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만든 제1차 세계 대전 넷플릭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022년 10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독점 공개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아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해자’이기에 오랜 침묵을 지켜왔던 독일이 독일 감독과 독일 배우, 독일어로, 독일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2020년 발표되어 <기생충>과 오스카를 다퉜던 샘 멘데스의 영화 <1917>와 견줄만한 수작이었습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팬이라 흥미롭게 봤던 영국 드라마 시리즈 <패트릭 멜로즈>를 감독한 에드바르트 베르거가 메가폰을 쥐고 공동 각본에 참여했으며 펠릭스 카머러, 알브레히트 슈흐, 아론 힐머, 모리츠 클라우드, 다니엘 브륄 등이 출연하는데요, 오스트리아 연극배우 출신으로 영화는 처음이었던 펠릭스 카머러의 연기가 정말 대단합니다.
카머러는 몇 개월만 전장에 나가면 ‘전쟁 영웅’으로 고국에 돌아올 수 있다는 국가의 선전과 홍보로 낭만주의에 빠진 어린 청년의 눈빛이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어떻게 변해가는지 훌륭하게 표현함으로써 열강들의 힘겨루기인 의미 없는 전쟁에서 죽어간 얼굴과 이름 없는 수많은 군인들에 또렷한 얼굴과 이름을 각인시킵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제76회 영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촬영상, 음악상, 음향상, 외국어영화상, 총 7개 부문을 수상했고,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9개 부문에 올라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외국어영화상, 총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수상 부문으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아름다운 연출과 촬영 및 편집, 목가적인 색감과 절묘한 배경 음악, 인간성의 본질과 전쟁의 민낯을 보여주는 전투 장면, 그리고 뛰어난 연기를 갖춘 작품입니다.
한 세기 동안 각 세대가 영화화한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1928년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원작인데요. 전쟁의 현실을 강력하게 묘사와 평화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담은 반전 소설로 나치에 의해 조직적으로 불태워진 많은 작품 중 하나였으며, 현대 독일 전역의 많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 이미 1930년과 1979년, 두 번 영화화된 적이 있었죠. 제1차 세계 대전을 겪거나 그로부터 생존한 참전 병사가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2020년의 최신작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앞의 두 미국 작품과 달리 독일에서 자력으로 자국의 원작을 성공적으로 영화화한 작품으로도 의미가 깊습니다.
오래된 전쟁 공포를 다음 세대가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을 직접 겪은 세대부터 이를 역사로 배운 현세대까지, 모든 세대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게 됐네요.
2020년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작들이 다뤘던 도입 부분을 과감히 생략했고, 액션의 비중을 크게 늘렸습니다. 주인공의 학우들이 전장에서 죽어 나가는 부분을 비교적 담담히 그려내며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을 일으킨 독일 지도부를 통렬하게 비판하죠. 과감하게 원작을 각색해 독일의 사실상 패배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 반전 주제를 강조합니다.
자국의 뼈아픈 역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미화 없이 부각한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여전히 전쟁과 침략을 부정하는 일본에 비하면 독일은 자국의 잘못을 통렬히 비판하고 반성하는 데 있어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죽은 병사의 군복의 여정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 전선에 합류한 17세 파울 보이머(펠릭스 카머러). 영화는 전쟁 3년 째인 1917년 봄부터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선언되기까지 파울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1917년 봄, 3년 차 전쟁에 접어든 독일 제국은 병력 부족으로 고등학생들까지 참전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수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전장의 실상을 모르고 ‘한 몇 개월 있다 돌아오면 전쟁 영웅이 될 거다’라는 환상에 젖어 대부분 친구들과 함께 지원했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특정 도시나 지역의 징집병들을 전선으로 보낼 때 함께 묶어두는 현지화 모집 방식을 따랐습니다. 지리적 유대가 연대를 강화한다는 가정에서였죠. 다른 참전국들 역시 어느 정도는 이 방법을 사용했지만 독일은 특별히 이 전략에 집착했습니다. 옆에 누워 있는 시신이 어린 시절 이웃이나 학교 친구일 경우 상실의 트라우마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파울과 그의 친구들은 마치 소풍을 가는 것처럼 전쟁터에 나갈 준비를 합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신체검사를 거쳐 군복을 지급받으며 순식간에 열일곱 학생에서 병사가 되어버립니다. 파울 역시 하나마나인 신체검사를 받고 군복을 지급받는데, 신품이어야 할 군복에 다른 사람의 명찰이 붙어있는 걸 발견합니다. 이에 모병장교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반납된 옷”이라며 명찰을 떼어내고 다시 파울에게 돌려줍니다. 파울은 들뜬 마음으로 친구들과 훈련소를 거쳐 신병이 되어 서부 전선으로 향합니다.
