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후반부터 싱어송라이터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무대와 차트를 누볐던 파올로 누티니(Paolo Nutini)가 5년 만에 세 번째 앨범 <Caustic Love>을 발표하고 처음으로 내한했다. 파올로 누티니의 목소리에 이끌려 한번이라도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본 사람이라면 입이 딱 벌어졌을 것이다. 인생 반평생쯤 지나온 소울 뮤지션의 희끗한 모습을 상상한 그 자리에 스물 중반을 지나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영혼은 청년의 푸름보다 더 짙고 깊은 빛깔이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하시시박
파올로 누티니가 첫 번째 정규 앨범 <These Streets>를 발표한 게 2006년이었다. 당시 음악계는 이미 세계적으로도 화려하고 자극적이고 잘 뽑아낸 상품들로 잠식되고 있었으니, 잘 생긴 십 대 후반 소년이 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와 감정으로 노래를 하는 것 자체가 주목받을만한 일이었다. 앨범 수록곡은 글로벌 브랜드 CF 삽입곡으로도 쓰였고, 유명 드라마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다. 이어 발매된 두 번째 정규 앨범 <Sunny Side Up>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차트 상위권을 휩쓸었다.
개인적인 짐작으로 파올로 누티니는 이 시기 방황을 좀 했던 것 같다.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에서 일찌감치 학교도 그만두고 로컬 라이브 클럽에서 뮤지션의 꿈을 키웠던 소년의 삶이 몇 년 사이 할리우드 타블로이드지를 장식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당시 파올로 누티니의 꾸며져 보이는 모습은 (자신의 의사인지 레이블의 의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이슨 므라즈를 연상케 했다.
2집의 성공으로 연이은 투어를 마치고 파올로 누티니는 혼자만의 방으로 돌아가 고민했을 것이다. ‘제2의 OOO’가 되느냐, 비교 대상이 없는 ‘One and Only’가 되느냐.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이른 성공으로 희생해야 했던 자아 탐색의 부재를 파올로 누티니는 완벽하게 메꿨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2014년 봄 한가운데, 세상에 울려 퍼진 세 번째 앨범 <Caustic Love>에서 파올로 누티니는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 1960~70년대의 고전 소울이나 펑크, 재즈, 포크 등의 장르에 21세기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실험과 연구가 엿보이는 결과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파올로 누티니만의 분명한 패션과 스타일이 확립됐다. 여기서의 패션은 복식이 아닌 음악을 말하는 것이다. 싱어송라이터에게 맞춤옷처럼 강요되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할을 뛰어넘어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창조하는 디자이너이자 화가가 되어 돌아왔다. 그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컨디션은 어떤가?
기분이 좋다. 어제 강남과 이태원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노란 리본에 서명도 했다.(파올로 누티니는 이 날 저녁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서 왼쪽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기도 했다.)
한국 팬들과의 만남이 처음인데 오늘 무대에서 어떤 걸 전달하고 싶나?
사실 내 노래 중 어떤 곡들이 한국에서 히트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한국 팬들이 어떤 걸 기대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웃음) 팬들의 반응도 어떨지 모르겠고. 이런 부분이 공연하는 입장에선 약간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흥미로운 점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공연을 할 수 있어서 기대도 되고. 어제 아침에 이곳 호텔 식당에서 조식을 먹다 데미안 라이스를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 관객들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데미안 라이스는 내가 기타를 처음 잡을 수 있게 영감을 준 뮤지션이기도 하다!
스스로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뮤지션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분명 이전과는 다르다. 나는 트렌디한 젊은 재즈 뮤지션도 아니고, 록 스타나 팝 스타도 아니다. 그렇다고 소울 싱어라고 하기엔…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소울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자신의 음악과 자아를 찾아가는 건 27살 청년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이 모든 걸 음악을 통해 찾아가려고 한다.
목소리만 듣고 나이대를 상상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목소리로 노래를 할 수 있는지….
