우들 ⓒIMDb



라다의, 라다에 의한, 라다를 위한


미국 뉴욕 출신, 76년 생 라다 블랭크. 이 영화는 라다 블랭크가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고, 또 감독했다. <위 아 40>는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배우, 각본가로 활동해온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드라마 장르의 영화이다. 라다 블랭크는 이 데뷔작으로 <2020 선댄스 영화제>에서 ‘전미 드라마 감독상’을, <팜스프링스>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상’을 받았다. 코로나19 영향인지 요즘 대부분의 영화들이 극장을 거치지 않고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로 직행한다.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라다 블랭크 ⓒ선댄스 영화제



위 아 40 | 공식 예고편 | Netflix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넷플릭스


나이와 영속성, 세상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괴롭히는 개념


영화에서 본인의 이름 ‘라다 블랭크’를 그대로 써 연기한 ‘라다’는 재능 있는 극작가로 촉망받았던 흑인 여성 아티스트다. 뉴욕에서 나고 자랐고, 할렘가에 살고 있다. 그녀 인생 통틀어 내세울 거라곤 ‘30세 이하의 30인의 극작가’로 뽑혔던 이력뿐. 이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커리어 상 이렇다 할 굵직한 열매가 없다. 십대들을 상대로 연극을 가르치고 있지만 학생 중 반은 그녀를 무시하고, 반은 그녀를 추앙한다.


역시 아티스트로 살았던 어머니의 죽음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아티스트로서 라다는 점점 사회에서 위축된다. 가끔 피해의식에 신경질적이기도 하고, 자기혐오에 시달리기도 하며, 뉴욕 할렘가 그녀의 집세를 걱정하는 신세다. 쑤셔오는 무릎마저 조금씩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그렇다. 그녀는 3달 후면 마흔이 된다.


라다는 점점 초초해진다. 학생들에게 자신처럼 되지 말라 충고하면서 아티스트로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엄마의 생, 그 이상으로 살 거라 다짐했던 자신의 ‘30대’의 오만함을 책망한다.




마흔에도 계속되는 방황


‘청춘은 젊은이들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다. 서른엔 이걸 모르지만, 마흔엔 어렴풋이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청춘을 무턱대고 믿고 까불었던 ‘그 시절’을 원망하고, 또 그리워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파릇한 이십 대와 예쁜 꽃처럼 핀 삼십 대가 보인다. 예전엔 눈에 잘 안 들어왔던 칠십 대 동네 할머니도 보인다. 마흔은 그런 나이이다. 젊지도, 그렇다고 또 늙지도 않은. 서른엔 마흔이 되면 방황이 끝날 줄 알았는데, 마흔이 되어도 방황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마흔쯤 되면 신념을 지켜오던 친구들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차를 사고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린다.


라다가 지난 10년 동안 일찍이 촉망받은 극작가로서 이렇다 할 커리어를 이어나가지 못 한건 그녀의 신념으로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투지였을 수도, 흑인으로, 부유하지 않은 흑인으로, 부유하지 않은 여성 흑인으로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라다가 비꼬는 ‘빈민 포르노’처럼 백인 기득권층이 제작, 후원, 감독, 홍보 등 도처에 깔려있는 브로드웨이 연극 산업에서 흑인 여성 작가에게 기대하는 스토리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아니면 그녀가 그저 게을러서였을 수도, 연극에 대한 열정이 식었을 수도, 어쩌면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다. 옆에서 그녀의 삶을 보는 우리에게 그녀의 10년을 그냥 ‘퉁’ 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넷플릭스



마흔은 적당히 타협점을 찾는 나이


학창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한국인 게이 ‘아치’(실제 미국계 한국인 배우 피터 킴의 연기가 일품이다). 영화 내내 이렇게 영화에 자연스럽게 잘 묻는 한국인 배우는 없다는 생각에 감탄했다. 영화에선 라다와 아치가 마흔이 가까워지면서 어떻게 세상과 타협하거나, 혹은 세상에 맞서는지 대비시켜 보여주기도 하고, 또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보여주기도 한다.


