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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진저리 치도록 너무나 평범한 ‘악’

이 영화는 과거가 아닌 현재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by 조하나


*이 글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담장 너머, 한 가족의 평온한 일상이 흐릅니다. 햇살은 눈부시고, 정원의 꽃들은 만개했으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죠. 그러나 그 평화로운 풍경 아래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인간 역사의 가장 어두운 비명이 낮게 깔려있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소리를, 그 외면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악의 기괴한 평범성’을 우리 눈앞에 생생히 펼쳐 놓습니다. 우리는 그 담장 앞에서 과연 언제까지 귀를 막을 수 있을까요?



평범한, 진저리 치도록 너무나 평범한 ‘악’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자신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이후 최고의 홀로코스트 영화”라 극찬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입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더 웨일> <패스트 라이브즈> <톡 투 미> <비프> <문라이트> 등 기발하고 파격적인 예술 영화 및 시리즈를 제작‧배급해 오며 미국 독립영화계의 떠오르는 신흥 강자로 꼽히는 스튜디오 A24 영화이기도 합니다. 제76회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죠. 같은 해 황금종려상은 <추락의 해부>에 돌아갔지만, 두 작품 모두 산드라 휠러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지휘관이자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다섯 자녀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합니다. 회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과 낚시를 즐기고, 회스 부인은 정원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죠. 대부분의 집안일은 유대인 하인들이 처리하고, 담장 너머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대인의 유품은 고스란히 회스 가족에게 전달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예고편 / 한국 배급 찬란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이자 유대인 감독이 다룬 홀로코스트 영화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영국 출신으로 1990년대 미셸 공드리, 스파이크 존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뮤직비디오계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입니다. 90년대 황금기를 맞았던 브릿팝과 브리티시록을 대표하는 매시브 어택, 블러, 라디오헤드 등의 뮤직비디오를 찍었죠. 자미로콰이의 ‘Virtual Insanity’는 지금까지 회자되는 글레이저 감독의 명작입니다.



자미로콰이 ‘Virtual Insanity’(1996)




2000년, 글레이저는 <섹시 비스트>를 통해 장편 영화감독으로 데뷔합니다. 동시대 스타일리스트로 함께 비교되는 가이 리치와 에드가 라이트와는 달리 대중성을 지양하고 색다른 소재와 연출의 예술 영화를 지향하는 글레이저 감독은 독창성과 실험성 강한 연출과 각본을 고집하죠. 건조한 화면과 실험적인 연출 속에서 소품을 탁월하게 이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배경 채도를 낮춘 대신 극단적인 조명을 사용해 화면의 시야와 집중도를 높여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감독의 스타일은 그의 세 번째 장편 <언더 더 스킨>에서 도드라집니다.


글레이저 감독은 유대인입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통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대명사와도 같은 ‘아우슈비츠’라는 엄중한 주제를 절제된 연출과 각본으로 탄생시킨 그는 놀랄 만큼 덤덤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이와 상반되게 고급스럽고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정원의 조경을 보여주는 미술과 조명으로 잔인한 상황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꼬집고 풍자합니다.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A24





