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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25. 2024

나는 어떤 언어에 지배당하고 있는가

나의 언어를 돌아본다.

나는 어떤 언어에 지배당하고 있는가.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프로이트 사상을 기반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연구하는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 라캉의 말이다. “인간이 언어로 생각한다”라는 말은 반대로 인간이 구사하는 언어를 들여다봄으로써 그 인간의 사유 원리와 특성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언어는 바로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 인격을 드러낸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30년 넘게 모국어를 쓰다가 해외에서 근 10년간 일상 대부분의 소통을 영어로 하며 나 자신조차 몰랐던 나에 대해 많이 배웠다. 한국어로 말할 때와 달리 영어로 말할 때 나는 말하는 톤이 훨씬 높아진다. 내 말의 진의를 조금이라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를 섞기도 한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라는 말과 달리 주어 다음 서술어가 바로 나오는 영어를 쓰다 보면 나는 한국어를 쓸 때에 비해 내 감정과 마음을 보다 빨리 정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느낀다. 언어가 달라지면 사유의 과정과 마인드도 달라진다.     


미국인 남자친구와 가끔 다툼이라도 있을 때면 영어가 모국어인 그에 비해 내 감정과 기분, 내면 상태를 영어로 속 시원히 표현할 수 없어 한국어로 편지를 쓴 다음 번역 후 읽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과 한국어로 소통한다고 해서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리도 내 마음을 이해 못 하니?”      


우리는 같은 언어로 말하는 가족, 친구, 연인, 직장, 사회 등 어디에서나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를 이해 못 하는 게 모두 상대방 탓은 아니다. 인간의 사유를 담고 있는 언어는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 나의 언어의 문제, 혹은 상대방의 언어를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사회는 언제나 소위 ‘오피니언 리더’라 불리는 이들의 언어로 대표된다. 레거시 미디어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행사했을 땐 방송사 아나운서와 앵커, 신문기자들이 바른 언어 사용과 표현, 맞춤법을 강조했지만 지금은 온라인 공간의 온갖 여과되고 정제되지 않은 혐오와 감정이 가득 실린 말들이 오프라인 공간을 잠식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부터 고위 공직자, 정치인, 비평가, 연예인, 유튜버까지 요즘 우리는 전보다 더 폭넓고 다양해진 언어에 에어백 없이 노출되어 있다.      


함께 강사 생활을 오래 했던 동료 중 모국어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까지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아이슬란드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학원이 없는 나라의 공교육 시스템에서 함께 다양한 언어를 배우면서 그 저변에 깔린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도 성격도 생각도 다른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프랑스 친구가 ‘브렉시트’에 대해 열정적인 토론을 벌이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자신만의 정제되고 뚜렷한 언어로 목소리를 내어 상대방과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건 바로 ‘검사의 언어’다. 한국 사회의 계층 사다리의 끝을 상징하는, 소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라는 법조인 중에서도 콕 집어 검사다. 물론 대한민국 모든 검사를 말하는 게 아니다. '법정'을 뛰쳐나와 '정치'를 한다고 '마이크'를 들고 '대중' 앞에 선 일부 검사들 말이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검사는 똑똑하고 논리적이다’라는 긍정적 편견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얼마 전 방송에서 사람과사회연구소 박성태 연구실장이 “재벌 승계 2‧3세가 언변이 부족한 건 그들이 평생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대한민국의 대표 기득권 세력이 되어 버린 정치 검사들 역시 설득의 필요성을 못 느껴 논리력을 잃은 게 아닐까. 


검사의 언어는 강압적이고 권위적이며 상대를 범죄자로 확신한다. 동시에 자신은 정의롭고 고결하다는 확신과 도덕적 우월감에 차 있다. 이는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말, 손으로 쓰는 글,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 제스처 등 모든 직간접적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검사의 언어는 곧 검사의 마인드를 나타내고, 그들은 그것을 세상에 여과 없이 드러내는 걸 개의치 않는다.      


법정이라는 특수한 TPO에만 국한되었어야 할 검사의 언어와 마인드가 우리의 일상을 침범했다. TV·유튜브 토론, 기자회견, 인터뷰, 청문회, 국정조사, 대국민 연설이 검사의 언어와 마인드로 가득하다. 특히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뜻을 설득해 동지를 모으고 세력을 만들어 정치적 이익을 관철하는 게 목적인데 설득은커녕 검사의 폭력적인 언어와 의도적인 혐오로 시민을 편 가르고 이간질하며 사회를 어지럽힌다. 알게 모르게 사회를 잠식한 검사의 언어와 마인드는 나비효과처럼 사회구성원으로 옮아간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모두 이해받고 싶은 욕망을 가진, 그저 외로운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로부터 이해받아야 할지, 이 과정에 있어 나의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우리는 아직 그 방법을 잘 모른다.      


드라마 <졸업.>이 현재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배울 만큼 배우셨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인데… 제가 한 번 이야기해 볼게요”라고 말하는 준호에게 민희주 사회과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배울 만큼 배웠고,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들이라 더 문제인 거야!” 


인문학에 소홀한 사회는 결국 비극으로 치닫는다. “예시 지문과 예상 질문 달달 외워 국어 시험을 치르는 게 아니라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기본을 다지고 시대 속에 우뚝 선 작가의 사상과 신념을 이해하는 것, 학문의 근본인 국어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라는 드라마 대사가 지구에서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세계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우리 역시 그런 걸 본 적도 배운 적도 없어서가 아닐까.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자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경, 역사를 들여다보고 과거의 오류와 실수를 경계하며 미래에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런 것을 배우는 시간에 우리는 너무 소홀했던 건 아닐까.      


나의 언어를 돌아본다. 언어를 통해 다듬어진 나의 사유가 삶의 신념으로 나아가기까지 부끄러운 표현과 모순의 오류, 치기 어린 욕심, 감정에 치우친 혐오가 없었는지 갈고닦는다. 나는 어떤 언어에 지배당해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나만의 독립적인 언어로 목소리를 낼 용기가 있는지, 나의 언어를 다시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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