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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y 30. 2024

어느 순간이 되면,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제7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추락의 해부>

 

작년(2023)에 열린 76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프랑스 여류 감독 쥐스틴 트리에의 영화 <추락의 해부>입니다. 이 영화로 쥐스틴 트레에는 <피아노>(1993)의 제인 캠피, <티탄>(2021)의 쥘리아 뒤쿠르노에 이어 칸 영화제 역사상 세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이 되었습니다.     






작품과 수상 경력이 어마어마한 독일 배우 산드라 휠러(국내개봉을 앞두고 있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열연했으며, 쥐스틴 트리에 감독과의 작업은 2019년 <시빌>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와 스완 아르라우드(<신의 은총으로>)가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16세의 배우 밀로 마차도 그라너가 영화의 중요한 키를 쥔 역할로 마법을 부립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칸 영화제 레드 카펫에 등장했던 보더콜리 ‘메시’의 연기도 엄청나죠. 메시 역시, 작년 칸영화제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친 개에게 주는 팜도그상을 받았습니다.     



<추락의 해부>에서 '스눕'으로 활약해 작년 칸영화제에서 팜도그상을 받은 '메시', 올해 칸영화제에서.


<추락의 해부> 공식예고편

           



‘부부’라는 ‘가족’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구성하는 두 인물, 산드라와 다니엘. 독일 출신의 성공한 작가 산드라는 건방지고 오만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흩뜨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실제 배우의 이름 산드라와 영화 속 이름 산드라, 같습니다.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산드라를 주연으로 염두에 뒀다고 밝혔죠. 제가 해외에서 유러피안들과 오랫동안 생활한 경험에 따르면, 독일인, 특히 ‘독일 여자는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인색하고 강압적’이라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상대를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프랑스인, 영국인들이 많았습니다. 감독 역시 이를 이용한 것 같아요. 반면 예민하고 섬세하고 유약하기까지 한 프랑스 출신의 작가 지망생(그는 몇 년째 시작한 소설을 끝낸 적이 없습니다) 사무엘은 아들 다니엘이 영구적으로 시각을 잃게 된 사고에 책임을 느끼며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자신이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가족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성별이 드리워지면서 영화의 내러티브는 점점 비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추락의 해부>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영화가 시작되며 산드라가 작품 관련 인터뷰로 찾아온 젊은 학생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온통 눈으로 덮인 알프스의 고립된 산장을 맴도는 겨울 한기 속에서 두 여성의 상기된 웃음소리와 와인 잔이 춤추는 가운데 이와 대조를 이루는 (이후 법정에서 ‘여성 혐오적’인 노래라 소개되는) 50센트의 ‘P.I.M.P.’가 울려 퍼집니다. 인터뷰를 망치고픈 다니엘의 유치한 시위죠.       


사무엘이 한적한 알프스의 눈 쌓인 샤를 앞마당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자 검찰은 산드라의 고의적 살인을 의심합니다.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닿은 시각장애를 가진 11살 아들 다니엘과 그의 안내견 스눕이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인이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고 강인한 산드라의 캐릭터 자체는 검찰이 그녀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재포장됩니다.      


언뜻 보면 법정 드라마의 형식을 띤 듯 보이는 영화이지만 그리 간단하게 정의되진 않습니다. 트리엣 감독과 그녀의 남편인 아서 아라리가 각본에 공동 참여한 <추락의 해부>는 다층적이고 복잡하고 섬세하고 입체적입니다.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한 접근 방식은 전형적인 법정 드라마와는 차별된, 확실히 세련되고 미묘하게 흥미로운 디테일을 하나하나 쌓아 올립니다.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는 내러티브를 엮어내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법정 씬들을 만들어냅니다.        

                                 



<해부의 추락>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깊게 뿌리 박힌 불편한 시선에 대해 질문합니다.

특히 피고인이 여성이고, 문화적 타자인 경우
사회의 편견과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변화시키고 왜곡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살핍니다.      




산드라와 다니엘의 국적과 언어, 문화의 차이는 관계가 시작될 때 더할 나위 없는 이국적인 매력으로 느껴졌겠지만,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이를 증폭시키는 역할로 변합니다. 영국 런던에서 만난 프랑스인 남편 다니엘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아는 이 하나 없는 프랑스 알프스 시골에서 사는 독일인 사만다는 남편과 아이와 대화할 때 프랑스어도 독일어도 아닌, 영어로 소통합니다.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줄 아는 그녀가 영어를 고집하는 건 그녀의 의견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어권이기도 합니다.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외국인 산드라에게 프랑스 법정은 프랑스어 사용을 강요하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주도권과 힘의 균형형에 미세한 변화가 일면서 서툰 프랑스어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사만다는 점점 더 영어 사용 비중을 높입니다.  