진저리 쳐지는 악의 배경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그중 음향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습니다. 제77회 영국 아카데미에서도 음향상을, 제36회 유럽영화상에서도 음향상을 받았죠. ‘유대인’인 글레이저 감독이 ‘홀로코스트’라는 영화의 주제와 거리를 유지하고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운드 연출’이었습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보이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글레이저 감독은 영화 내내 유대인이 박해받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간접적인 음향과 암시, 대화, 연출을 통해 짐작만 할 뿐이죠. 담장 너머에선 인류 역사의 가장 끔찍한 만행이 벌어지고 있는데 가해자와 그 가족은 아무렇지 않게 평화롭게 일상을 누립니다. 게다가 그들을 다루는 시각조차 건조하고 덤덤합니다. 그런 와중에 동물과 식물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회스 가족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위화감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영화 속 음향이 탁월하게 작동합니다. 평화로운 회스 가족의 일상에서 마음대로 켰다 끌 수 없는 배경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담장을 넘어오는 유대인들의 아우성과 나치의 명령 소리, 발포음과 비명소리, 불길에 휩싸인 용광로 소리입니다. 회스 가족이 아무리 화려한 꽃들로 악몽을 덮으려 해도, 담장 너머 스며드는 피의 비명은 그들의 정원마저 서서히 잠식해 들어갑니다. 영화 내내 이 무시무시하고 진저리 쳐지는 소음이 저음역부를 차지하며 깔려있습니다. 가장 압권은 영화가 끝난 후 스태프 롤이 올라갈 때 나오는 배경 음악입니다. 영화 내내 조금씩 들리던 아우성을 한꺼번에 응축한 듯 관객을 압도하는 이 사운드는 베를린 지하철, 함부르크 축구 경기장, 2022년 파리 폭동 등 전 세계에서 일어난 소리를 수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꽃은 피고, 아이들은 웃으며 뛰어다닙니다. 담장 너머 재가 날립니다. 그 재로 꽃은 더욱 붉어집니다. 그리고 회스의 가족은 그 붉음을 사랑합니다. 중공업과 인간의 고통이 공존하는 수용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영화 내내 관객을 괴롭힙니다. 아니, 영화가 끝나고 나면 더 합니다. 불쾌하고도 불편한 배경음은 회스 가족의 아름다운 정원에 피어난 달리아의 핏빛을 더욱 붉게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끔찍한 폭력과 공포를 직접 보여주지 않고도 가장 폭력적인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우아하게 보여줍니다.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A24





나치의 집, 누군가의 ‘지옥’으로 만든 그들만의 ‘천국’

유대인 글레이저 감독이 이 영화와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독특한 ‘촬영 방식’입니다. 집 안과 정원 곳곳에 여러 개의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뒤 스태프들은 벽 뒤에 있는 트레일러로 모두 철수했죠. 배우들은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 덕분에 배우들은 정말 자기들끼리만 생활하듯 행동하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글레이저 감독이 “나치의 집에 있는 ‘빅브라더’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관찰 일지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결과물이 되었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드라마가 없습니다. 피해자 서사나 절망과 싸운 홀로코스트 영웅 서사를 피하는 대신 관객의 상상력과 감정적 반응을 위해 최대한의 공감을 남겨둡니다. 관객은 드라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회스 가족의 저택 담장 너머 수용소 화장터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밤하늘을 밝히는 용광로의 붉은빛, 장미밭을 비옥하게 하는 회색빛 재 같은 디테일에 주목하게 됩니다.


강박에 가까운 사각형 촬영 구도 역시 단조롭고 평범한 누군가의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자 감옥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극적인 드라마 없이 영화에서조차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홀로코스트라는 배경에 사운드와 미술만으로 서늘한 암시를 만들어 관객을 공포로 휘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름다움과 잔인함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한국 배급 찬란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그랑프리를 수상할 당시 일부 비평가들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스토리텔링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이 영화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그립니다. 유대인 감독이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홀로코스트라는 민감한 소재를 영화로 다루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자기 절제와 감성의 결여가 오히려 감독이 이 주제에 대해 얼마나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더욱 강력하게 말해줍니다.





‘괴물’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다

집에 돌아온 루돌프 회스의 가죽 장화를 인부가 수돗물로 씻어 내자 물이 빨갛게 변합니다. 정원 인부가 수용소에서 나온 재를 화단에 뿌리고, 회스 부부의 딸은 몽유병을 앓고 있으며, 큰아들은 동생을 온실에 가두고 ‘쉭쉭’ 거리는 가스실 소리를 내며 괴롭힙니다. 가족의 개는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정원을 뛰어다니며 벽 아래 흙냄새를 맡죠. 영화 내내 관객을 괴롭히는 불쾌하고 불편한 배경음과 시각으로 전해지는 매쾌한 연기 냄새는 회스 가족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얻어야 할 ‘인터레스트(Interest)’, 즉 ‘이익’이 있으니까요.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한국 배급 찬란




반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 있는 포로들은 담장 너머로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요? 회스 가족의 아이들이 웃으며 뛰놀고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며 즐거워하는, 자신들에겐 결코, 다시는 허락되지 않을 일상의 소리들이었겠죠.