전장으로 가는 길, 신병들은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대한 전쟁 선전을 부추기는 사랑과 와인에 관한 노래를 부르지만 그들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한 하사가 파울에게 “너는 내일 새벽이면 죽게 될 거라”라며 한 경고는 영화 전반에 걸쳐 저주처럼 울려 퍼집니다. 참호를 파고 싸우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적진으로 진격하며 날아드는 총알을 이리저리 피하는 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죠.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 참전한 병사들의 생존 시간은 5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얼굴과 이름 없이 무의미하게 희생된 젊은이들
입대 첫날, 낙천주의자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지녔던 파울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학교 친구이자 전우를 모두 잃고 피와 진흙으로 뒤덮인 공포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자비한 살인마로 변해갑니다. ‘영웅’이나 ‘용맹’에 대한 환상은 전쟁의 현실이 시작되면서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순수했던 파울의 눈빛은 환멸로 가득한 전쟁 한가운데에서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또 차갑고 냉정한 눈빛으로, 또 영혼이 빠져나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눈빛으로 변합니다. 따뜻함이나 가벼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영화에서 파울의 진정한 존재감은 영화에 심장 박동과 영혼을 불어넣습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제1차 세계대전 특유의 참호전과 진창 싸움을 빼어나게 연출했습니다. 또한 전차와 초기형 전투기, 화염방사병 등을 등장시켜 인류 역사에 전쟁 기계가 처음 활용되었을 당시 병사들이 느꼈을 충격과 공포를 그대로 재현해 냈죠. 특히 프랑스군이 생샤몽 전차로 참호에 있는 독일군을 짓이기고 화염방사기로 독일군을 눈앞에서 태워버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입니다.
이렇게 처참하고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진창 싸움이 진행되는 한편, 독일의 휴전위원회 의장이었던 마티아스 에츠르베르거와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흐 원수 사이의 휴전 회담이 전개됩니다. 휴전 협상에서 독일 지도부가 겪는 갈등,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의 생활 수준 차이, 절정에 달한 최악의 기근, ‘순무의 겨울’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영화는 군부와 정치권력 브로커들이 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크루아상이 신선하지 않다고 불평하며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휴전 협상을 벌이고 개인적인 명성이나 자존심에 집착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이 일으키지도 않은, 또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전쟁 게임에서 젊은이들이 ‘졸’처럼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모습을 냉혹한 시각으로 보여줍니다. 역사의 모든 전쟁이 항상 그랬고, 그것이 바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비극입니다.
전장에 뛰어든 지 몇 시간 만에 전사한 하인리히의 군복이 그의 몸에서 벗겨져 깨끗하게 세탁되고 꿰매져 독일 북부로 보내진 후 파울의 손에 닿은 것처럼 젊은이들은 끝없는 죽음의 순환에서 끊임없이 대체됩니다. 앳된 얼굴의 수많은 독일 병사들이 프랑스의 가스 공격에 의해 집단으로 목숨을 잃은 걸 발견한 캣(알브레히트 슈흐)이 “독일은 곧 텅 비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은 전쟁에 익숙해진 파울이 프랑스 군인을 칼로 찔러 죽인 후 그의 죽어가는 마른 숨소리를 잠재우려다 자신의 행동의 실체를 마주하는 모습입니다. 파울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적을 죽여야 하는 전장에서 지금껏 그랬듯 익숙하게 살인을 저질렀지만, 프랑스군은 몇 분 동안이나 쌕쌕거리며 경련을 일으킵니다. 파울은 이내 정신이 번쩍 들어 공포심과 죄책감에 몸을 떨며 죽어가는 프랑스 병사의 얼굴을 닦아줍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 가족사진을 보며 그 역시 파울처럼 전장에서 분쇄기에 갈리는 고깃덩어리가 아닌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되죠.