    

사무엘이 죽기 전날, 결혼과 자녀, 직업, 부부관계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던 싸움은 많은 부부가 때때로 겪는 일종의 ‘폭발’입니다. 관객을 포함한 법정의 모든 이들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논쟁이 녹음된 파일을 듣게 되는데, 사무엘은 산드라가 집안일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홈스쿨링과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는 일로 자신의 소설을 쓸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노동은 당연한 것이지만, 남편의 변덕과 고집으로 낯선 나라로 이주해 담담하게 살아가는 산드라의 희생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무엘은 산드라가 프랑스어를 쓰는 대신 영어를 강요한다고 비난하지만, 산드라는 서로 언어가 다른 두 인간의 공통 구역이 영어임을 상기시킵니다. 하지만 사무엘에겐 모든 것이 자신만이 감당해야 할 희생으로 여겨집니다.      



ⓒ <추락의 해부>




이 둘의 싸움은 사무엘의 죽음에 비추어 볼 때 산드라에게 도움이 되는 정황은 아닙니다. 결혼은 철저한 ‘남’이 만나 가족이 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형식이자 제도입니다. <추락의 해부>는 결혼을 모자이크와 같다고 말하죠. 한두 개의 강렬한 색상의 타일이 눈길을 끌 수는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 그림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산드라가 법정에서 합리적으로 지적했듯 결혼 생활의 밝고 행복한 순간을 선택해 들여다봤다면, 이 부부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그림으로 그려졌을 겁니다.     


검찰의 기소는 결혼 생활의 트라우마와 뿌리 깊은 불행만을 골라내 산드라의 양성애 성향과 작가로서의 성공이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기에 충분한 여자라는 걸 부각하는 데 집착합니다. 재판정에서 산드라에 쏟아지는 비난 어린 눈빛과 그녀를 조롱하는 언론 보도는 집에서 얌전히 아이를 돌보고 남편을 내조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성별이 뒤바뀌었다면, 검찰과 언론은 과연 똑같이 반응했을까요?      


ⓒ <추락의 해부>



영화 <추락의 해부>는 이러한 차별과 위선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폭로하는 동시에
관객이 자신의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도록 안내합니다.

부부관계 안에서의 역할 분배와 분업,
결혼생활에서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아내의 역할에 대한 편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그에 대해 죄책감을 갖거나
사과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영화 곳곳에 심어져 있습니다.

때때로 산드라가 다니엘을 죽였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산드라 자체가 재판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산드라는 육아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우선시하고, 글을 쓰기 위해 자신과 타인의 삶을 이용하고, 결혼 생활 중 다른 이와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대중의 허락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살인죄를 입증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검찰과 대중, 언론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피고인 여성에게 기대되는 피해자 역할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죠. 감독은 <추락의 해부>에서 카메라를 산드라의 레벨 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시켜 그녀가 강력하고, 지배적이며, 심지어 위협적인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카메라가 종종 올려다보는 산드라는 결코 작지도, 연약하지도 않습니다.      



ⓒ <추락의 해부>



검찰이 산드라의 성 정체성이나 직업적 성취와 능력, 어머니로서의 자질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여성을 ‘선’과 ‘악’, ‘희생자’와 ‘가해자/살인자’로 구분하는 기존의 편견과 인식에 반문하게 됩니다. 영화는 산드라를 닮았습니다.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강요하지도 않죠. 절제되고 강력한 접근 방식을 통해 <추락의 해부>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논의 지점을 열어주며 생각을 자극하는 경험으로 안내합니다. 우리가 안다고 자신했던 질문을 끊임없이 확장해 답할 수 없는 것으로 바꿔버리죠.      


법정에서 다투는 씬이 많지만 마침내 평결이 나왔을 때 관객이 영화에서 이 소식을 접하는 방식은 법정에서의 공식적인 발표가 아닌, 흥분이 고조된 법정 밖에서 TV 리포터를 통해 전해지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법정 드라마’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 전형성에서 대담하게 벗어난 모습입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중요한 건 법정 다툼이 아닌, 그로 상징되는 사회와 인간의 모순과 문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추락의 해부>는 법정 드라마나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여성에 대한 캐릭터 연구에 더 가깝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고인이 된 사무엘은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사무엘이 죽기 전날 밤의 논쟁에서 드러낸 산드라에 대한 불안과 질투, 시기, 자격지심, 불평불만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그녀의 실용주의적인 모습은 전통적인 성역할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낯설고 신선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강철 같은 결단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결단력으로 인해 그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산드라가 ‘그’가 아닌 ‘그녀’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미소를 통해 세상과 어울리는 법을 배웁니다. 여자의 미소는 다른 사람을 안심시키고 자신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는 행동입니다. 무의식적인 습관이든 선택이든, 많은 여성들이 미소를 짓기 때문에 남성들이 이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 여성도 분명, 있습니다. 산드라는 자신이 선택한 경우에만 미소를 짓기 때문에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완전히 확신할 수 없기에 때론 그녀를 불쾌하고 접근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치부합니다.  