이처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신화적인 악’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묘사된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들에게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부여합니다.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이들은 별나거나 특별하거나 미치거나 아프지 않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으로 하여금 용서할 수 없는 잔인함 뒤에 숨겨진 ‘악의 평범성’을 마주하도록 안내합니다.




회스 가족의 실제 저택 사진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한국 배급 찬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악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은 나치 친위대 장교이자 홀로코스트를 총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통찰한 개념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유대인 교수를 해고했습니다. 철도 회사는 수용소행 열차를 운영하고, 화장 회사는 수용소에 대규모의 화장터를 지원하고, 각종 제약 회사는 수용소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에 참가했죠. 이렇게 학살에 대한 대규모 시스템적 동조가 이뤄졌고, 이러한 구조적 악이 나치의 전체주의를 장기간 기능하게 했습니다.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한 독일 나치 부역자들은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나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끔찍한 결과에 대해 깊이 사유하지 않았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회스 가족의 모습은 이 ‘악의 평범성’이 어떻게 일상 속에서 발현되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회스가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수십만 명의 학살을 태연히 계획하고 지시하는 모습, 회스 부인이 유대인의 유품인 모피 코트를 탐내고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며 담장 너머의 비명은 안 들리는 척 애써 무시하는 모습, 심지어 아이들마저 폭력적인 놀이를 무감각하게 따라 하는 장면들은 ‘생각하지 않음’과 자기기만이 어떻게 괴물을 만드는지 생생히 증언합니다.


히틀러나 괴벨스 같은 ‘악마적’ 인물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질문하지 않고, 주어진 시스템이나 명령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일 수 있다는 아렌트의 경고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회스 가족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안의 잠재된 ‘평범한 악’을 대면하라고,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라고 촉구합니다.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한국 배급 찬란




누군가의 비명 위에 세운 나의 안락한 정원


생각하기를 멈춘 개인의 ‘평범한 악’은 회스 부인의 경우처럼 시대적 상황과 결합하여 파괴적인 욕망으로 발현됩니다. 회스 부부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은 노동자 계급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사회를 뒤덮었던 거대한 광기는 개인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폭력마저 정당화했습니다. 혼돈 속에서도 개인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죠. 그 암울한 시대의 그림자 아래, 회스 부부 역시 오늘날 많은 이들처럼 소위 ‘부르주아’라 불리는 안락한 삶을 열망했습니다.


유대인 포로에게서 빼앗은 모피코트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선 회스 부인의 모습, 차가운 입술에 남의 것을 덧바르는 행위는 단순한 허영심을 넘어섭니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나를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고 불러요”라고 자랑할 때, 그 목소리에는 피와 재로 세운 왕국에 대한 도착적인 만족감과 함께, 그 이면에 자리한 불안과 공허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려는 자기기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남편의 전근 명령으로 그 ‘낙원’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히틀러까지 언급하며 격렬히 저항하는 모습은 단지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한번 손에 쥔 특권과 그것이 주는 허상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멈추면 생각합니다. 생각하면 반성하게 되죠. 그래서 회스 부인은 멈춰 서서 생각하는 순간 마주하게 될 죄의식과 실존적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쉴 새 없이 정원을 가꾸고 일상에 몰두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성찰이나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생각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담장 너머의 절규와 매캐한 연기로부터 의도적으로 눈과 귀를 닫은 채 말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채 오직 자신의 안위와 허영만을 좇는 그 모습은 시대의 야만이 한 개인의 영혼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자화상입니다.