휴전협정은 결국 마무리되었으나 서부 전선의 독일군을 책임지는 전쟁광의 결정으로 또다시 의미 없는 전장으로 내몰리는 군인들의 표정엔 더 이상 희망도 분노도 없습니다. 가차 없이 몰아치는 죽음의 맹공격 속에서 젊은이들은 지휘부의 단 한마디 명령에 총을 메고 사지로 걸어 들어갑니다. 섬뜩할 만큼 아무 감정 없이 건조하다 못해 바스러질 듯합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 양 진영의 서부 전선 위치는 0.5마일 이상 이동한 적이 없습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는 자랑스러운 전쟁 영웅 같은 건 없습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해 불필요하게 희생된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무려 1,700만 명의 병사가 그 틈새에서 희생되었습니다. 서부 전선은 오직 죽은 자들에게만 이상이 없을 뿐입니다.
독일에선 환영받지 못한 영화
독일 출신의 베르거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 DNA는 지난 세기에 두 번이나 자멸 충동이나 파괴 충동에 굴복하여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전 세계에 엄청난 공포를 가져온 나라에서 태어난 역사적 교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수치심과 죄책감, 공포를 남겼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내내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볼 때마다 독일이라 대답하는 걸 부끄러워했습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영미권에서 극찬을 받은 것에 비하면 정작 모국인 독일의 반응은 별로였다고 합니다. 원작 소설을 대담하게 각색했다는 것에 대한 비난과 헐리우드 스타일, 오스카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졌다는 혹평이 대부분 독일 평단의 반응이었는데요.
독일 현지에서 이 영화에 대한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는 “미국의 관객과 기업, 시상식에 독일의 중요한 역사적 유물을 팔아 명성을 얻었다”입니다. 세계 대전을 미국과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과는 상당히 다르게 바라보는 독일인들에게 레마르케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 이후 자국의 역사를 깊이 부끄러워하며 살아가는 독일인들에게 마치 공개적인 회개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소설의 중요한 도입부를 빼고, 프랑스와 독일 지도부 간의 협상 장면을 추가해 매끄럽게 포장된 넷플릭스용 전쟁 서사시로 바뀐 것을 많은 독일인들이 불쾌해했다고 합니다. 또한 영화 내내 독일인들이 ‘용감한 약자’처럼 보이게 하고, 관객들이 독일 병사가 울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심지어 지역 농가에서 거위 한 마리를 훔치는 것을 응원하게끔 하고, 탱크와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는 젊은 독일 병사에 집중되는 것이 많은 독일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닌 이상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가 원작을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과 전쟁의 본질에 대한 메시지가 약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소설의 판권을 유지하느라 오랜 시간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고 투자 문제로 영화화가 쉽지 않았던 제작진의 입장에선 넷플릭스 스타일로 매끄럽게 뽑아내며 영화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니었을까요?
한편으론 자국이 일으킨 전쟁 범죄 영화에 이리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독일의 진보적인 마인드와 태도가 부럽기도 합니다.
무섭게 현재적인 영화
100년 전의 전쟁을 다룬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무섭게 현재적인 영화입니다. 전장의 영광과 흥분, 대의의 정당성, 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어른들의 거짓말과 선전에 현혹된 젊은이들은 ‘전쟁은 모험이며 나는 늘 올바른 편에 있다’라고 믿고 지금도 전쟁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전선에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과 싸우고,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참호에 갇혀 있으며, 실제 군사적 목표와 목적은 병사들은 물론 대부분의 지휘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과 서방 국가의 지도자들은 책상머리에 걸터앉아 실존적 이해관계를 논하고, 젤렌스키가 새로운 처칠로 추앙받았습니다. 자신의 집이 파괴될 걱정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지도자들은 더 많은 탱크와 대공 미사일을 지위하고 또 요청합니다. 전쟁에 대해 고상한 연설만 늘어놓는 지도부들은 1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많은 젊은이가 죽어 나가고 마을을 지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결정이 ‘애국’이라는 명분을 뒤집어쓰고 행해지지만, 이들은 파울과 그의 친구들처럼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을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1분이라도 일찍 끝내는 것조차 수천 명의 생사를 가르는 결정이라고 말합니다. 점점 전쟁에 무뎌지고 무감각 해져 가는 우리에게 독일이 보내는 묵중한 경고입니다.