보수적인 한국인 부모와 게이 아들로서 겪는 갈등,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 이민자로 감내해온 차별 등 세대와 인종 문제에서 아치도 라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라다의 에이전시이기도 한 아치는 그녀의 작품을 브로드웨이에 올리기 위해 타협을 권한다.


그때 친 아치의 대사가 일품이다.


‘세상과 맞짱 뜨는 나’ 컨셉이 고등학교 때는 귀여웠지만
지금 나는 기회, 외식, 실크로브를 좋아해.
비주류로 남으면 잃는 게 많아.


내가 매거진 기자로 인디 아티스트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할 때마다 그들과 한숨 뻑뻑 쉬어가며 지겹도록 나누던 이야기였다. 신념을 지키며 비주류로 살아가느냐, 적당히 타협하며 주류에 끼느냐.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결론은, 그리고 내 개인적인 결론은 ‘일단 비주류였던 인간이 주류에 합류한다 해도 결국 장이 뒤틀리는 걸 참느라 화병에 걸리고 말 거’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자신을 잃었다고 고백한 아티스트들도 주변에 많다.


내가 생각하는 이십 대와 삼십 대는 ‘자기 탐색의 시간’이다. 죽어라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야 한다. 마흔 즈음엔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걸 독촉받는다. 누구로부터? 바로 이 사회와 시스템,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나 자신. 앞으로 펼쳐질 오십 대, 육십 대엔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며 살아야겠지. 선택을 되돌릴 순 없으니까. 왜 그럴까? 사회와 시스템이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라다 역시 내몰릴 대로 내몰린 현실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타협이란 걸 해보기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로 포장된 상품을 팔기 위해 백인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대사와 장면을 넣기도 하고, 작품을 이해 못하는 백인 감독이 제멋대로 라다의 극을 지휘하는 걸 인내해야 했다.



라다 블랭크가 세상을 향해 내뱉은 쿨한 라임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라다는 랩 가사를 쓰기 시작한다. 인스타그램으로 찾아낸 비트메이커 ‘D’의 비트에 녹음도 한다. 그녀가 하는 랩은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도 아니요, 화려한 기교나 기가 막힌 톤도 아니지만, 세상 쿨한 래퍼란 래퍼들을 24시간 보는 ‘D’를 자극할 만큼 진정성 있는 그녀만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진짜 ‘쿨’이지. 잘 나가는 젊은 래퍼들이 멋진 단어들을 엮기만 할 뿐 아무 의미도 진정성도 없는 랩을 하는 게 ‘D’ 역시 신물 난 상태다. 그때, 라다의 ‘진짜’ 랩이 그의 삶에 들어온다.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넷플릭스




라다는 정말 10년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을까?


예술가의 창작물로 예술가의 삶 전체를 평가하는 대중이라면 라다는 10년 동안 아무것도 한 것 없는, 그저 ‘한 때 잘 나갔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10년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었을까? 그녀가 쓰고 내뱉는 랩 가사가 어디서 나온 걸까? 대중이 소위 말하는 그 ‘아무것도 한 것 없는 10년’의 삶에서 나온 게 아닐까?


내가 인터뷰한 인디 뮤지션이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게 있으면 그걸 할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 음악을 하지 않고 결혼 후 전업 육아를 맡은 아빠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 뮤지션이 아닐까? 누군가에겐 그 시간이 ‘창작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비난할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예술가 자신에겐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라면? 어찌 우리가 예술가의 삶을,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을까.