감독은 회스 가족의 자료를 조사하면서 당시 그들의 모습이 현재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처럼, 아우슈비츠 담장 바로 옆에 세워진 그들의 안락한 낙원, 그리고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회수 부인의 천박하리만치 필사적인 욕망은 과연 먼 과거의 이야기로만 치부될 수 있을까요?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한국 배급 찬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역시 보이지 않는 수많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은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고, 온라인상의 익명성은 혐오와 무분별한 낙인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첨단 기술의 발전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인 이들의 고통이 숨겨져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일상은 어쩌면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희생이나 외면 위에 세워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계층, 인종, 젠더, 세대, 이념의 갈등으로 곳곳에 높은 벽이 세워지고, 그 벽 너머의 고통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일상이 된 것은 아닐까요?


영화 속 회스 가족의 모습에서, 혹시 우리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애써 무시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의 그림자를 발견하지는 않으셨는지요. 나의 안락한 정원은 혹시 누군가의 비명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닌지,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의 부조리 앞에서 얼마나 자주 침묵하고, 또 얼마나 쉽게 동조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쌓아 올리고 있는 ‘담장’은 무엇이며, 그 담장 너머에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과거의 비극이 단순한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언제든 우리 곁에서 되풀이될 수 있는 현재의 경고임을 일깨웁니다.





(좌)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우) 루돌프 회스 가족의 실제 모습






악이 깊고 어두울수록 한 점의 빛은 더 밝아진다

영화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실의 질감을 벗어난 듯,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열화상 카메라 시퀀스는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사전 조사를 통해 만난 폴란드 여성, 알렉산드라 비스트론-코우드지젝의 실제 경험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그림자가 드리운 절망의 땅에서, 당시 아우슈비츠 근처에서 거주하던 십 대 소녀였던 알렉산드라는 밤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유대인들의 호송로나 노역 장소에 몰래 사과 한 알, 빵 한 조각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연민을 넘어, 인간이 가장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존엄성을 지키고 희미한 연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슴 저린 증언입니다. 훗날 폴란드 지하 반군에 가입해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그녀는, 영화에서처럼 수용소의 한 포로가 절망 속에서 작곡한 애잔한 선율의 악보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간직해왔던 낡은 자전거와 빛바랜 드레스는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잊혀가는 기억을 현재로 불러내는 성스러운 유물처럼 다가옵니다.


글레이저 감독 스스로 “이 영화를 만들면서 너무 절망적이고 암울해서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다”고 고백했듯이, 인간의 끝없는 악의를 마주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을 밝히듯 다가온 알렉산드라의 이야기는 그에게 영화를 완성할 결정적인 힘과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거대한 악의 시스템 앞에서 한 소녀가 보여준 소박하지만 숭고한 저항의 행위, 그 사과 하나에 담긴 온기는 꺼지지 않는 인간 정신의 증거이자 희망의 씨앗처럼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 장면들이 유독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것은 단순한 시각적 차별화를 넘어 다층적인 의미를 함축합니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차갑고 건조한 현실의 질감과는 대조적으로, 열화상 이미지는 인물의 구체적인 형상 대신 오직 체온의 흔적만을 보여줍니다. 이는 알렉산드라 개인의 선행을 넘어, 그 암흑의 시대에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와 인간애를 익명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형태로 시각화하는 듯합니다.



ⓒ 존 오브 인터레스트 / 한국 배급 찬란




마치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화면 위로 번지는 붉고 노란 온기의 형상들은 보이지 않는 연민과 생명력 그 자체를 스크린에 새기며, 관객에게 다른 어떤 장면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깊은 정서적 파장을 전달합니다. 밤의 장막 뒤, 발각될 경우 닥칠지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행해지는 소녀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은, 이 독특한 시각적 표현을 통해 그 위태로움과 순수함, 그리고 성스러움까지 동시에 담아냅니다.


