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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26.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축복하라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작 <괴물> 


*이 글은 영화 <괴물>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 <공기인형>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브로커> 등 풍부하고 깊은 필모그래피를 쌓은 30년간 천천히 성실하게 거장의 길을 걸어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프랑스(<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2019)와 한국(<브로커>, 2022)으로의 다소 불운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만든 영화, <괴물>입니다.     

 

영화 <괴물>




<괴물>은 1995년 데뷔 이래 늘 직접 대본을 써왔던 고레에다 감독이 처음으로 외부의 각본가와 협업한 작품입니다. 수많은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서 청춘과 가족의 모습을 이야기한 사카모토 유지가 각본을 작업했죠. 그래서인지 프랑스와 한국에서 만든 두 편의 해외 영화보다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에서 더 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 스케일이 더 커졌고, 긴장감이 넘칩니다.


이 영화는 제76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연출과 연기, 편집, 음악에 대한 평단의 특별한 찬사와 호평을 받으며 2023년 최고의 영화 목록에 다수 올랐습니다.    


  

ⓒ 영화 <괴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 1년 전, 고레에다 감독은 <어느 가족>으로 좋은 작품이지만 수상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매체들의 예상을 깨고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의 수상에 환호하던 한국과 달리 <어느 가족>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일본은 드러내고 기뻐하거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고 하죠. 세계적으로 드러난 사회 문제의 민낯을 부끄럽고 민망하게 여긴다는 일본의 역사와 함께 하는 ‘수치의 문화’ 때문이라는 일본 기자의 해설이 흥미로웠습니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심리적 거리가 멀지 않은,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많이 다른,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쓰는 ‘일본스럽다’는 표현의 오묘한 뉘앙스가 떠오르더군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서로 할킨 상처들

   

각본을 쓴 사카모토 유지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겪었던 일이다. 신호가 빨간불이어서 멈췄는데 내 앞에 트럭이 한대 있었다. 그런데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는데도 한참을 꼼짝하지 않는 거다. 이상해서 경적을 몇 번 울렸다. 잠시 뒤 트럭이 움직이고 나서야 휠체어에 탄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트럭은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때 사정도 모르고 경적을 누른 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가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     


ⓒ 영화 <괴물>



영화 <괴물>은 집단 괴롭힘, 동성애 혐오, 가족 기능 장애, 결함투성이인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 존중, 무책임한 루머의 유포 등이 씨실과 날실처럼 직조된 복잡하고 정교한 이야기를 통해 관객의 오해와 편견, 억측을 우아하고 침착하게 부추깁니다. 한국 역시 시름하고 있는 아동 학대부터 학교 폭력, 추락한 교사의 권위 논란까지 현시대의 아이들이 노출된 환경과 상황을 통해 그런 환경과 상황을 기어코 만들고는 무기력하게 방치만 하고 있는 어른들에게 거울을 비춥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진 인간 내면의 ‘괴물’을 탐구하는 과정에 <괴물>은 사박사박 걸어가 합류합니다.      


<괴물>에는 다양한 빛깔의 사랑과 연민이 스펙트럼처럼 은은하게 깔려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빛깔은 너무 옅어 알아채기 힘들죠. 사랑이라는 감정의 동요 속에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연민, 취약한 학생에 대한 선생의 연민, 친구에 대한 소년의 연민이 맥락 없이 단편적으로 인식될 때 어떻게 잔인하고 파괴적인 힘으로 팽창할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 영화 <괴물>


여전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선생은 초등학교 체육 시간, 남학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남자답게”라는 말을 씁니다. 엄마는 아들에게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는 미래”를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듯 확신에 차 있죠. 그렇게 어른들은 악의적 의도 없이 아이들을 조용한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어른들 역시 ‘바람난 남편을 사고로 잃은 싱글맘’이나 ‘걸스바에 다니는 초등학교 선생님’, ‘손녀를 차로 치어 죽(였을지도 모를)인 선생’이라는 편견과 소문의 발신자이자 수신자로 자신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대를 향한 칼날로 이용하죠.      


ⓒ 영화 <괴물>


표현과 감정이 억제된 사회에서 표현의 방법을 모르는 어른들과 그들의 부정적인 감정과 무기력감, 폭력성을 모조리 흡수하는 아이들은 모두 혼란스러워하지만, 문제를 직면하는 대신 은폐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하는 데 익숙해진 일본의 관료주의 사회는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미성숙한 어른들이 선사한 조용한 절망 속에서도 초등학생 소년 둘은 ‘우주’와 ‘환생’, 그리고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누구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죠. 이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기적이 마법을 부립니다.      



ⓒ 영화 <괴물>
ⓒ 영화 <괴물>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괴물>은 세 갈래의 서로 다른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으로 재연하는 것이 반복되는 모티브인데, 다른 비슷한 구성의 영화처럼 매끄럽고 만족스러운 서사의 연결을 <괴물>은 일부러 피해 갑니다. 오히려 답보다 더 많은 의문을 제기하죠.    

  

영화는 인물을 마음껏 오해하게 만들어 관객을 실험하며 질문을 던집니다. ‘괴물은 누구지?’     


ⓒ 영화 <괴물>


조용하고 차분한 일본의 초등학교,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진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어른들. ‘싱글맘’ 사오리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좋든 싫든, 자녀에 대해 가장 잘 모르는 어른은 오히려 가까이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부모와 선생인 경우가 많습니다. 관객은 사오리와 함께 그의 아들 미나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떠올리게 됩니다. 첫 번째 막은 울부짖는 바람과 함께 다가오는 태풍으로 불안하게 마무리됩니다.      