    

휠러는 조용히, 때로는 말없이 놀라운 연기를 펼칩니다. 어느 순간 산드라가 다니엘이 시각을 잃게 된 사고에 대한 죄책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다고 느꼈는지 설명하는 순간은 그녀의 사고방식을 대변합니다. 산드라는 세상을 향해 함부로 웃지 않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강렬함은 그 자체로 일종의 사려 깊음이며, 그녀의 감정은 누구 못지않게 깊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 속 모든 인물과 관객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산드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생의 소울메이트였던 남편을 잃었지만 영화 내내 슬퍼할 시간도, 공간도, 애도할 자격도 허락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대해서도 세상에 징징거리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아들, 다니엘에게 감정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에게 어찌 이리도 잔인한지요. 



ⓒ <추락의 해부>





산드라는 의구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배심원들에게 동정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상대방의 호의나 환심을 사기 위해 웃지 않고,
진심일 때만 미소를 짓습니다.

복잡한 구문과 현란한 형용사가 제거된 새로운 언어와도 같으며,
그것을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집니다. 

아니, 과연 우리는 진실이라는 걸 알아볼 수나 있을까요?    


  




법정에서 증언을 해야 하는 시각장애인 다니엘은 죽은 아버지의 자살을 주장하며 아버지를 저주할 것인지, 아니면 살인을 암시하며 어머니를 비난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사실은 감정과 상관없다’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감정이 중요한 유일한 사실입니다.      


다니엘은 촉각과 청각이 발달한 시각장애를 가졌지만, 피아노를 치고, 개를 목욕시키고, 눈 덮인 위험한 지형에서 긴 산책을 하는 등 독립적입니다. 또한 매우 복잡하고 예민한 아이이기도 합니다. 주 양육자인 아버지는 자신의 죄책감과 고통을 다니엘에게 투사하지만, 다니엘은 자신의 삶과 장애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갑니다. 어쩌면 다니엘은 영화에서 알프스를 뒤덮은 눈처럼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의 지점에 설 수 있는 인물이죠. 이 영화에서 마차도 그라너는 다니엘을 알프스 깊은 호수처럼 아주 깊은 인물로 표현합니다. 마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티모시 살라메의 등장을 보는 듯합니다.                    







여성이 폭력을 당하고, 살해당하고, 토막 나는 영화,
즉 ‘불쌍하고 고통받는 여성을 보라’는 식의 영화를 수백 편이나 봤습니다.

내가 왜 또 만들어야 하나요?    


<추락의 해부>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후 <뉴욕 타임스>에서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를 통해 “한 여성이 지능과 야망, 정신적 강인함 때문에 어떻게 공격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라고 덧붙였죠.      


여성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을 철저히 감시하는 도덕주의 사회를 보여주면서 성 역할의 역전이 죄책감과 무죄를 인식하는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만약 힘 있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저스틴 트리에 감독은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노는 여성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탐구합니다.      


이미 다양한 사회과학 실험을 통해 수많은 과학자가 증명했듯, 세상이 여성보다 남성을 더 믿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여성으로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남성이 일반적으로 용서받는 특정 방식으로 여성이 똑같이 행동할 때 사회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영화는 관객들에게 공을 넘깁니다. 어떤 이들은 집안일과 재정적 불행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반복적으로 실패한 곳에 주저앉아 성공한 아내를 질투하며 불평만 늘어놓는 사무엘의 모습에 공감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산드라를 성적 일탈자이자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배우자로 묘사하려는 검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인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죠. 그리고 이러한 모든 분석과 논쟁을 통해 우리들은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관념을 바꾸거나, 적어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사회의 깊은 편견을 건드리고,
결혼과 가족, 삶에 대해 세심하고 미묘하게 접근한 <추락의 해부>,
이 영화의 화룡점정은 불확실성,
즉, 영화가 끝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구심과
퍼즐의 중요한 조각에 닿지 않은 느낌입니다.

      

산드라를 연기한 휠러는 영화 내내 아무 미세한 경계를 넘나듭니다. 그녀는 개방적인 듯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데 익숙한, 읽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관객은 산드라를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응원하고 싶은지조차 결정할 수 없습니다.                   

ⓒ <추락의 해부>



과연 산드라가 남편을 죽였을까요?
      

유종의 미를 거두며 법정 드라마의 만족감을 주는 듯했던 <추락의 해부>는 동시에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봤는지 확신할 수 없는 밤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의 저주는 결국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끝내 영화가 거부한 그 대답은 산드라의 변호사의 말처럼 “죽이든, 죽이지 않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일 겁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현실 자체보다 우선합니다. 진실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실은 종결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내내 “이해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다니엘의 강박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영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사무엘에게 일어난 일에 매달려 산드라의 유죄와 무죄를 논할 것인가, 아니면 영화의 궤적 속에서 성숙한 지적 자극을 통해 21세기 관계에 대한 좀처럼 표현되지 않은 숨겨진 진실을 볼 것인가?              




      

그래도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다면 '스눕'에게 문의하세요 ⓒ 추락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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