결국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악의 평범성’ 앞에서, 알렉산드라의 이야기는 ‘선의 평범성’, 혹은 ‘용기의 평범성’이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인간의 얼굴을 제시합니다. 그녀는 역사를 바꾼 영웅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인간다움을 실천했습니다. 이는 거대한 악의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저항의 방식과 그 의미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어쩌면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순간에 건네는 작은 사과 하나가, 어떤 구호나 이념보다 더 강력한 인간적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알렉산드라는 이 영화가 세상에 공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삶과 이야기는 이 영화에 잠시 숨통을 트이게 하는 온기를 불어넣어 주지만, 동시에 그 빛이 너무나 작고 연약했기에 역사의 거대한 비극과 현실의 참혹함을 더욱 아프게 반추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미약한 빛이 있었기에,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게 됩니다. 절대 악 앞에서 작은 선은 과연 무력한가, 아니면 그 자체만으로 영원불멸한 가치를 지니는가?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차마 쉽게 답할 수 없는 묵직한 질문을 우리 가슴에 새겨 놓습니다. 그녀가 남긴 온기는 그래서 단순한 감동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집니다.





끝내 토해내지 못한 인간성


회스가 건물 복도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격렬한 구토감을 느끼는 장면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장 악몽 같으면서도, 동시에 인간과 악의 본질에 대한 가장 첨예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입니다. 이는 단순한 생리적 현상을 넘어, 그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려는 어떤 절규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그의 육체는, 그의 이성과 의지가 외면하고 합리화해온 모든 참상에 대해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몸이 마지막으로 보낸 인간성의 조난 신호였을까요, 아니면 이미 괴사해버린 양심의 희미한 잔영이었을까요.


이 장면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에서 인도네시아 학살 가해자가 자신의 과거 행위를 ‘재연’하며 구토하는 섬뜩한 순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두 구토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액트 오브 킬링>의 인물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로 소환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자신의 범죄를 영화로 만들며 과시와 혼란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 격한 신체적 반응을 보입니다.


반면 회스의 구토는 특별한 재연의 과정 없이, 그의 지극히 ‘일상적인’ 업무 공간이자 생활 공간인 아우슈비츠의 건물 내부에서,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이는 그가 저지르는 악이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그의 삶과 분리될 수 없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철저한 감정 통제와 직무에 대한 몰두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결국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죄의식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악에 동화된 내면을, 혹은 그 악이 너무나 견고하게 응고되어 있어 어떠한 정화의 가능성마저 상실해버린 상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는 마치 그의 시스템이 이미 ‘악’을 정상으로, ‘선’이나 ‘죄책감’을 오히려 토해내야 할 이물질로 받아들인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구토는 그래서 정화의 실패이자, 자기기만의 극단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공허한 몸짓으로 남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영화의 시각적 연출을 통해 더욱 강화됩니다. 텅 빈 듯 차갑고 폐쇄적인 건물 복도, 홀로 고립되어 계단을 ‘내려오다’가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이미지는 권력의 정점에서 느끼는 실존적 공허함과 함께, 거스를 수 없는 정신적, 도덕적 ‘추락’을 암시합니다. 그가 그토록 공들여 쌓아 올린 안락한 일상과 성공이라는 허울 좋은 벽 뒤편에서, 그의 존재 자체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토 장면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더욱 파고듭니다. 그의 몸은 본능적인 인간적 반응을 보일지언정, 그의 의식과 이후의 행동에는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이는 악이 이미 개인의 의지를 넘어 얼마나 깊숙이 내면화되고 시스템의 일부로 자리 잡았는지를, 그리고 그 악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증명합니다. 회스는 결국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한 채, 자신이 구축한 아우슈비츠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전범 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이 유대인 학살을 감독했던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은, 이 ‘토해내지 못한’ 구토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시간의 벽을 허물고 현재를 응시하는 과거의 눈동자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정 과거의 시간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듯하다가도, 예고 없이 현재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의 차갑고 정적인 풍경으로 관객을 데려다 놓습니다. 정갈하게 청소되는 유리 진열장, 텅 빈 복도, 그리고 그 안에 박제된 희생자들의 유품들은 단순한 시간의 전환을 넘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홀로코스트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들려는 의도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잔혹한 학살이 자행되던 바로 그 공간이 오늘날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온하게 관리되는 박물관으로 존재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섬뜩한 아이러니를 자아내며 시간의 벽을 허물고 과거의 비극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박물관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증언을 위한 공간입니다. 영화가 이 현대의 공간을 비추는 것은 명백히 그 기억의 무게와 증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리창 너머의 유품들을 무심히 닦아내는 청소 노동자들의 모습이나, 텅 빈 공간의 적막함은 그 참혹했던 역사에 대한 현대인의 무감각 혹은 망각의 가능성에 대한 경고처럼 서늘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회스 가족이 유대인의 유품을 탐욕스럽게 취하던 과거의 장면과, 싸늘한 유리관 속에 갇힌 채 ‘전시’되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유품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선 사이에서,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기억되고 소비되는지에 대한 불편한 질문과도 마주하게 되죠.