담배와 불면증, 위스키가 내 목소리를 만들었다.(웃음) 나는 그저 노래할 때 목소리를 통해 내 기분과 감정을 말할 뿐이다. ‘Iron Sky’를 녹음할 당시 정말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런 감정을 표출하다 보니 그런 목소리가 나왔던 것 같다. 내가 기타나 피아노를 조금씩 연주할 줄은 알지만,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목소리이다. 말하자면 목소리가 내 악기 같은 거지. 그렇기 때문에 내 목소리로 많은 실험과 시도를 해보고 싶은 거고. 처음 내 목소리를 듣고 굉장히 나이가 많을 거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막상 내가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땐 어떤 소리가 나올지 나도 궁금하다.
5년 만에 나온 새 앨범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투어를 하는 동안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가지만 사실 공연만 하고 호텔에만 머문 적이 많아 늘 아쉬웠다. 쉬는 동안 예전에 투어 했던 곳을 다시 찾아 여행을 했다. 그리고 목공일을 하는 친척들이 사는 지방에 머물러 일도 배웠다. 17살에 학교를 그만둔 이후부터 내내 음악에만 몰두하며 쉼 없이 달려왔는데, 음악을 만드는 나에게 어찌 보면 이 시간은 나에게 꼭 필요했던 것 같다.
80년대에 태어난 젊은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고전 장르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과 감각을 가진 것 같다.
뮤지션에게 굉장한 칭찬이다. 사실 최근에 나온 밴드들도 좋은 음악을 하고 있지만 내가 예전부터 들어왔던 음악은 올드 스쿨이 대부분이다. 물론 다른 뮤지션들과 경쟁하는 데에 있어서 뒤처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만 나는 다른 아티스트들과 경쟁 자체를 하고 싶지 않다.
음악뿐 아니라 당신의 외모에 열광하는 이들도 많다.(웃음)
사실 미의 기준이 어떤 건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음악과 외모를 연관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겉모습은 영원할 수 없지 않나. 하지만 내 음악은 조금씩 더 진화하고 있으니까.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사실 지금 내 헤어스타일도 난 좀 웃긴 거 같은데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해준다.(웃음)
*여기까지의 인터뷰는 다른 매체들과 함께 ‘라운딩 인터뷰’로 진행됐다. <아레나>는 파올로 누티니와 단독으로 마주하고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얻게 되었다. 그는 좀 더 편안해졌고 솔직해졌다.
이번 앨범을 들어보면 파올로 누티니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인다. 전작들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사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2집 앨범이 나올 때까지 내 음악에 대한 완벽한 컨트롤이 없었던 것 같다. 반면 이번 앨범을 만드는 동안에는 수많은 프로듀서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음악적으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계속 배워나가고 있고. 아날로그적인 사운드나 무드도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됐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 그런 음악이 나오는 건 당연한 건데 말이다. 매 순간 새로운 걸 배워나가면서 내가 추구하는 음악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완벽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노력하려고 한다.
5년이라는 공백이 뮤지션에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속도가 빠른 세상에는. 음악을 쉬는 동안 신을 떠나 객관적인 포지션에서 뮤지션으로서의 자아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것 같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쉬는 동안 주위 가까운 지인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좀 더… 보통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생활 말이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음악 외에도 내가 잘하는 게 뭐가 있을까 찾아보려고도 했다. 그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생전 모르는 곳을 여행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 봤다. 순수한 마음으로 여자를 만나기도 했고. 때론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때도 있더라. 이 시간이 나에겐 정말 중요했다. 뮤지션으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어떤 뮤지션들은 투어에 익숙해져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거든. 그래도 1집, 2집 활동으로 돈을 벌고 나니, 주위에서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터치하지 않아 많이 자유로워졌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신념이 더 확고하다. 나만의 원칙이 있고, 그걸 지키기 위해 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다. 솔직히 ‘New Shoes’(1집 타이틀) 같은 노래보다는 더 진화된 음악을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는 머리를 길러서 넘기곤 했는데, 그런 ‘꽃미남’ 이미지도 피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남성적인 모습에서 너무 멀어져 있어서 내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모르겠다.(웃음) 결론적으로 좋은 음악과 앨범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고 가기로 한 거다. 나에게 휴식 기간은 모험과도 같았다. 시작과 끝이 없는 여행.