결과주의,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각에서 보면 라다는 ‘루저’에 속한다. 하지만 그녀는 ‘루저’가 아니다. 마흔을 앞두고 온,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는 선택의 시간에 ‘브로드웨이에서 승승장구하는 극작가’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부끄럽지 않게 사는 래퍼’ 사이에서 꽤 멋진 선택을 했으니까.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대립해왔던 양가의 감정에서 결국 그녀 스스로 선택했으니까. 라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예술 그 자체로 바꾸기로 선택했으니까. 스스로 그 징글징글한 자격지심과 초조와 불안한 마음을 마주 보기로 했으니까.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넷플릭스



당신의 믹스테잎은 당신의 이야기로 채워야 한다


라다는 자신의 믹스테잎을 자신이 40년 동안 살며 쌓은 이야기로 채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기민함으로 무장하고 당신을 무시하거나, 혹은 추앙하는 20대와 여전히 당신이 동조할 수 없는, 그리고 닮고 싶지 않은 50대 사이에서 포지셔닝 참 애매해지는 나이, 마흔. 거기에 ‘젠더’와 ‘인종’까지 더하면 흑인 여성인 라다에게 더 가혹해지는 마흔.


실제로 나는 스물일곱부터 “여자 나이에 ‘ㅂ’ 자 들어가기 시작하면 유통기한 끝난 거다”라는 끔찍한 말을 농담이랍시고 면전에서 떠드는 게 가능했던 한국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내 이십 대를 돌아보면 ‘마흔’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나이였다.


그런데 마흔을 앞둔 지금, 누가 누가 행복한가 유치한 대회를 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 이 상태로 행복하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당신의 무기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당신만의 ‘믹스테잎’이다. 라다 역시, 영화를 통해 세상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진실을 그녀 스스로와 세상의 또 다른 여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넷플릭스



Find your own voice


5년 전 한국을 떠난 뒤로 ‘한국식 나이’는 잊은 지 오래지만 조금 있으면 나도 마흔이 된다. 인간의 생로병사에서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는 거대하다. 나이를 물었을 때 ‘서른이요’ 하면 사람들은 30대엔 응당 도달해야 하고 또 가져야 할 것들의 목록을 떠올린다. ‘마흔이요’ 하면 떠오르는 목록엔 뭐가 있을까?


내가 삼십 대에 정말 잘한 게 있다면, 온전히 이 고정관념 목록을 지우는 데에 열중했다는 거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늦깎이 잡지사 피처 에디터가 되었고, 서른넷에 다이버로 살겠다고 한국을 떠났다. 그때 내가 다른 사람들이 충고한 것처럼 ‘늦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다.


한국에서 잡지사 피처 에디터로 살면서 예술계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만나 그들의 삶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를 마음에 보물처럼 쌓았다. 장사익 선생님은 마흔이 넘어 가수로 데뷔했고, 최백호 선생님은 환갑이 넘어서야 젊은이들이 그의 노래를 ‘떼창’하는 걸 듣게 됐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나는 마음에 쌓은 보물을 꺼내 내 인생에 쓰고 있다. 나는 직접 살아보고 싶었고, 경험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만큼은 나 역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위 아 40, The 40 Year Old Version> 감독/각본/배우 라다 블랭크



엔딩 크레딧


이 영화는 라나 블랭크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그녀의 흥미로운, 진정성 있는 스토리에 당신도 빠지게 될 거다. 그녀의 수준급 랩 실력은 영화에서 쫄깃한 이음새가 되어준다. ‘마흔을 앞둔 흑인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라다 내면의 끊이지 않는 갈등 속에서도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이 영화의 큰 매력이기도 하다.


35mm 흑백영화지만 연극 재연 장면과 과거 장면은 컬러다. 요즘 한창 재개봉/상영 중인 노아 바움벡 감독의 <프란시스 하>가 ‘서른을 앞둔 뉴요커 백인’ 프란시스의 이야기라면, <위 아 40>는 ‘마흔을 앞둔 뉴요커 흑인’ 나다의 이야기가 되겠다.


뉴욕을 채우는 청춘과 중년의 이야기, 두 영화 함께 봐도 좋을 것 같다.




>>> 다이빙하는 에디터 조하나, 다른 글 보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