이는 마치 관객의 안전한 몰입을 의도적으로 깨트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스크린 속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요구하는 ‘브레히트적 소격 효과’와도 닮아있습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주창한 이 ‘소격 효과’란,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제시함으로써 관객이 감정적 동화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성찰하도록 이끄는 연출 기법을 의미하는데요. “당신은 이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회스 가족의 의도적인 외면과 당신의 일상적인 무관심 사이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영화는 침묵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 회스가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며 격렬한 구토감을 느끼고 마치 역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장면 전후로 길게 삽입되는 현대 박물관의 시퀀스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한 개인의 도덕적 파탄과 그가 자행한 범죄가 남긴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결과물을 극명하게 병치시키는 연출입니다. 회스가 내려가는 그 끝없는 계단은, 그가 평생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 즉 그가 저지른 죄악이 영원히 기록되고 기억될 역사의 심판대로 향하는 길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의도적으로 충돌시키고 중첩시키는 형식을 통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단순한 역사 재현 영화를 넘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성찰을 요구하는 현재진행형의 문제작으로 자리매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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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실제 회스 가족 (우) 아우슈비츠 형무소에서 처형되는 루돌프 회스





몇 걸음만 더 가면 다시 그 길이다

홀로코스트를 말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 명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유대인 감독은 바로 그 영화의 메시지를 실천하는 용기를 냈습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을 때 글레이즈 감독은 수상소감을 통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가자 지구 민간인 사망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들이 그때 우리에게 무엇을 했는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세요!’라고 말하는 영화”라며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으로 살해된 사람들이든, 지금 진행 중인 가자 지구 공격의 피해자들이든, 인간성 말살의 희생자란 점에선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우리는 저항하고 있습니까?”라며 호소했습니다.


당시 소감을 말하는 감독의 손이 떨리는 걸 보면, 그 역시 자신의 말의 경중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 감독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로 아카데미 상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정부의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만행에 유대인의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활용되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자신의 영화 커리어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유대계 영화인들이 양분되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후 에이미 파스칼, 제니퍼 제이슨 리, 줄리아나 마굴리스, 데브라 메싱, 일라이 로스, 마이클 래퍼포트 등 1천여 명 이상의 유대인 창작자와 경영진이 글레이즈 감독을 명예훼손으로 비난하는 공개서한에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이번에는 450여 명이 넘는 유대인 창작자들이 글레이저 감독을 옹호하는 공개서한에 서명했죠. 그중에는 조엘 코엔(코엔 형제), 토드 헤인즈, 호아킨 피닉스, 데이비드 크로스, 일라나 글레이저, 애비 제이콥슨, 엘리엇 굴드, 월리스 숀, 영화 작곡가 미카 레비, 극작가 토니 쿠슈너와 조이 카잔 등이 있습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 AFP PHOTO



이처럼 한 예술가의 용기 있는 외침은, 역사를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침묵이 때로는 어떻게 암묵적인 동조가 될 수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글레이즈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이 끔찍한 사건과 우리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결코 과거가 아니며, ‘현재’ 전 세계 곳곳의 극우 포퓰리즘의 성장과 함께 이러한 일들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어리석고 위험하고 끔찍한 길이 불과 몇 걸음만 가면 있습니다.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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