ⓒ 영화 <괴물>


어른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다툼이 끝난 후, 우리는 미나토와 그의 반 친구이자 또래 친구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끔찍할 정도로 밝고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조숙한 왕따, 요리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카메라가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며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보게 됩니다. 정적이고 무기력한 1막과 2막의 시선과 달리 3막에선 카메라 워크와 리듬이 달라집니다. 호흡 패턴도 달라지죠.      


영화는 세 번이나 불타는 건물의 이미지로 돌아갑니다. 3막으로 나뉜 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다시 들려주기에 불이 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이야기의 시작으로 되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죠. 하지만 불타는 건물은 영화를 떠도는 감정적인 유령이 되기도 합니다. 유년 시절, 사랑, 오해, 편견, 폭력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세상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계속 상기시켜 줍니다.      


그 훨훨 타오르는 불을 끄기라도 하려는 듯 거친 태풍 속 폭우가 몰아치는 밤, 함께 도망치는 두 소년은 이 물로 모든 감정을 씻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합니다. 자신의 성 정체성조차 아직 잘 모르는, 그래서 자신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해 괴물처럼 느끼는,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느낌에 아이들은 용감하게 마주 섭니다. 어른들은 어차피 늘 거기 없고, 답도 없다는 걸 소년들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요.      


ⓒ 영화 <괴물>


영화는 마지막 챕터에서 위험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 동안에도 바람개비 같은 유쾌함과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따뜻함으로 가득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뻗은 손 사이로 빠져나와 꺄르륵 웃으며 자유롭게 달려 나갑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반짝이는 햇살과 함께 질주하는 해방감으로 아름답게 승화되죠. 자비에 돌란 감독의 <마미>가 떠오르는 엔딩입니다. 


ⓒ 영화 <괴물>



<괴물>은 말이 많은 영화가 아닙니다. 그런 영화가 각본상을 받은 건 역설적입니다. 바로, 정제된 언어의 힘입니다. 영화 내내 인물은 대담한 발언 대신 말끝을 흐리거나 단순한 단어를 반복하며 더 불투명하고 과묵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언어로 건드리지 않고, 침묵으로 남겨진 부분에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고 믿게 되는 힘이 있죠. 그렇게 여백이 많은 언어와 미장센이 만나 일본 사회의 민낯에 뿌연 안개를 끼얹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괴물>의 힘은 점점 강해집니다. 적대적인 공동체에서 친밀하고 황홀한 고립으로 좁혀지는 이야기의 힘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우아한 결말을 향해 가는 가장 ‘일본스러운’ 영화입니다.             



  





사요나라, 사카모토     


미나토를 연기한 구로카와 소야, 요리를 연기한 히이라기 히나타, 두 아역에 대한 감독의 아름답고 정교한 연기 연출력은 진정성이 짙게 묻어납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여전히 그만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죠. 감독의 편집은 과감한 생략을 고집하고, 촬영 감독 콘도 류토는 음습한 어둠 속에서 환상적인 빛으로의 탈출을 가리키는 신화적인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유작이 사운드트랙입니다. 그의 연주는 진부한 관습이나 상투적인 표현에 굴복하지 않고, 미나토와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호 관계와 외로움을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당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거친 숨소리마저도 마이크에 고스란히 녹음된 사카모토의 피아노 연주는 불과 바람 소리, 소년들의 장난감들이 빙글빙글 돌며 내는 휘파람 소리처럼 멜로디가 아닌 자연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스스로 축복하라     


<괴물>은 과연 괴물이 누구인지 찾는 데 혈안이 되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회의 압력과 규범을 만들어 내는 어른들 자신의 자세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영화 속 소년들이 조롱하듯 외치는 ‘괴물이 누구게?’라는 메이라 속에서 본질적으로는 세상을 악당과 피해자로 나누고 싶어 하는 어른들, 그리고 자신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 비겁한 민낯을 마주하라고 말합니다.      


ⓒ 영화 <괴물>



“미나토와 요리에게 기쁨에 겨워 비명을 지르고, 흥분하고, 뛰어다니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축복하라고 말했어요.”     


영화 <괴물>의 엔딩 씬 촬영에 대해 고레에다 감독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스스로 축복하라”는 이 한 문장으로 우리는 왜 고레에다 감독이 이 시대의 거장인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수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식은 ‘공감’입니다.”     


기념비적인 퀴어 영화 <헤드윅>의 감독이자 심사위원장이던 존 카메론 미첼이 제76회 칸영화제에서 <괴물>에 최고의 성소수자 이야기 부문인 퀴어종려상을 시상하며 한 말입니다. 일본 영화 최초로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괴물>은 성소수자를 넘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억지로 적응하도록, 혹은 적응하는 척하도록 강요받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에 전하는 위로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게 부모, 자식 간이라도. 아니, 부모, 자식 간이라 더 폭력적이고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의 단편을 확신해 미필적 고의로 서로에게 폭력을 저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서로의 인생에 사각지대를 방치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시대를 읽고, 시대의 위기를 감지하고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괴물>은 훌륭한 도덕적 지성과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당신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순 없지만 완벽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 누구도,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괴물이 아닙니다. 



                      

ⓒ 영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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