1집과 2집에서 멜로디와 보컬, 가사가 중심이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사운드적인 부분에 최대한 집중한 것 같다. 1집과 2집이 책을 읽는 기분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한 폭의 그림이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의도했던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그렇게 들었다니 너무 기분이 좋다! 3집 앨범 작업을 시작했을 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과 분위기가 공존했다. 많은 곡들이 비주얼적인 요소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신디사이저는 무지개나 유니콘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켰고, 기타 사운드는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지게 하는 거다. 사람들이 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자주 눈을 감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런 이미지들을 떠올리고 있는 거다. 그런 시네마틱 한 요소들을 음악으로 가져오려고 한다.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아이작 헤이즈의 음악들이나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과 같은 비주얼적인 성향이 강한 곡을 들어보면 영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성스러운’ 앨범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지금 내가 있는 레이블(Atlantic)이 아이작 헤이즈가 몸담았던 곳이기도 한데 이곳은 전통적으로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 아티스트에게 많은 자유를 주는 편이다. 그래서 3분에 제한되지 않는, 7~8분이 넘는 곡이 나올 수 있었다. 음악에 있어 제한된 틀은 없다고 본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가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많은 뮤지션들이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음악을 만들고 대중에게 다가간다. 나에게 있어서도 음악은 사람들과, 세상과 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이다. 나는 문자나 이메일도 잘 못하고, 트위터나 스카이프, 페이스북을 하는 것도 어색하다. 하지만 사람들과 이렇게 직접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그리고 이런 대화를 음악을 통해 가장 잘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2시간 후면 공연이지만, 지금 기타를 가져다주면 여기서 연주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할 수도 있다.(웃음)
ARENA HOMME+, July 2014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아레나 옴므 플러스와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인터뷰이도 나도,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인터뷰였다. 보통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뮤지션은 여러 매체 기자들과 함께 10분 정도 짧게 진행하는 '라운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파올로 누티니는 나에게 절대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 뮤지션이었다. 다행히 오랫동안 음악을 열심히 듣고 공연을 다니고 취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반 레이블 담당자들과의 네트워크가 형성됐고, 또 내가 어떤 질문을 하는 인터뷰어인지 다들 알았기 때문에 나만 독점으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단독 인터뷰 질문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그는 의자를 점점 더 테이블 가까이 붙여 앉았다. 공연 리허설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매니저의 마지막 독촉에 결국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가 끝났다.
그가 내한했던 해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난생처음 방문한 한국에서 노란 리본을 달고 공연해 준 그가 고마웠다. 지구 반대편 푸른 눈을 가진 남자도 따뜻한 심장으로 공감하고 위로하는데, 정작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선 혐오와 조롱, 무책임으로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파올로 누티니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3집에 실린 슈퍼 싱글 'Iron Sky' 때문이었다. 마침내 자아를 발견한 인간의 자신감과 겸손함, 공감과 연대, 카리스마가 살아 넘치는 곡이었다. 매일 팽목항에서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던 JTBC 기자 친구에게 이 노래를 보내기도 했다.
전 세계를 울린 이 곡의 중간에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연설 부분이 나온다. 2024년,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유효한 노래다.
To those who can hear me, I say, do not despair.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절망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The misery that is now upon us is but the passing of greed,
the bitterness of men who fear the way of human progress.
지금 우리에게 닥친 불행은 탐욕이 지나가고
인간의 진보의 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일 뿐입니다.
The hate of men will pass, and dictators die,
and the power they took from the people will return to the people.
And so long as men die, liberty will never perish.
인간의 증오는 사라지고 독재자들은 죽을 것이며,
그들이 국민으로부터 빼앗은 권력은 국민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는 한 자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Don't give yourselves to these unnatural men!
이 부자연스러운 인간들에게 여러분 자신을 내어주지 마세요!
Machine men with machine minds and machine hearts!
기계의 머리와 기계의 심장을 가진 기계 인간들!
You are not machines, you are not cattle, you are men!
여러분은 기계도 아니고 가축도 아니고 인간입니다!
You, the people, have the power to make this life free and beautiful,
to make this life a wonderful adventure.
여러분은 이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만들고,
이 삶을 멋진 모험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Let us use that power.
그 힘을 사용합시다.
Let us all unite!
우리 모두 단결합시다!
Charles Chaplin, The Great Dictator (1940)
찰스 채플린, 위대한 독재자 (1940)
10년 전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쿨함'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허스키하고 소울풀한 목소리는 더 깊어졌으며 그의 노래는 모든 곳에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